아케메네스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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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의 시대별 강역 변천.

1. 개요
3. 캄비세스 2세 : 이집트 정복
4. 다리우스 대제
4.1. 영토 확장
4.2. 왕의 길과 사트라프 체제 구축
4.3. 그리스와의 전쟁
4.3.1. 1차 그리스 침공
4.3.1.1. 마라톤 전투와 그리스의 승리
5. 크세르크세스 1세
5.1. 2차 그리스 침공
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6.1. 대그리스 전쟁의 종결과 그리스의 분열
7.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7.1. 번영과 마지막 중흥기
8. 쇠락과 각지의 반란
9. 마케도니아의 침입과 멸망



1. 개요[편집]




왕조의 명칭이기도 한 창시자 아케메네스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에티오피아공주 안드로메다의 아들로 제우스의 손자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그리스 작가들의 창작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며 다리우스 1세의 대에 이르러 창작된 내용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애초에 시대도 한참 다르다.

사실이었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오니아를 점령하려던 당시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되자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나라를 조사하라는 명까지 있는 것을 보면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그리스인들은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을 거의 자기네 세계관에 끼워맞춰 이해하려 들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이는 그리스인만의 행위가 아니라서 고대에는 낯선 이민족을 자기네 세계관에 끼워맞추는 일이 많았다. 당장 중국만 해도 사마천흉노하나라의 후손으로 기록했다.

왕조의 최초 발상지는 이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페르시아'가 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페르시아 문서를 참조하자.


2. 키루스 대제[편집]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는 현 이란파르스 지방이다. 대략 기원전 1000년 즈음에 파르스 지방에 정착했고, 원래는 정주 민족이 아니라 유목 민족이었다. 맨 처음부터 아케메네스 왕가가 이란 지방을 다스리던 건 아니었다.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의 급부상 이전에도 같은 이란계 국가인 메디아칼데아신바빌로니아와 손잡고 기존의 패권국인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후 패권국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아케메네스 왕가는 안샨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 세력일 뿐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첫 아케메네스 왕가의 군주는 아케메네스로, '아케메네스 왕가'라는 이름 자체를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이후 아케메네스의 뒤를 이어 테이스페스, 키루스 1세, 캄비세스 1세 등이 연달아 즉위했지만 큰 업적은 남기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의 강대국은 메디아였고 아케메네스 왕가는 메디아의 속국 정도에 불과했다.


2.1. 메디아 정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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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
키루스 2세가 정복한 영토.
아케메네스 왕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키루스 2세 시대부터다. 어릴 적부터 비범했던 면모를 드러낸 키루스 2세는 메디아의 마지막 군주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이자 안샨의 왕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다.[1] 559년 캄비세스 1세가 서거하자 키루스 2세가 안샨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안샨은 메디아 제국의 일부였고 메디아 제국은 서쪽의 대국 리디아와 대립하며 근동 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대제국이었다. 이후 안샨과 메디아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대군을 맡겨 키루스 2세를 제압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하르파고스가 키루스 2세에게 붙어버리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기원전 553년부터 550년까지 전쟁이 계속됐고, 결국 엑바타나 전투에서 아스티아게스가 키루스 2세에게 사로잡히며 메디아 제국은 멸망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2]

키루스 2세는 아스티아게스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의 딸 아미티스와 혼례를 올렸다. 이렇게 메디아 왕족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박트리아, 파르티아 등 기존의 메디아 봉신국들도 나름 평화롭게 흡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메디아 지방 전체가 키루스 2세의 손 안에 들어왔지만 이제 새로운 적수가 등장했다.


2.2. 리디아 정복[편집]


그동안 메디아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오던 아나톨리아 서부의 강대국 리디아가 메디아 지방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영토를 넓히고자 국경을 넘어왔다.[3] 당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도시 프테리아를 침공했고,[4] 프테리아를 함락한 후 그 시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아 끌고가버렸다. 리디아가 먼저 선방을 날리자 키루스 2세도 칼을 갈았다. 처음에는 리디아의 속국이던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바로 대군을 이끌고 직접 크로이소스와 격돌했던 것. 키루스 2세와 크로이소스는 프테리아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아무도 승세를 점하지 못하고 서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크로이소스는 다음날 아침 군대를 수습해 수도 사르데스로 후퇴했다.

사르데스로 후퇴한 크로이소스는 동맹국들에게 군대를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때가 겨울이었던지라 군대를 채 모으기도 전에 키루스 2세가 사르데스로 밀고 들어오고야 만다. 키루스 2세는 리디아 동맹국들의 지원군이 사르데스에 당도해 크로이소스를 밀어붙였다. 사르데스의 기병 부대와 끈질긴 방어 때문에 쉽게 성이 함락될 것 같지 않자 키루스 2세는 낙타를 내세우는 기발한 전략을 썼다. 낙타의 냄새에 익숙치 않았던 리디아 군마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이 전략은 잘 먹혀들어갔고, 결국 팀브라 전투에서 크로이소스가 대패하며 기원전 546년 리디아의 수도 사르데스가 함락, 리디아마저도 페르시아 앞에 무릎을 꿇는다.[5]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팍티아스라는 이름의 리디아인에게 명을 내려 크로이소스의 황금을 모두 페르시아로 보내도록 시켰다. 하지만 팍티아스는 오히려 키루스 2세가 돌아가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분노한 키루스 2세는 장군 마자레스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팍티아스가 이오니아로 달아나자 마자레스는 쫒아갔고, 중간에 마자레스가 불명의 이유로 사망하자 하르파구스가 원정을 이어갔다. 이 원정으로 리키아, 킬리키아, 페니키아 등이 페르시아에 편입된다.


2.3. 신바빌로니아 정복[편집]


메디아에 이어 리디아까지 정복한 키루스 2세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전통적인 강대국이던 신바빌로니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메디아와 리디아를 정복함으로써 국력 자체는 신바빌로니아보다 페르시아가 커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농토와 막대한 재물, 바빌론을 방어하는 거대한 이슈타르의 문과 성벽, 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은 키루스 대왕조차 애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바빌로니아를 완전히 공략하지 못한다면 페르시아는 언제든지 측면을 공격당할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너뜨려야만 했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 원정을 시작해 기원전 540년에 엘람 지방과 수사를 함락했고, 결정적으로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 인근 오피스 전투(Battle of Opis)에서 대승을 거두며 결국 신바빌로니아를 꺾는 데 성공한다. 오피스 전투에서 대패한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는 보르시파 지방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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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 입성하는 페르시아 군대
복원되는 예루살렘 성벽[6]
오피스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며 승기를 잡은 페르시아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통째로 돌려 수위가 낮아진 틈을 타 바빌론으로 진격했다. 바빌론의 높은 성벽도 페르시아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바빌론은 그해 10월 12일에 함락된다. 바빌론이 함락되자 모든 걸 포기한 나보니두스도 보르시파에서 돌아와 항복했고, 키루스 2세는 10월 29일에 드디어 바빌론에 입성했다. 키루스 2세는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으로 칭하면서 기존의 바빌로니아 신앙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점령군이 의외로 제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니 바빌론 시민들이 크게 반항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대신전에 기도를 올리고 자신을 마르두크의 대리자로 포장하면서 최대한 반발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키루스 2세의 바빌론 함락 이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을 이룩한다.

참고로 이 바빌로니아 정복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가 바로 이 키루스 2세다. 다니엘서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벨사자르 왕(나보니두스의 아들)이 페르시아군이 쳐들어 오는 줄도 모르고 성대한 연회를 벌이고 있다가 연회가 끝나자마자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평소 관용을 중시했던 키루스 2세는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었는데, 그동안 바빌론에 갇혀살면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제대로 맛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키루스 2세의 은혜에 엄청나게 감복한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사업에 국고를 지원해주기까지하자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쓸 정도였다.[7] 성경에서 이민족 출신으로 이정도의 극찬을 받은 인물은 키루스 2세가 유일하며 그 후에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정도로 키루스 2세의 위업이 엄청났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유대 민족에) 빛을 가져온 자', 즉 '샛별(헬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8] 참고로 키루스 2세가 유대인들을 풀어주었던 것은 신의 예정된 뜻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이 더 크다. 키루스 2세는 대제국의 통치자로서 수많은 민족을 거느렸기에 관용을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족과 분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심지어 정복한 바빌론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약탈과 파괴를 최소화했는데, 이는 구약성경에 묘사된 바빌론의 끔찍한 몰락과는 거리가 멀다.


3. 캄비세스 2세 : 이집트 정복[편집]


일신으로 대제국을 일으켜세운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0년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 2세는 트란스옥시아나 서부에 살던 마사게타이를 상대로 원정을 치르다가 죽었다. 키루스 2세는 역시나 마사게타이를 상대로 선전했고, 계략을 써 마사게타이족 여왕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를 붙잡는데 성공한다. 토미리스는 스파르가피세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 전에 스파르가피세스가 먼저 자살했고, 아들의 죽음에 격분한 토미리스가 전군을 이끌고 나가 결국 키루스 2세를 꺾었다는 것이다. 이후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 2세의 목을 잘라 피가 가득든 항아리 속에 처넣고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피를 마음껏 마셔라!'며 일갈했다고. 이 설화가 유명하긴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키루스 2세가 전사한 건 맞지만 시체가 능욕당하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고, 아니면 그가 스키타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는 말도 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아예 그가 수도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썼다.

키루스 2세가 붕어하자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했다. 그가 즉위할 즈음 이미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렇게 당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인구 부양력이 높던 지역들을 싸그리 움켜쥔 대제국이었다. 소위 '문명 세계'라고 일컬어지던 지방들 중에 유일하게 페르시아에 속하지 않던 나라는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 지방 밖에 없었다. 키루스 2세 역시 이집트를 정벌하려 들었지만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 캄비세스 2세가 그를 이어 이집트 원정을 감행한다. 한편 당시 이집트는 아흐모세 2세 사후 프삼티크 3세가 즉위한 이래 점차 세력이 쇠락하고 있었다.[9] 이를 노린 캄비세스 2세는 페니키아의 해군을 끌어모아 막대한 대군을 이끌었고, 이집트와 페르시아 국경 사이의 유목 민족들과 동맹을 맺어 사막을 건널 안전한 육로를 확보했다. 결국 기원전 525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프삼티크 3세를 대패시키고[10] 프삼티크 3세는 달아났지만 결국 얼마 가지 못해 붙잡혔고, 수도 멤피스까지 페르시아 손에 떨어졌다.

붙잡힌 프삼티크 3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구걸까지 하며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몰래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켜 수도 수사로 끌려갔다.[11] 허나 프삼티크 3세와는 달리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인들에게 굉장한 관용을 베풀었다. 스스로 파라오 직위를 겸하며 이집트인들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했고, 기존 이집트 귀족들과 종교를 모두 존중했다. 파라오들이 전통적으로 쓰던 '상하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썼고, 이집트의 대표적 축제인 아피스 축제를 주관하기도 하면서 굉장히 이집트인들을 존중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이집트가 웬만한 국가는 씹어먹을 정도의 엄청나게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무작정 찍어누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탓도 있었다. 헤로도토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들은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 억압적인 통치를 펼쳤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정복자들이 피정복민들을 대하는 선례들을 생각해보면 꽤나 관대한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

캄비세스 2세는 나일 강 유역을 넘어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기타 북아프리카 지방의 원정은 썩 성공적이지 못했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서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 원정군을 파견하고 이집트 남부의 쿠시도 공격했으나, 극심한 더위에 군사들이 적응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최강대국들 중 하나였던 카르타고에 대한 해상 원정은 페니키아의 비협조로 무산되고야 만다.[12] 어쨌든 그렇게 이집트에 머무르던 캄비세스 2세는 기원전 522년 경 페르시아 본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허겁지겁 페르시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페르시아로 귀환하던 도중 사고사로 결국 사망하는데,[13] 캄비세스 2세가 급작스러운 사망을 맞이하면서 페르시아는 한동안 혼란기를 맞게 된다.


4. 다리우스 대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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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대제
다리우스 대제의 궁정
캄비세스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직후 제위를 거머쥔 사람은 키루스 2세의 아들이자 캄비세스 2세의 동생이었던 바르디야였다. 바르디야는 이미 3년 동안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페르시아가 뒤숭숭한 틈을 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캄비세스 2세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돌아오던 도중 급작스레 사망하자 페르시아의 유일한 황제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이에 제동을 건 이가 있었으니 바로 키루스 2세의 사위 출신인[14] 다리우스 1세였다. 다리우스 1세는 황좌에 앉아있는 바르디야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진짜 바르디야는 캄비세스 2세가 권력 다툼을 우려해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직전 몰래 죽여버렸고, 현재 황좌에 앉은 사람은 바르디야를 사칭하는 찬탈자라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15] 다리우스 1세가 대놓고 황제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도 점차 동요가 일어났다. 결국 바르디야는 즉위한지 1년도 채 못되어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고야 만다. 바르디야가 죽자 다리우스 1세가 혼란을 수습하고 페르시아의 황제로 즉위한다.


4.1. 영토 확장[편집]


수도 파사르가다에에서 대관식을 치른 다리우스 1세는 엑바타나로 이동했다. 가장 큰 까닭은 바르디야의 지지자들이 제국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 바르디야가 쫒겨나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진짜 바르디야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엘람바빌론 등지에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다리우스는 빠르게 움직여 엘람 반란군들을 진압했고 석달 만에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했다. 그러나 반란은 여전히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심지어 그의 지지세가 가장 강한 지방들 중 하나에 속하는 박트리아 지방에서조차 반란군들이 일어났고, 아케메네스 왕가의 본산인 파르스 지방에 메디아, 파르티아, 아시리아, 이집트 등 온갖 군데에서 반란이 번지며 다리우스 1세가 쫒겨나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가 백성들의 지지는 없었을지 몰라도 귀족들의 지지와 군사는 가지고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군대를 동원해 기원전 522년 모든 반란들을 어찌어찌 억누르는 데 성공했고, 이 과정에서 총 9명에 달하는 왕들을 죽여버렸다.

일단 반란을 억누르면서 페르시아 제국을 안정시킨 다리우스 1세는 연이어 외치에 집중했다. 특히 캄비세스 2세 사후 혼란기에 바로 독립을 선포한 이집트를 재복속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몰아 파라오를 자칭하고 있던 페디바스테트 3세를 쳐내고 다시 이집트를 재점령한다. 특히 그는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던 이집트의 페르시아 총독 아리얀데스를 숙청해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얻어냈고[16] 이집트 종교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대한 민심을 달랬다. 다리우스 1세의 관용 정책 덕택에 혼란스러운 이집트는 다시 페르시아 아래에 무릎을 꿇었고 이전에 비하면 훨씬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가 안정을 되찾았다.

기원전 516년 경에는 심지어 저멀리 인더스 강 유역으로 원정을 벌였다. 대군을 직접 이끌고 출정한 다리우스 1세는 중앙아시아, 아리아, 박트리아 지방을 거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에 입성, 심지어는 현대 파키스탄 지방과 탁실라까지도 정복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6년의 겨울을 간다라 지방에서 보내며 인더스 계곡 정복을 준비했다. 기원전 515년에는 결국 인더스 유역을 모조리 집어삼킨 후에야 다시 페르시아 지방으로 되돌아왔다. 전설에 의하면 인더스 유역을 정복한 다리우스 1세는 신하이자 그리스 모험가였던 스킬락스에게 인더스 강을 따라 탐험을 명령했다고 한다. 스킬락스는 인더스 강어귀를 따라 인도양을 통해 홍해를 거쳐 결국 이집트 지방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어쨌든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인더스 일대는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지방들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 황궁에도 인더스 일대에서 온 조공 사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매년 8.3톤에 달하는 금가루를 바치는 등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 세수의 32%를 바쳤다고도 한다.[17]

앞서도 언급했지만 다리우스 1세는 바르디야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개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는데, 한 사람이 스스로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고 자칭하면서 반란의 구심점이 되어 그 불씨가 엄청나게 커졌던 탓이 컸다.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몰아 바빌론으로 진격해 성을 공성하려 들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심지어 옛 키루스 대왕이 썼던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돌려버리는 방법까지 썼지만 먹히지가 않았고, 다리우스 1세는 무려 1년 반 동안 바빌론에 묶여있었다. 그러던 중 신하들 중 하나가 이중간첩을 쓰자는 계략을 생각해냈다. 일부러 조피루스라는 병사가 페르시아를 배반한 것처럼 꾸미고 바빌로니아인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내부에서 성문을 열어주게 만들자는 것. 조피루스는 바빌로니아인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바빌론의 반란도 진압된다. 그러나 바빌론에서 1년 반 동안이나 다리우스가 발이 묶여있는 사이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페르시아를 침공한다.

페르시아를 침공한 스키타이인들은 이란 북부 지방에서 발원해 다뉴브 강우크라이나, 러시아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던 민족으로, 다리우스 1세에게는 선대 키루스 2세를 죽였을 뿐더러 중앙아시아와 흑해 무역을 훼방놓는 원수같은 존재였다. 다리우스 1세는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배다리를 만들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기원전 513년 경에 동유럽의 스키타이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다리우스 1세에게 곤혹스러운 점이 있었으니 바로 유목민족 스키타이인들에게는 점령할 도시도 영토도 딱히 없었다는 것. 스키타이인들은 직접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하기는 부담스러웠는지 기존 마을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최대한 충돌을 피하며 기습 게릴라 공격 쪽으로 전술을 폈다. 난감해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의 왕 이단티루수스에게 서한을 보내 전쟁을 끝내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단티루수스가 대놓고 거절하며 전쟁은 지지부진하게 쭉 이어졌다. 군대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고 군량이 부족해지자 다리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볼가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다만 도시를 직접 점령하진 못했어도 다리우스 1세는 이 전쟁으로 꽤 많은 것을 얻어냈다. 일단 동유럽 지방에서 스키타이인들이 가꿔놓은 비옥한 땅들을 정복했고 스키타이인들의 무역선 약탈도 중지시킬 수 있었다고.


4.2. 왕의 길과 사트라프 체제 구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트라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다리우스 1세가 단순히 군사 업적만 남겼다면 '대제'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우스 1세가 대제의 칭호를 받은 것은 그가 그저 영토 확장에 그친 게 아니라 행정 체계 구축과 내치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기에 가능했다. 다리우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캄비세스 2세에게 물려받은 얼기설기한 제국을 본격적인 행정체계를 갖춘 대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제국의 강역을 총 20개의 사트라피(Satrapies)들로 나누고 각각 지방 총독 사트라프를 임명해 관리하도록 했다. 1번 구역은 이오니아, 2번 구역은 리디아, 16번 구역은 파르티아 이런 식이었다. 가장 부유한 곳은 20번 구역에 해당하는 인더스 강 일대로 제국 세수의 32%를 홀로 책임졌다.[18] 다만 오직 파르스 지방만은 이 사트라피 제도에서 예외였으니 이는 파르스 지방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원지였기 때문. 이 지방만큼은 황제가 따로 관리했다. 각각의 사트라피들은 매년 정해진 만큼의 공물을 금이나 은으로 납부해야했고, 은의 경우 바빌로니아 단위인 달란트로, 금의 경우 에우보이아 단위 달란트로 측정했다. 전국의 사트라피들에게 거둬들인 은은 대략 15,000 달란트가 조금 안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최고 권력자이자 일대의 왕이나 다름없었던 사트라프들은 당연히 페르시아 출신 대귀족이거나 황족이었다. 특히 다리우스를 도와 바르디야를 몰아낸 데 협력한 6대 대귀족 가문 출신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트라프들은 제 지방에서만큼은 도시 총독이나 관리들을 제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세율 역시 사트라프의 마음대로였다. 허나 이렇게 두면 사트라프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질 것이 당연지사, 이를 우려한 다리우스 1세는 사트라프 바로 곁에 비서관을 두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황제에게 바로 보고토록 했다. 또한 비서관 뿐만 아니라 재무관을 따로 황제 직속으로 임명해 사트라프의 금고 관리를 책임지도록 했고, 가장 중요한 지방 군사령관 역시 사트라프가 아니라 황제가 직접 관리했다. 이런 철저한 통제장치에도 만족하지 않았던 다리우스 1세가 추가로 임명한 게 바로 '왕의 눈'과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단. 이 감찰단들은 제국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사트라프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눈에 불을 키고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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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으로 표시된 왕의 길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나다 홀'의 복원 상상도.
다리우스 1세가 남긴 수많은 업적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게 왕의 길이다. 무역을 촉진하고 황제의 명령이 빠르게 제국 곳곳에 내려질 수 있도록 만든 길인데, 제국의 동쪽 끝 사르디스부터 수도 수사에 걸친 길이 2,699km의 거대한 국가규모 사업이었다. 파발꾼들이 말을 타면 무려 9일만에 왕의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파할 수 있었다고. 왕의 길은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부가 위치한 사르디스에서 출발해 아나톨리아 내륙을 거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를 통과했다. 니네베를 통과한 왕의 길은 아래로 꺾어져 바빌론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2개로 나뉘어 하나는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로, 나머지 하나는 엑바타나를 거쳐 저멀리 동방의 실크 로드로 직통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깔아놓은 길 인프라가 워낙 좋아서 후대 로마 제국도 이 왕의 길을 조금만 보수하고 그대로 썼다고 한다. 다리우스 1세는 곳곳 요충지마다 초소와 숙소를 설치해 상인과 파발들이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게 했는데, 이덕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파발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가 벌인 장대한 건축 작업은 왕의 길 말고도 다양했다. 그는 홍해나일 강을 잇는 거대한 운하를 팠고, 심지어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거대한 대운하를 건설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거대한 사업이라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수도 수사에는 번쩍번쩍한 황궁을 신축했고,[19] 파사르가다에 등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 남아있던 미완 건축 프로젝트들조차 모조리 완성시켰다. 신전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서 제국 곳곳에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신전들을 세웠지만 타 종교 신전들도 많이 세워줬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집트 멤피스의 프타 신전과 네크베트 신전. 이집트 뿐만 아니라 엘람, 바빌로니아, 유대교, 메디아, 리디아 등 웬만한 지방의 토속 신앙 관련 신전들은 다 손을 댔다고 보면 된다. 다리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 거대한 건축물들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석공과 건축가들을 떼거지로 끌어가 수사의 황궁을 비롯해 많은 건물들을 만들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페르시아 전체의 건축력이 급속도로 증가했다.[20]

경제적, 종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리우스 1세 시대 들어서 처음으로 '다릭'이라는 금화와 은화를 발행했는데, 금화는 오직 황제만이 발행할 수 있었고 은화는 일반 총독과 장군들도 발행이 가능했다. 화폐라는 존재가 도입되면서 페르시아 경제는 이전보다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초기적인 형태의 은행들이 등장했고 직물, 카펫, 금은보화 등 수많은 물품들이 제국 곳곳으로 쏟아졌다. 다릭 금화의 도입은 세금 걷는 걸 더 쉽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보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한 관용정책을 폈다. 다리우스 1세 본인은 독실한 아후라 마즈다의 신자였고[21] 죽을 때까지 조로아스터 최고 대신관직을 유지했지만 타 종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보수작업에 재정 지원을 계속하기도 했고, 엘람의 신관들을 황궁으로 초청하거나 이집트의 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짓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이후의 샤한샤들은 풍족하고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아 별 노력 없이도 태평성대를 유지시켰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는 말 그대로 오리엔트를 넘어 세계 최강국이었다.[22]


4.3. 그리스와의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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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1차 그리스 침공[편집]


다리우스 1세가 감행한 수많은 원정들 중 가장 잘 알려졌고 역사적인 의미도 큰 원정. 하지만 알고 있듯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사실 이미 페르시아는 기원전 513년 경에 다뉴브 강을 건너 동유럽 일대까지 진출했고, 트라키아 지방까지도 진출하는 등 유럽에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이렇게 거의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확장주의적인 정복 정책을 펼치고 있던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직접적인 전쟁의 계기는 페르시아에 속해있던 이오니아 지방의 반란이었다. 당시 소아시아의 해안가 지방인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키루스 2세 대왕 시절에 이미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는데, 이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아테네가 이를 뒤에서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이오니아 반란의 발단은 철학가 탈레스의 고향이기도 한 밀레투스에서 일어났다. 당시 밀레투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그리스인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함께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타페르네스와 아리스타고라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고, 아리스타고라스가 스스로 참주에서 퇴위한 다음 민주정을 선포해버리면서 대놓고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것.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진압군을 두려워해 그리스 본토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아테네는 도망간 전 참주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받아준 후, 페르시아가 히피아스의 복위와 민주정 철폐를 요구하면서 이미 페르시아의 적으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의 압제를 끊고 민주정을 선포하겠다하니 얼씨구나한 아테네 시민들이 밀레투스에 대한 지원을 결의한 것. 그 외에도 상인 도시 에레트리아가 아테네와 함께 밀레투스를 도왔다. 아테네는 30척의 함대를 파견해 페르시아를 공격, 사르디스 일부를 불태우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얼마 못가 페르시아 기병대의 압도적인 물량에 쫒겨났다. 기원전 494년 라데 전투에서 이오니아 함대가 대패하며 반란은 무위로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테네의 밀레투스 지원은 완벽한 패착이었다. 당시 최강대국 페르시아에게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렸으며 성과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이미 순순히 복속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던 그리스 폴리스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빌미삼아 그리스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이오니아 반란이 진압된 지 2년 후인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양자 마르도니우스를 시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단죄하도록 시켰다. 마르도니우스는 대함대를 이끌고 킬리키아에서 출발해 동진했고, 이오니아 해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이오니아 식민도시들에 민주정을 구성하도록 허락해주며 민심을 추슬렀다. 준비를 끝마친 마르도니우스는 알렉산드로스 1세[23]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봉신국으로 삼는 데도 성공한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것도 잠시, 테살로니키 인근에 정박하던 도중 아토스 산에서 폭풍을 맞아 해군이 궤멸당했고, 세를 추스르기도 전에 트라키아인들에게 기습당하면서 심지어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도 상처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시험삼아 보낸 마르도니우스가 대패하고 돌아오자 다리우스 1세는 일단 외교적으로 해결법을 찾으려 시도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에게 사신을 보내 '흙과 물'을 충성의 맹세로 바치라 요구했다. 조로아스터 신앙에서 흙과 물은 모든 것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흙과 물을 넘겨준다는 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완벽한 복종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막강한 페르시아에 겁먹고 그대로 흙과 물을 바쳤지만 오직 아테네스파르타만은 예외였다. 사절을 물리친 방법도 도시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아테네는 민주정의 근본답게 페르시아 사절을 재판에 세워 죽였고 스파르타는 사절을 우물 속에 처넣어버렸다.[24]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공동으로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으나 스파르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클레오메네스 왕이 감옥에 갇혀버리는 등 제대로 전쟁을 준비할 형편이 못됐다. 스파르타가 혼란스러운 것을 지켜보던 다리우스는 때는 이때다 싶어 바로 대군을 일으켰고, 결국 아테네는 내분이 일어난 스파르타의 도움도 못받은 채 홀로 페르시아의 분노를 감당할 처지에 놓인다.


4.3.1.1. 마라톤 전투와 그리스의 승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라톤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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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의 상상 기록화.

기원전 490년, 이전 마르도니우스의 패배로 속에서 칼을 갈던 다리우스는 제대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손봐주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군사령관은 각각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맡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 함대가 거느린 삼단노선 트리에레스의 수만 무려 6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수는 쓰지 않았지만 후대 플루타르크는 30만 명, 플라톤은 50만 명까지도 추정했다. 물론 현대 학계에서는 과장으로 보고 실제로는 대략 2만 5천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지만 어쨌든 몇 천명만 됐어도 상당한 군사력이었던 고대 세계에서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이 엄청난 대군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페르시아 군사력의 핵심이던 기병은 대략 1,000여 명에서 3,000여 명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이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혼성 군대라고 썼다. 온갖 지방들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왔으니 군장은 물론이요 군복도 통일되지 않았다고.

페르시아 대군은 일단 수도 수사에 모인 다음 동진해 킬리키아 해안가로 향했다. 킬리키아에서 출항한 페르시아 군대는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 섬 등을 거치며 그 곳의 그리스계 주민들을 노예로 삼으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또한 그리스인들의 성지였던 델로스 섬에도 들러 아폴로 신전에 300 달란트의 향유를 태워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스 본토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의 첫 목적지는 아테네와 함께 최대 적국들 중 하나던 에레트리아였다. 에레트리아는 급작스런 대군에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제대로 상륙 저지도 하지 못하다가 공성을 당했고, 결국 몇 달 후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면서 맥없이 함락당했다. 에레트리아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대는 신전과 도시를 약탈한 다음 도시를 깔끔하게 불태웠다. 에레트리아가 떨어지자 이제 페르시아 군대의 남은 목표는 바로 아테네였다.

에레트리아 약탈을 마친 페르시아 함대는 남쪽 아티카 해변으로 내려가 아테네에서 약 25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25] 아테네는 이들을 막기 위해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보내[26]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도 카르네이아 제전과 반란 진압으로 사정이 바빠 도와줄 수 없었다. 결국 아테네는 인근 도시 플라타이아이의 도움만을 받아 페르시아 대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결국 기원전 490년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서 대격돌한다. 그리스군은 막강한 팔랑크스 전술을 이용해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군대의 우익을 돌파하며 승기를 잡았고, 페르시아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해 함대로 돌아갔다. 페르시아군이 함선을 타고 돌아가 아테네 본토를 때릴 것을 우려한 그리스군은 군대 전체가 3시간 만에 30km를 주파해 아테네로 돌아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라톤의 시작은 아마 이 일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와 이집트에서의 반란이 겹치자 군대를 철수했고, 이렇게 1차 그리스 침공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27]


5. 크세르크세스 1세[편집]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전해들은 다리우스 1세는 이번에는 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어 그리스를 치기로 결심, 3년 동안 대함대를 준비시킨다. 하지만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기원전 486년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28] 이 소식을 전해들은 늙은 다리우스 1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그리스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다. 결국 고령의 황제는 건강이 급히 악화되더니 기원전 486년 10월 64세를 일기로 그대로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한다. 사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할 때도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보다 나이가 많던 최장자 아르토바잔이 장자라는 이유로 제위를 주장했기 때문. 하지만 아르토바잔은 다리우스 1세가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태어난 탓에 '고귀한 신분'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29] 결정적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모친이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였던 덕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무리없이 황제로 즉위한다.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키루스 2세의 명성은 워낙 압도적이었던 덕이 컸다.

페르시아 황제가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 반란은 크세르크세스 1세도 피해가지 못했다. 그나마 아버지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군을 육성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을까, 그는 즉위하자마자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84년 1월에 이집트를 진압했으며 반란 도중 살해된 사트라프 페렌다테스 대신 제 형제 아케메네스를 새 이집트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또한 바빌론 지방에서도 무려 두 차례나 반란이 일어나며 이마저도 함께 진압해야 했는데, 크세르크세스 1세는 바빌론을 점령한 후 바빌론의 위상을 크게 격하했다. 원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최강대국 바빌로니아의 수도였다는 명예 덕에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 이후에는 기존에 황제의 공식 직함 중에 있었던 '바빌론의 왕'을 빼버렸고 마르두크를 모시는 축제도 상당 부분 축소했다. 뿐만 아니라 바빌론을 다스리는 사트라프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해 일부러 사트라피를 잘게 쪼개 최대한 행정구역들을 축소해버렸다.


5.1. 2차 그리스 침공[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테르모필레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살라미스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버지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에서의 패배를 잊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그리스에 이를 갈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지난 1차 침공의 패배가 그리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정말 국력을 총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할 준비에 들어간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무려 4년 동안이나 그리스를 침략할 준비를 하는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46개국에서 군대를 끌어모았다고. 게다가 이번에는 황제 본인이 직접 그리스까지 친정하기로 결정, 기원전 480년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는 헬레스폰토스 일대에 배들을 연결해 만든 2개의 거대한 배다리를 만들어 유럽으로 넘어갔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2차 침공에 동원한 페르시아 군대의 수에 대해선 논쟁이 많다. 헤로도토스는 수륙 500만의 대군이라고 썼지만 당연히 과장이고 페르시아 역사가 크테시아스는 80만이라고 썼다. 현대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제 승리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거품이 지나치게 끼는 바람에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가 부풀려졌다고 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만 명을 넘기 힐들고 대략 18만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다. 그래도 이게 2,500년 전의 전쟁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제국 페르시아로서도 정말 바닥부터 갈아넣은 엄청난 규모의 대군이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가장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를 상세하게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 함대가 무려 트리에레스 1,200여 척, 수송선과 보급선 3천 척 등으로 꾸려져있었다고 썼다. 다민족 제국답게 페르시아 함대 역시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를 이루는 민족은 당시 해상 무역을 휘어잡던 페니키아였다. 1,200여 척들 가운데 4분의 1인 300여 척이 페니키아인들의 배였고, 200여 척은 부유한 이집트, 150여 척이 섬나라 키프로스 등지에서 차출되었다.

페르시아가 4년 동안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당연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리스에서도 페르시아 침공을 막을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막기 위해서는 막강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수많은 트리에레스들을 새로 건조했고 강력한 해군 육성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아테네 홀로의 힘으로는 당연히 페르시아를 막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이번에는 칼을 갈고 진심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를 외면했다. 700여 개가 넘는 도시들 가운데 아테네와 함께한 것은 스파르타를 포함한 70여 개의 도시들 밖에 없었다.[30] 나머지 600여 개의 도시들은 모두 중립, 아니면 친페르시아적 성향을 드러내며 전세를 관망하기만 했다. 특히 그리스 중부의 최강자 테베가 동맹에서 이탈한 게 뼈아팠다. 어쨌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렇게 그리스 동맹군을 결성해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리스 동맹군은 기원전 490년 봄에 군사 회의를 열었다. 맨 처음에는 테살리아 지방의 좁은 템페 계곡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막기로 결정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1만의 그리스 동맹군이 이 결정에 따라 템페 계곡에 가서 진을 쳤지만 알렉산드로스 1세가 템페 계곡이 쉽게 우회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기겁한 그리스 동맹군은 템페 계곡을 버리고 빠져나왔다. 템페 계곡을 버린다는 것은 템페 계곡 인근의 테살리아 도시들을 모조리 버린다는 뜻이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두 번째로 결정된 항전지가 바로 테르모필레 계곡이었다. 워낙에 계곡이 좁았던지라 그 많은 페르시아 대군도 물량으로 밀어붙이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중무장한 그리스 중보병이 경무장한 페르시아군보다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한편 페르시아 함대가 테르모필레를 우회할 수도 있으므로 이들은 아르테미시움 해협 일대에서 차단하기로 결정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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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전투[31]
페르시아 군대의 아테네 함락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올림포스 산 근처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을 무렵 스파르타는 올림픽과 카르네이아 제전이 동시에 열리는 시점이었다. 당시 스파르타인들은 올림픽과 카르네이아 제전에만큼은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는 휴전 기간으로 삼았는데, 이때는 전투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그대로 망할 판이라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가 3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32] 테르모필레로 향했고, 나머지 연합군들과 합류해 1만 명의 군대를 구성해 계곡에서도 가장 좁은 곳에 진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다. 그리스 동맹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몇 배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이틀 동안 붙잡아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배신을 때리고 페르시아에게 우회로를 알려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페르시아가 우회로를 따라 진격해오자 모든게 끝났음을 직감한 스파르타군은 테스피아군 700명, 테베군 400명과 함께 남아 결사항전하며 다른 그리스 동맹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 결사항전에서 레오니다스 1세를 포함한 스파르타군 전원이 사망했고[33] 이를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부른다.[34]

한편 페르시아 함대를 막던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함대 역시 페르시아 함대의 맹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동맹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더이상 아르테미시움에서 버틸 이유가 없었던 그리스군은 즉각 철수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으로 보이오티아 지방이 모조리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갔고, 테스피아이와 플라타이아이가 약탈당해 불탔다. 물밀듯이 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는 마침내 기원전 480년 9월에 아테네까지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군은 파르테논 신전을 불태우고 시가지를 약탈했고, 비록 아테네 시민들은 예전부터 피난가 있었다지만 아테네의 함락은 병사들의 사기로 보나 전술상으로 보나 여러모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다만 아테네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속도 별로 편치 못했다. 지나치게 그리스 원정이 시간을 오래 끌자 점차 페르시아 본토의 상황이 우려됐기 때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테르모필레에서 보았듯 진지에서 버티는 그리스군을 상대로는 이기기가 쉽지 않았기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해전을 선택했다. 그는 모든 함대를 끌어모아 펠로폰네소스를 향해 진군했고, 그리스 해군도 이에 맞서 모든 것을 걸고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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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의 상상화. 그리스 군대는 이 해전의 승리로 나중에는 오히려 페르시아를 밀어붙이는 공세를 펼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부러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리스 해군 입장에서는 좁은 살라미스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승산이 컸다.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전함의 대형은 무너지기 시작, 결국에는 서로 부딪히는 지경에 이르렀고 때를 놓치지 않은 그리스 함대가 쐐기모양으로 쳐들어가 페르시아 대열을 반으로 쪼개놓으며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려 들었지만 해군 장교들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결국 그리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가 수몰해버렸다. 한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살라미스 인근의 절벽에서 이 모든 광경을 실시간으로 내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함대가 그대로 자멸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던 셈. 이 페르시아 함대의 대패로 끝난 전투를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부른다. 이 해전을 보고 충격받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군대를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긴 채 페르시아로 귀환해버렸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떠나기 직전 마르도니우스에게 정예 병력 일부를 남긴 뒤 그리스 정복을 완료하라 명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그와 함께 소개시킨 것을 보면 마르도니우스에게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던 모양.

한편 살라미스에서 대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들 사이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다. 특히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도시들은 이미 본진이 위협당할 위협을 꺾어버렸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1세도 돌아갔다하니 이제 별로 조급하지 않았다. 반면 아직도 도시가 페르시아에 점령당한 아테네는 생각이 달랐다.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를 지키는 핵심 전력이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도 아테네였기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이제 북상해 페르시아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굳이 펠로폰네소스 밖까지 기어나가 페르시아 군대와 일전을 또 벌일 생각이 없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북상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한편 마르도니우스가 아테네에게 연합군 이탈을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제안하자[35] 아테네는 일단 거절하긴 했지만 일부러 스파르타에게 협상 자체를 공개하며 수틀리면 언제든지 페르시아에 붙어버릴 수도 있다고 은연 중에 협박에 들어간다. 아테네가 협상을 걷어차자 마르도니우스는 2차로 아테네를 싹 불태워버린 다음 다시 회동을 제의했다. 아테네는 이번에마저도 스파르타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페르시아와 평화를 체결할거라 협박하며 끝끝내 스파르타를 전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스 동맹군이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도니우스는 보이오티아로 후퇴해 플라타이아이 인근의 평원에 진을 쳤다. 널찍한 평원 지형이라면 페르시아의 자랑인 막강한 기병대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군을 평원지대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끝까지 평원에 들어오지 않고 고지대를 고수하며 작전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군대를 조금씩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 그리스 동맹군들 사이의 통신선과 보급선을 가로챘고, 그리스 군대가 후퇴하자 절호의 기회로 여겨 전군을 이끌고 그리스 중보병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도 증명됐듯이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군대가 중무장한 그리스 보병을 이기는 역시 무리였다. 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무려 4만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쓸려나갔다. 심지어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마저 그리스 병사에게 전사했고, 페르시아 패잔병들은 겨우겨우 도망쳤지만 상당수가 도주 과정에서 그리스군에 사로잡혀 죽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두고 기세가 오른 그리스 동맹군은 페르시아 육군에 이어 해군도 격파한다. 당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패 이후 엄청난 손실을 입고 사모스에 수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스 해군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진군해오자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일전을 벌이기라 힘들거라 예상한 페르시아는 함대를 모조리 미칼레 곶으로 몰아넣고 그 곳에 있던 6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군과 합류했다. 페르시아는 미칼레에 진지를 치고 거대한 목책을 둘러 요새화까지 하며 그리스군을 맞을 만반의 태세에 들어간다. 그러나 정작 미칼레에 도착한 동맹군의 규모가 생각 외로 소수인 것을 확인한 페르시아 사령관들은 잘하면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겠다고 판단, 기껏 세워둔 진지에서 나와 그리스군과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당연히 페르시아의 대패.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그리스는 미칼레에 정박되어있던 페르시아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며 페르시아 해군을 끝장냈다. 이 미칼레 전투로 인해 그리스에 남아있던 페르시아 대군이 모조리 소멸했고 이와 함께 페르시아의 대그리스 영향력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오히려 이때 이후부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편집]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고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워낙 그리스에서 받은 충격이 컸던지 크세르크세스 1세는 원정 이후 대규모 건축 작업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수도 수사페르세폴리스에 궁전들을 짓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는데 그 유명한 '만국의 문'도 이때 지어졌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건축가들과 평면도를 펼쳐놓고 세세하게 지시 사항을 나열할 정도로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만국의 문 뿐만 아니라 선대 황제들이 지어놓은 아파나다 홀을 완공시켰고, 그 외에도 수장고를 지어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궁전보다 무려 2배 넘게 황궁을 확장시켰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다른 건 다 때려치고 오직 건축 하나에만 올인한 덕에 페르세폴리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지만 정작 크세르크세스 1세는 좋지 못한 죽음을 맞는다. 재위 말년 황실 호위대장 아르타바누스가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크세르크세스를 죽여버린 것. 이를 알아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르타바누스와 그 아들들을 척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3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65년 제위에 오른 후 5년만에 터진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460년 옛 파라오 프삼티크의 후예를 자칭하는 리비아 출신 왕자 이나로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한창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막나가던 아테네의 지원까지 받아 이집트 사트라프 아케이메네스를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멤피스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아테네 군대는 그리스 홈그라운드에서나 강했지 저 먼 이집트에서는 별 힘을 못썼고 결국 페르시아 군대에 밀려 쫒겨났다. 황제가 파견한 메가비주스가 이집트를 다시 장악했고 이나로스 2세는 사로잡혀 시리아로 압송됐다. 이집트를 평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민심을 수습하고 경제 회복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이전처럼 그리스와의 무리한 전쟁도 피하며 국력을 회복했고, 대신 문화 발전과 교류를 촉진하며 동서방 간의 발전을 꾀한 명군이었다. 그의 41년에 달하는 기나긴 재위기에 헤로도토스가 직접 페르시아로 여행을 오기도 하는 등 실로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라 불릴만한 군주였다.[37]


6.1. 대그리스 전쟁의 종결과 그리스의 분열[편집]


앞서도 말했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그리스와의 충돌을 꺼렸다. 대신 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바로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르시아에게 대승을 거둔 그리스는 기원전 479년부터는 역으로 페르시아를 공격해 키프로스트라키아 지방,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뺏어내는 등 오히려 공세로 전환했다. 기원전 478년에는 키프로스를 공격해 약탈했고 직후에는 비잔티움까지 빼앗으며 흑해 무역권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그리스 군대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다. 스파르타는 더이상의 원정을 하기 싫어했다. 굳이 그리스 본토를 넘어서 저 페르시아까지 진격해야하냐는 것이 골자였다. 스파르타는 이미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모든 게 다 끝났는데 더이상 전쟁을 벌일 이유를 찾지 못했다.[38] 반면 확장주의와 해외무역을 추구했던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도시들까지 모조리 탈환하고자 했고, 결국 이때 스파르타가 원정군에서 빠지며 아테네가 완전한 주도권을 거머쥔다.

스파르타와 그에 동조하는 그리스 도시들이 원정군에서 빠져버리자 아테네는 새롭게 동맹군을 재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애초에 페르시아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잠시 뭉쳤을 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래서 새로 창립된 동맹이 바로 델로스 동맹이다. 델로스 동맹의 표면적인 목적은 '페르시아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인들의 해방'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확장주의적인 목적이 더 컸다. 델로스 동맹군은 키몬의 지휘 하에 기원전 470년대에 걸쳐서 트라키아와 아에기나 지방의 페르시아 도시들을 공격하는 데 주력했다.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있던 델로스 동맹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며 기원전 466년에는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고[39], 결국 에우리메돈 전투 이래로 에게 해의 제해권을 아예 박탈당한 페르시아는 대놓고 그리스와의 전투를 피했다. 에우리메돈에서까지 승리하자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던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핵심 세원이자 식민지인 이집트 해방시키기를 시도한다. 마침 이나로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해 200여 척의 대함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이집트에 도착한 아테네 함대는 나일 강에서 50여 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이집트에 상륙했다. 페르시아 육군은 아테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해 멤피스로 도망쳐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아테네와 이집트 원주민들은 멤피스 안에 틀어박힌 페르시아 군대를 무려 4년 동안 공성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그러던 중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2만 5천의 진압군을 모아 이를 메가비주스에게 맡겨 페르시아로 파견했고, 메가비주스는 기원전 455년 아테네 포위군을 쫒아내고 멤피스를 구원했다. 아테네군은 나일 삼각주 프로소프티스 섬으로 패주해 진을 쳤지만, 뒤를 쫒아온 메가비주스의 공성전에 당해 18개월 만에 대부분이 사로잡히거나 겨우 도망치는 치욕을 겪는다. 한편 프로소프티스에 아테네 군대가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아테네 본국에서는 50여 척의 트리에레스를 파견해 이들을 구원토록 했지만 이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프로소프티스가 함락되고야 만다. 프로소프티스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미리 듣지 못한 아테네 구원군은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멘데시움 전투에서 페니키아 해군에게 처참하게 깨진다. 이로 인해 아테네 핵심 전력 상당수가 깎여나갔으며 무려 5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이집트 원정에서 정말 국가가 흔들릴만한 피해를 입은 아테네는 더이상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할만한 상태가 못됐다. 게다가 페르시아 전쟁 이래 갈수록 스파르타와의 갈등도 심해지며 이들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라는 두 막강한 세력을 동시에 상대할 형편은 더더욱 못되었던 것. 뿐만 아니라 키프로스 섬을 공략하던 중 아테네의 지도자 키몬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아테네는 더이상의 패권 전쟁을 멈추고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한다. 페니키아 함대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대가 키프로스를 뜨려는 아테네 군대를 공격했지만 실패, 아테네 함대의 귀환을 막지는 못했다. 키프로스에서 출발한 아테네 함대는 이집트에서 허겁지겁 도망쳐온 패잔병들과 합류해 아테네로 돌아갔다. 이렇게 아테네가 이집트 원정 실패로 치명타를 입고 페르시아도 그리스와의 추가적 충돌을 꺼리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기원전 449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페르시아 전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는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에게 해를 아우르는 깡패 패권국으로 성장했고, 반면 페르시아는 꽤나 큰 금이 가면서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40]


7.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편집]



7.1. 번영과 마지막 중흥기[편집]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중흥을 이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24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장자 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했지만 45일 만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 소그디아누스가 크세르크세스 2세가 취해있는 틈을 타 죽여버렸다. 하지만 이복형을 죽이고 제위를 차지한 소그디아누스도 6개월 15일 만에 또다른 이복형제 다리우스 2세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폐위된다.[41] 다리우스 2세는 최대 적국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썼다. 아테네가 시라쿠사에서 패배하며 흔들리는 듯 보이자 대군을 보내 아테네를 침공했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어 이간계를 사용했다. 기원전 407년 경에는 제 아들 키루스를 직접 소아시아로 파견해 아테네와의 전쟁에 힘을 보탰고 스파르타에 보내는 지원도 늘렸다. 페르시아가 보내준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스파르타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결국 아테네를 꺾어버렸고,[42]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을 하는 덕에 페르시아는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아테네를 몰락시키고 패권을 잡은 스파르타는 아테네만큼 에게 해의 패권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이후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타날 때까지 서서히 쇠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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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궁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후의 혼란을 잠재운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04년 바빌론에서 승하했다. 그가 승하하기 직전 황후 파리사티스가 키루스 왕자를 다음 황제로 세우자고 간청했지만 다리우스 2세는 끝끝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다음 황제로 지명한다. 소아시아의 장군 티사페르네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더러 키루스 왕자가 저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키루스를 저 먼 리디아의 사트라프로 보내버렸다. 당연히 이에 앙심을 품은 키루스는 거대한 반란군을 일으켜 황제를 공격했지만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대패하고 키루스 본인도 전사하며 무위로 돌아갔다.[43]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무려 45년이라는 아케메네스 황제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긴 재위 기간 동안 나름 제국을 평화롭게 통치했다. 그는 수도를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천도해 크게 확장한 다음 엑바타나의 궁전을 새로 신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조로아스터교 사원들을 짓는 등 소아시아 지방에 조로아스터 신앙 전파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4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도 제 선대 황제들처럼 이간계로 그리스를 갈라놓는 데에 열심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가 압도적인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극하자 이번에는 반대로 아테네테베 등을 밀어주기 시작한 것.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1만 다릭에 달하는 거금을 아테네와 테베 정계에 뿌려대면서 스파르타의 경쟁국들을 팍팍 밀어줬고 덕분에 스파르타는 소아시아로의 확장을 멈추고 내부 단속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옛 적국이던 아테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해안가를 약탈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걸 코린토스 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옛 페르시아 전쟁의 악몽이 뿌리깊게 남아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자칫하다 오히려 아테네가 지나치게 성장할 것을 우려, 결국 아테네와 테베를 다시 배신하고 스파르타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렸다. 이 협정으로 이오니아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다시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가는 대신 그리스 본토는 확고히 스파르타의 영향권이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아테네의 뒷통수를 후려버리면서 그리스를 다루는 데는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이집트에서는 처참한 쓴맛을 봐야만 했다. 원래 이집트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가장 반페르시아 감정이 강한 동네들 중 하나였다. 이집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재위 초반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나갔고, 4년 간의 준비 끝에 20만 대군을 모아 기원전 373년 이집트를 진압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도움을 받은 이집트의 넥타네보 1세가 철저하게 페르시아 군대를 맞았다. 주둔지 인근에 거대한 해자를 파놓고 나일 강에 제방을 쌓아 페르시아 해군의 진입도 막았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페르시아 군대가 지나치게 느리게 진군하며 이집트에 시간을 벌어준 탓에 아예 졌다. 원정이 실패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다타메스를 시켜 재원정을 실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타메스를 포함한 수많은 서부 지방의 사트라프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집트 재정복의 꿈을 잠시 접어둬야 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방들 중 하나인 이집트의 독립은 페르시아 귀족층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분란을 일으켰다. 결국 기원전 372년부터 서부 지방의 사트라프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사트라프 다타메스를 시켜 이집트를 재정복하라 시켰으나, 다타메스의 정적들이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잡고 이집트 원정에 부담을 느낀 다타메스가 결국 반란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그는 기껏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이집트를 평정하라고 내린 엄청난 수의 대군들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카파도키아로 들어갔다. 신난 이집트의 넥타네보 1세는 다타메스와 반란군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퍼부었다. 다타메스의 뒤를 이어 피르기아의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와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 오론테스가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다타메스가 제 아들에게 배신당한 후 살해되고 기원전 360년 수뇌부가 포로로 잡히면서 결국 사트라프들의 반란은 7년 만에 진압된다. 한편 이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끝없는 갈등을 중재하며 노골적으로 테베의 편을 들어줬다. 불만을 품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은 사트라프의 반란을 뒤에서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결과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반란군의 패배였다.


8. 쇠락과 각지의 반란[편집]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원전 358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다. 원래라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황제가 될 자격이 아니었지만 장자 다리우스 왕자는 지나치게 오래 사는 아버지를 쫒아내고 하루빨리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다 잡혀죽었고, 차남 아리아스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끊임없는 술수에 말려서 죽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아르사메스 왕자를 새 황태자로 세웠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 아르사메스 왕자마저도 죽여버리고 새 황제에 등극한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은 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서부 지방을 관할하는 사트라프들의 힘을 빼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아버지 시절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이 대란을 일으킨 것을 보고 더이상 사트라프들에게 서부 지방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사트라프들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특히 피리기아 지방의 아르타바조스 2세는 대놓고 황명을 씹었다. 아르타바조스 2세는 아테네에 구원 요청을 보냈고, 그는 아테네와 타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354년 페르시아의 진압군마저 꺾었다. 하지만 기원전 353년에 끝내 진압군에 격퇴당했고 필리포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도망쳐 몸을 의탁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일시적으로나마 평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제 선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절 독립해 떨어져나간 이집트로 눈길을 돌렸다. 이집트는 이미 넥타네보 1세 시절에 독립을 되찾아 이 당시에는 넥타네보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워낙에 이집트의 부와 재화가 압도적이다보니 페르시아로서는 도저히 포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51년 대군을 일으켜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넥타네보 2세의 전술에 말려 패배했다. 넥타네보 2세가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두자 안그래도 뒤숭숭하던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페니키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등에서 동시에 반란이 일어나 독립을 선포했고 이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카리아의 왕자 이드리에우스에게 키프로스 정복을 맡겼고 시리아의 사트라프 벨레시스에게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시돈을, 킬리키아의 사트라프 마자에우스에게 페니키아 안정을 맡겼다. 그러나 페니키아를 진압하라고 보낸 벨레시스와 마자에우스가 둘다 이집트에게서 4만의 지원을 받은 시돈의 왕 테네스에게 격파당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끌고 페니키아로 원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려 33만의 대군을 이끌고 시돈을 몰아쳤다. 엄청난 대군에 경악한 시돈의 왕 테네스는 스스로 항복했고 시돈의 고위 시민 500여 명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시돈은 불타 무너져내렸고 테네스 역시 얼마 있다가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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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루시움 전투의 상상화. 이 전투로 이집트가 무너지고 다시 페르시아에 편입되었다.

시돈의 반란을 꺾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로 2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넥타네보 2세는 2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들을 포함한 10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페르시아에 맞섰지만 3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린 페르시아군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잘하면 지류들이 빼곡한 이집트의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끌 수도 있었겠지만 넥타네보 2세에겐 그럴 듯한 계책도 그걸 실행할 유능한 장군도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넥타네보 2세의 군대 내에서 이집트인들고 그리스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재점령했다. 넥타네보 2세는 에티오피아로 도망쳐 행방불명됐고 페르시아는 다시 이집트를 식민지로 되찾는 데 성공한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정말 잔혹할 정도로 이집트를 수탈했다. 옛 다리우스 1세가 관용을 베풀었던 것과는 천지차이로 모든 신전들을 약탈했고 이집트 종교도 탄압, 세율도 극악할 수준으로 올렸다. 이렇게 쎄게 기를 꺾어놔버린 덕에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는 페르시아에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 정책과 특유의 초토화 작전으로 반란의 싹 자체를 잘랐고, 덕분에 페르시아 제국은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지중해 최강 대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의 신임을 받던 환관 바고아스는 이집트 원정의 성공과 뛰어난 능력 덕에 제국의 행정을 책임졌다. 페르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이오니아와 리키아 지방의 옛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모조리 재점령했고 아테네의 해상 식민지들도 모두 다시 뺏어왔다. 페르시아가 이렇게 옛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들은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힘이 빠진지 오래라 전혀 페르시아에 대항할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아테네에서 페르시아를 공동으로 막자는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무시당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재위 말년 동안 페르시아는 그럭저럭 평화기를 구가했고 더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가장 경계하던 세력은 필리포스 2세 하에서 빠르게 성장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다. 마케도니아가 급속도로 커지자 페르시아는 트라키아 지방에 지원을 퍼부어 마케도니아에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격분한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와 함께 페르시아를 치고자 했으나 마케도니아를 야만족으로만 보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호응해줄 생각이 없었다.[45]


9. 마케도니아의 침입과 멸망[편집]


강력한 패권을 휘두르며 철권 통치를 하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38년 9월 환관 바고아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바고아스는 이미 제국의 행정을 장악한 실권자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치의와 결탁해 황제를 독살해버린 것. 바고아스는 아르세스 왕자와 다리우스 왕자를 빼놓고 나머지 황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바고아스는 아르세스 왕자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라는 왕명으로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약화된 페르시아 제국을 다시 하나로 묶어놓던 구심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죽자마자 페르시아는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바고아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정하려 시도했지만 이를 알아차린 바고아스가 미리 선수를 치고 그를 죽여버렸다. 그와중에 그리스에서는 필리포스 2세가 힘을 길러 그리스를 통일한 후 페르시아에게 옛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의 적대 행위를 사과하라고 요구하며 점차 목소리를 키워오고 있었다.

바고아스는 방계 왕족 출신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손 다리우스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새로 황제가 된 다리우스 왕자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카두시 부족을 정벌하며 실적을 쌓아올린 왕자로, 페르시아 귀족들 사이에서 명성도 놓았다.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페르시아를 털려버린 군주로만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알고보면 나름 능력있는 인물이었던 것. 위협을 느낀 바고아스는 다리우스 3세도 쫒아내려 들었지만 이번에는 다리우스 3세가 먼저 바고아스를 죽이고 권력을 되찾았다.[46] 그러나 다리우스 3세의 좋은 날은 딱 거기까지였다. 기원전 334년 다리우스 3세가 겨우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와 바빌론을 다시 복속시키자마자 다른 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바로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군대의 침략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스스로를 코린토스 동맹의 맹주로 선포하고 그리스 동맹군을 이끌어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이에 호응해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페르시아의 명장 멤논[47]의 활약으로 필리포스 2세는 트로이 등 일부 식민도시들은 점령했으나 최종 목표 소아시아 점령에는 실패했고, 필리포스 2세가 불명의 이유로 살해당한 후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3세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불세출의 천재들 중 하나였다. 그는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한 직후 흔들리는 코린토스 동맹을 재수습했고, 다시 군대를 모아 염원이던 페르시아 공략에 나선다. 처음에는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3세를 우습게 봤기 때문에 직접 상대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전처럼 사트라프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가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상황이 달라진다. 진심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리우스 3세는 출신 때문에 꺼리던 멤논을 재임명해 알렉산드로스를 막도록 시켰다. 멤논은 청야전술과 함께 그리스 본토에서 스파르타아테네의 반란을 선동해 양면으로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치려 시도했고, 잘하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불명의 이유로 갑자기 사망해버렸다. 페르시아 최후의 맹장 멤논이 죽어버리자 이제 알렉산드로스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군은 빛의 속도로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 일대를 격파하며 쾌속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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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에서 발견된 이수스 전투모자이크화. 다리우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보인다.

알렉산드로스가 물밀듯이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향해 쳐들어오자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맞서기로 결정한다. 그는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직접 격돌했고, 결과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듯이 다리우스 3세의 대패. 다리우스 3세는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강을 끼고 마케도니아군을 쳐부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술을 펼쳤지만 괴물 알렉산드로스를 상대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헤타이로이를 거느리고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쳤고 놀란 다리우스 3세가 심지어 제 가족들까지 버리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면서 페르시아는 대패를 맛봤다. 심지어 이 전투로 페르시아 최대의 정예병이자 황제 직속군인 이모탈들이 모조리 전멸해버리면서 제국의 전력은 이전보다 절반도 안되는 수준으로 깎여버렸다.[48]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알렉산드로스는 그대로 남하해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곳에서 아문 신관들의 축복을 받으며 이집트를 해방시켰다. 그 직전에 겨우겨우 반란을 진압했던 페르시아로서 이집트의 재독립은 뼈아픈 타격이었다. 참고로 이때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이 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제 이름을 붙이니 이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리우스 3세에게도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아나톨리아 지역과 이집트를 상실했다해도 제국의 유프라테스 강 동쪽 지역과 제국 제1의 도시이자 행정수도 바빌론, 2의 도시이자 겨울수도 수사, 3의 도시이자 여름수도 엑바타나, 4의 도시이자 왕도페르세폴리스가 모두 건재했으며 군자금 역시 페르세폴리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물들로 충분했다. 다만 이수스 전투에서 상실한 정예병들의 부재가 컸는데, 이는 당시 페르시아가 가진 군제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페르시아는 너무 큰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각지에 지방관인 사트라프를 파견하되 반란을 방지하고자 그들에게 경비병력 정도만 맡기고 본격적인 군권은 주지 않았으며 감찰관들을 파견해 감시했다. 외적의 침입 때는 국경 지방에서 용병을 고용해 시간을 끈 다음 중앙에서 정예병력을 동원해 상대하는 방식이었는데 친위대 이모탈을 비롯한 정예병력이 이수스 전투에서 소멸해버린 것. 이로 인해 전체 병력 중 절반 이상은 징집한 농민들에게 창과 방패 쥐여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수스 전투 이후의 페르시아군은 머릿수만 많았지 어설프게 모아놓은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군은 정말 전투만에 특화된 전쟁기계였으니 페르시아군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의 패전 이후 있는 병사 없는 병사 다 끌어모아 다시 10만의 대군을 모으는 데 성공해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맞붙었다. 전세는 나쁘지 않았다. 다리우스 3세의 군대는 사트라프들이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보내준 나름 숙련병들이었고, 워낙 대군이었던 덕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가 정말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직 전투의 승자가 결정되기도 전에 도망치면서 모든게 망해버렸다. 황제가 제일 먼저 전장에서 이탈하자 동요한 페르시아군도 뿔뿔히 흩어졌고 결국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를 막을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렸다. 이때 이후로 다리우스 3세는 제 신하들과 사트라프들에게도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겁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다리우스 3세는 엑바타나를 거쳐 박트리아로 후퇴해 몸을 추스르고 다시 군대를 모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더이상 무능한 다리우스 3세를 신뢰치 않았던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수스가 황제를 감금하고 군지휘권을 넘길 걸 강요했다. 다리우스 3세는 끝까지 거부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리 직후 수도 수사페르세폴리스를 정복했다. 그는 키루스 2세의 무덤을 약탈한 후 불태웠고, 그 유명하던 페르세폴리스의 황궁도 함께 탈탈 털어버린 후 불태웠다. 페르세폴리스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가 끈질기게 페르시아군을 추격해오자 수레에 타고 있던 다리우스 3세는 결국 베수스의 부하들에게 칼에 찔린 채로 수레와 함께 버려졌다.[49] 다리우스를 죽인 베수스는 스스로 칭제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즉위했지만[50] 이미 망했다는게 너무 뻔해진 상황에 반역자이기도 한 그를 따르는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베수스가 살아있으면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뭉칠 것을 혹여나 두려워한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추격해 사로잡았고, 엑바타나의 궁정에서 재판을 치른 후 죽이면서 그마저도 사망한다. 이렇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기원전 330년에 완벽하게 멸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절하자 페르시아가 있던 자리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선다.
[1]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제 외손자가 메디아를 멸망시킨다는 불길한 예지몽을 꾼 아스티아게스가 어린 키루스를 죽이려들었다고 한다. 허나 하르파고스가 아이를 바꿔치기해 간신히 살려냈고, 그때 이래로 키루스를 소치기에게 맡겨 키우도록 했다고. 이후 키루스는 장성한 청년으로 자라났고 복수를 하기 위해 아스티아게스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그리스 신화이아손 설화와도 유사하며 고고학계에서는 키루스의 탄생에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한 창작 설화 정도로 본다.[2] 이후 메디아인들은 제국 내에서 파르스인과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며 페르시아인과 동화된다. 두 민족은 모두 아리아계였고, 따라서 그들이 사는 자그로스 산맥부터의 고원 지대는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이란'으로 불리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3] 당시 리디아는 명군 크로이소스의 통치하에서 번영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했고, 세계 최초의 금화인 리디아 금화를 주조하기도 했다.[4]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페르시아를 공격할까 말까 갈등하던 크로이소스는 그 용하다는 델포이 신탁에게 답을 구했다. 델포이에서는 거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답을 보냈고, 이 답을 듣고 기뻐한 크로이소스는 군대를 몰고 페르시아로 진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크로이소스의 패배. 델포이에서 말한 '거대한 제국'은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국을 말했던 것이었다.[5] 크로이소스의 행방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크로이소스를 살려주고 왕의 조언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보니두스 연대기에는 그가 사로잡힌 즉시 목이 잘렸다고 한다.다만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나오는 처형된 왕이 크로이소스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6]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키루스 2세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옛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복구했다. 해당 내용은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7]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이사야서 45장 1절.(공동번역성서)[8] 이 호칭이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 'Lucifer(루키페르)', 즉 루시퍼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이 호칭은 키루스 이후 페르시아의 왕들이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부정적 의미가 강해졌고, 이후 중세 시대 라틴어 성경으로 신학을 하던 수도자들이 바빌론의 몰락을 샛별이 지는 것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루시퍼에 지금의 타천사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메시아의 이명 중 하나가 타천사의 이름으로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9] 이때 이미 이집트는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끝물인 말기 왕조 시대였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복 이전에도 신아시리아에게 정복되거나 신바빌로니아와의 전쟁에서 완패하는 등 거의 동네북 신세로 쇠퇴해 있었다.[10]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고양이 등 이집트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들을 앞에 내세워 이집트인들이 함부로 공격하게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11] 후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있다.[12] 페니키아는 카르타고의 모체였고, 원정시 반란을 일으키겠다고까지 선언했다.[13] 크테시아스는 그가 목수일을 하다가 나무 조각이 허벅지를 뚫고들어가 생긴 상처로 감염되어 죽었다고 썼다. 반면 헤로도토스는 말을 타던 중 실수로 칼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어 상처가 감염되어 죽었다고 썼다. 일부 학자들은 다리우스 1세가 몰래 황제를 암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14] 다리우스는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스와 결혼했다.[15] 다리우스는 가짜 바르디야의 진짜 정체가 신관 출신 가우마타라고 주장했다.[16] 실제 이유는 아리얀데스가 독자적으로 동전과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과 얼굴이 들어간 화폐를 찍어낸다는 것은 곧 왕권과 직결된 일이었고, 총독에 불과한 아리얀데스가 이 짓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반역죄가 성립될 만한 일이었다.[17] 인더스 강 일대의 다음가는, 제국 전체 세수의 9%를 차지했던 바빌로니아 지방보다도 3배나 많은 압도적인 수치였다. 특히 이 지방에서 걷어들인 막대한 세금으로 그리스 원정에 쓸 전비를 댈 수 있었다.[18] 그 다음으로 부유했던 메소포타미아바빌론 지방에서 걷어들인 세수는 전체의 9%에 불과했다.[19] 현재는 모조리 파괴되었고 유약 벽돌들 정도만이 남아있다. 그마저도 대부분 약탈당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게 현실.[20] 반대로 이집트의 건축은 쇠퇴했으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21] 그는 페르시아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이 악신 앙그라 마이뉴의 짓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22] 당시 오리엔트 지역과 함께 문명의 한 축을 구성한 중국과 인도 지역은 각각 춘추전국시대, 16대국 시대라 하여 소국들로 분열된 혼란기였다.[23] 그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알렉산드로스 3세'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8대 조부다.[24] 우물 속에서 물과 흙을 가져가라는 조소와 함께 사절을 죽여버린 것.[25] 옛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의 아이디어였다.[26] 보통 사람들이 이 전령꾼이 마라톤 전투 이후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러 간 게 아니라 스파르타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고, 탈진해서 죽지도 않았다.[27] 다만 페르시아가 이 전쟁에서 아예 패배하고 손실만 본 건 아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는 아니어도 핵심 적국이던 에레트리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고 영토도 늘렸다. 전쟁 승리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정이 더 오래 살아남는 기틀이 마련된 것은 확실하지만 아예 생각하는 것처럼 페르시아가 전쟁의 패배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28] 주된 이유는 무거운 세금과 수사, 페르세폴리스의 황궁을 짓느라 막대한 인력을 페르시아로 끌어갔기 때문이었다.[29] 당시 스파르타를 포함한 일부 문명권에서는 제위에 오르기 전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제위에 오른 후 태어난 자식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0] 이미 스파르타도 페르시아의 적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도시들에게 다시 '물과 흙'을 내놓으라 사절을 보냈는데 고의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겐 사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교적 협상을 할 생각도 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31] 보면 알겠지만 옆이 산과 바다로 꽉 막혀있어서 저 좁은 지형을 돌파하지 못하면 테르모필레를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다. 스파르타 군대가 이 곳을 격전지로 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32] 이건 진짜 말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는 결사대였다. 다시는 살아돌아오지 못할 거라 직감했기 때문에 일부러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남자는 모두 제외했다.[33] 다 죽은건 아니고 3명이 살아남았다. 하나는 전령이었고 하나는 다시 테르모필레로 돌아가 싸우다 죽었고 마지막 하나는 치욕스럽게 살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죽을 생각으로 뛰쳐나가 싸우다 전사했다.[34] 워낙 유명해서 영화 300(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35]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가 중재를 맡았다.[36] 원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적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르타바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황제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37] 심지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최대 숙적이나 다름없던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망명을 받아줬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은혜를 입어 마그네시아 지방의 총독으로 재임하기까지 했다.[38] 스파르타가 전쟁에 미친 호전광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는 제 본거지인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제외하면 외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사회가 경직된 면이 있어서 외부에 개입하지 않고 은둔하는 경향이 더 쎘다.[39] 200여 척의 페니키아 선박들이 불탔고 이로 인해 지중해의 페르시아 해군 대부분이 전멸했다.[40]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된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다.[41] 소그디아누스는 재에 파묻혀 질식해 죽었다. 재에 묻어서 죽이는 건 고대 페르시아의 전통적 사형 방식이었다.[42] 아테네의 노골적인 패권질에 염증을 느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해 기원전 431년부터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전쟁을 벌이니 이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43] 이때 키루스 왕자는 적국 그리스에서 1만 명의 팔랑크스를 모집할 정도였다. 이들 그리스인 팔랑크스가 패전 후 귀국하는 이야기가 크세노폰아나바시스로 남아있다. [44] 물론 경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당시 사원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따로 황제에게 바쳐야했는데 이때문에 황제 입장에서는 사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입이 늘어나서 좋았다.[45] 물론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뿐 아니라 페르시아도 야만인으로 봤기에 둘이 쌤쌤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필리포스 2세가 당시 마케도니아의 국력을 신장시키며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걸 감안하면 그리스 입장에서는 마케도니아도 위험한 적이다.[46] 다리우스 3세는 바고아스를 초대해 강제로 독이 가득 든 술잔을 바고아스의 입 속에 쏟아넣었다.[47] 로도스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 동안 페르시아를 섬겼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명장이라고 불린다.[48] 이수스 전투에서 패전한 다리우스는 직후 알렉산드로스에게 평화 사절을 보내 막대한 배상금을 제시하며 화해를 요청하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전역을 지배할 생각이었으므로 협상을 거절한다.[49] 버려진 수레를 찾은 마케도니아군은 그 속에 있던 다리우스의 시체를 확인한 후 시신을 페르시아로 보내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50] 베수스는 황족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다리우스의 딸들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다리우스 3세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라서 후계자가 없었고 그녀들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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