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사르 엘케비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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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사르 엘케비르 전투
영어: battle of Ksar El Kebir

파일:모로코 전투.jpg
시기
1578년 8월 4일
장소
모로코 크사르 엘케비르 인근 와디 알 마카진 평원
원인
사드 왕조의 내전에 개입하여 모로코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세바스티앙 1세의 야망
교전국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1521-1578).svg.png 포르투갈 왕국
무슬림 동맹군
유럽 용병대
사드 왕조
지휘관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1521-1578).svg.png 세바스티앙 1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
토마스 스투클리
마르팅 데 보르고냐
알론소 데 아길라르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
아흐마드 알 만수르
병력
23,000명
60,000명
피해
8,000명 전사
15,000명 포로
3,000명 전사
1,000명 실종
6,000명 부상
결과
사드 왕조의 승리
영향
포르투갈 왕국의 몰락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이후



1. 개요[편집]




1578년 8월 4일 크사르 엘케비르 인근의 와디 알 마카진 평원에서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사드 왕조의 전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연합군이 사드 왕조의 현 술탄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와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와 맞붙은 전투. '세 왕의 전투'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전투는 포르투갈 왕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2. 배경[편집]


1415년 주앙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세우타를 공략한 이래, 포르투갈 왕국은 모로코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여러 거점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1471년 전략적 항구 도시인 탕헤르를 공략하고 1505년 아가디르를 점령한 뒤 산타크루즈 요새를 건설했으며, 1507년 사피, 1513년 아젬푸르, 1515년 마자곤을 공략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모로코 일대의 정세에 깊숙히 개입해 각지의 에미르들끼리 내전을 벌이도록 조장하고 모로코 해안에서 무슬림과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다.

그러던 1536년, 모로코를 양분하던 와타스 왕조사드 왕조간의 전쟁이 사드 왕조의 승리로 끝나고 모로코 전역이 사드 왕조의 치하에 들어갔다. 사드 왕조 술탄들은 포르투갈의 횡포에 이를 갈고 있는 민심을 고려해 지하드를 선포하고 포르투갈이 거점으로 삼은 해안 도시들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며 수많은 식민지를 확보했지만, 150만 밖에 안 되는 인구를 보유한 나라가 전 세계에 퍼진 광범위한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수많은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재원이 들어왔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관리 비용이 소모되었으며, 현지인들의 반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전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본국 주민들이 식민지 각지에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 유출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포르투갈 왕국은 사드 왕조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1541년 아기다르와 산타크루즈 요새를 상실했다. 이에 주앙 3세는 사피, 아자모르, 아구즈, 크사르 엘케비르 등 모로코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탕헤르, 카사블랑카, 세우타 만큼은 막대한 재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557년 주앙 3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한 뒤 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세바스티앙 1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은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와 에보라 추기경 엔히크이 섭정을 맡았다. 그들은 세바스티앙이 성년이 될 때까지 왕국을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확장 정책을 중지하고 함대를 건조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국경 방비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무슬림들은 브라질과 인도로 항해하는 포르투갈 선박들을 잇따라 습격했고, 1562년 마자강을 공격했지만 포르투갈군에 격퇴되었다.

이윽고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세바스티앙 1세는 어렸을 때부터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췄으며, 주앙 3세가 포기한 모로코의 여러 거점 도시들을 탈환하고 사드 왕조를 무너뜨려 모로코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국정을 정력적으로 돌보는 한편 1574년 소규모 습격대를 파견해 탕헤르 인근의 무슬림 마을들을 습격하게 하는 등 모로코에 대한 군사 작전을 꾸준히 벌였다.

그러던 1576년,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사드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를 몰아내고 술탄 직위를 찬탈했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는 여러 전투에서 참패한 뒤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망명한 후 세바스티앙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준다면 모로코의 모든 해안에 존재하는 도시와 마을을 넘겨주고 아르질라, 라라슈, 크사르 엘케비르 등 내륙의 6개 도시를 추가로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모로코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했다. 세바스티앙 1세는 자신이 갈망하던 때가 왔다고 여기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모로코로 진군하기로 마음먹었다.

세바스티앙 1세는 1576년 성탄절에 과달루페에서 자신의 숙부이자 스페인 왕국의 국왕 펠리페 2세와 대면해 "당신과 함께 이교도를 물리치고 아프리카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은 거절했지만, 일부 스페인군을 지원해주겠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알론소 데 아길라르가 이끄는 2,000명의 카스티야 용병이 원정군에 가담했다. 여기에 마르팅 데 보르고냐가 지휘하는 독일과 플랑드르 출신의 3,000명의 용병과 토마스 스투클리가 지휘하는 600명의 이탈리아 기사들이 가세했다. 포르투갈인 보병은 12,000명이었고, 기병은 6,000명이었다. 총 병력은 23,000명에 달했고, 여기에 대포 40문이 추가되었다.

1578년 6월 24일, 세바스티앙 1세는 500척의 수송선에 병력을 싣고 리스본을 출발해 탕헤르에 상륙했다. 이후 보급품이 올 때까지 12일간 기다린 그는 전군에 출진 명령을 내렸다. 몇몇 귀족들은 함선에 군대를 싣고 해안을 따라 남하하자고 제안했지만, 세바스티앙 1세는 적과 가능한 한 빨리 만나서 승부를 내고 싶었기에 거절하고 전 함대에 라라슈로 항해하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육로를 따라 라라슈로 향했다. 원정군은 7월 29일 아르질라에 도착했지만 원주민들의 비협조와 무슬림 습격대의 급습, 그리고 뜨거운 태양열에 시달려서 많은 병사가 낙오되었다. 일단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함대와 조우하려 했지만, 함대가 이미 라라슈로 가버렸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로코스 강으로 가서 군대를 휴식시키기로 했다.

한편, 당시 중병에 시달리고 있던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는 포르투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국에 소집 명령을 내린 뒤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와 함께 적을 막으러 출진했다. 그는 도중에 적군이 로코스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코스 강의 지류인 와디 알 마카진 근처인 크사르 엘케비르로 이동했다. 이후 와디 알 마카진 평원의 시원한 고원에 4만 병력을 집결시킨 뒤 느리게 행군하는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8월 4일에 포르투갈군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모로코의 패권이 걸린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편집]


포르투갈군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말리크 1세는 적군을 포위하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전열을 넓게 펼치라고 명령했다. 측면에는 각각 10,000명의 낙타 기병이 배치되었고, 중앙에는 과거 이교도 추방령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는 이베리아 출신 무어인 20,000 보병이 배치되었다. 말리크 1세는 중병으로 인해 말을 타는 것도 버거웠지만, 가마에 탑승하라는 측근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온 몸을 말 몸통에 밧줄로 묶어가며 올라탄 뒤 군대를 통솔했다.

무슬림군이 넓게 포진한 채 다가오는 것을 본 세바스티앙 1세는 전군에 전투 대형을 갖추라고 명령했다. 전방에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본따 사각 방진을 친 장창병과 화승총병 부대가 배치되었고, 측면에 외국 용병대가 포진했다. 40문의 포대는 보병 앞에 배치되었다. 기병은 2개 부대로 나뉘어 양 끝에 포진했는데, 세바스티앙 1세 본인이 왼쪽 기병을 몸소 지휘했다. 또한 포르투갈군에 의탁한 사드 왕조 전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는 보병 500명과 기병 600명을 이끌고 포르투갈군을 지원했다. 여기에 수레들은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형 한 가운데에 배치되었다.

전투는 양측이 머스킷 총과 포탄을 여러 번 교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지원군 사령관 토마스 스투클리는 이 전초전 때 적의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 후 모로코 기병대가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포르투갈군을 신속하게 에워싼 뒤 공세를 퍼부었지만, 전방에 포진한 포르투갈 장창병과 화승총병 부대가 이를 거뜬히 막아낸 뒤 반격을 개시해 적 선두 부대를 패주시켰다. 세바스티앙 1세는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공세를 개시해 적진의 중앙 대열을 파고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본대와 위험할 정도로 멀리 떨어졌다.

한편, 말리크 1세는 아군이 패주하는 것을 보자 말을 몰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부하들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의 노력으로 전열을 회복한 무슬림군은 지나치게 깊숙이 침투한 적군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세바스티앙 1세는 뒤늦게 자신이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 본대와 합류하려고 방향을 틀었지만, 포위망을 좀처럼 뚫지 못했다. 국왕과 선두 부대가 에워싸인 것을 목격한 본대의 나머지 부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무슬림군에게 하나둘씩 제압되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왕에게 어서 피하거나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자 세바스티앙 1세는 단호히 답했다.

"전우여, 진정한 자유는 삶을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노라!"


그리고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아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는 포르투갈군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도주를 시도했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말리크 1세는 전투가 끝난 직후 사망했는데,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모로코 역사가들은 술탄이 오스만 제국의 음모로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는 없다.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형 사후에 군대 지휘권을 맡아서 전장을 정리한 후 페스로 귀환했다.


4. 이후[편집]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는 포르투갈 왕국의 재앙이었다. 8천에 달하는 병력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15,000명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100명 미만의 포르투갈인만이 리스본으로 돌아와서 패전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당국은 민심이 요동칠 것을 우려하여 정보 통제를 실시했지만, 8월이 가기 전에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전 국민이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세바스티앙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1] 평생 수도자로 살았던 삼촌 엔히크 1세환속 후 포르투갈 국왕에 올랐지만 2년 만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주앙 3세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의 남편인 점을 근거로 삼아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베리아 연합이 결성되었다.

한편, 말리크 1세의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형의 뒤를 이어 술탄에 오른 뒤 두 조카를 살해하는 등 경쟁자들을 모조리 배제했다. 이후 포르투갈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받아냈고, 이를 통해 순도 높은 금화를 발행하여 앗 다하비 (황금왕)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그는 선정을 베풀면서 사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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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로코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유럽의 여러 가톨릭 왕실과 혼담은 몇 번 오갔지만, 전쟁 준비 등으로 세바스티앙의 확답이 늦어서 성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