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우데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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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프랑크인의 왕
Theudebald | 테우데발트
제호
한국어
테우데발트
프랑스어
Theudebald
생몰 년도
535년 ~ 555년
재위 기간
랭스 프랑크인의 왕
547/548년 ~ 555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랭스 프랑크 왕국의 왕.


2. 행적[편집]


535년 랭스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베르 1세와 데우테이아 왕비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머니 데우테이아는 540년경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비지게르다와 결혼한 테우데베르 1세에 의해 쫓겨났다. 547년 말 또는 548년 초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12~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 직후 동고트 왕국토틸라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절단이 랭스에 찾아와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미리네의 아가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고트족 사절들은 로마인들에게 압제당하는 자신들을 경멸하지 말고 최후의 멸망의 위협에 직면한 이웃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로마인들이 너무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가장 큰 이점이 될 거라면서, 로마인들이 고트족 전체를 파괴한다면 즉시 프랑크족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레온티우스 원로원 의원을 대표로 삼은 사절을 보내 토틸라와 고트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과 동맹을 맺도록 초대하면서, 지난날 테우데베르가 불법적으로 취하려고 시도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적법한 상속인은 부모가 실수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우데발트는 고심 끝에 어느 쪽도 공개적으로 돕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당시 그는 어린 데다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왕이 중용했던 알레만니 족장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 형제가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허락했다. 아가티우스에 따르면, 알레마니 족이 주축이 된 7만 5천 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장성 나르세스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이었던 파르마를 함락하였다. 그곳의 로마군은 헤룰리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 풀카리스는 패배 이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하였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하였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만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였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시에 주둔했다.

554년 초엽, 프랑크군은 이탈리아 중부를 약탈하고 삼니움까지 남하했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양갈래로 진군해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우타리스가 방향을 돌려 본국으로 귀환하려 하자, 아르타바네스의 군대가 피사룸 인근에서 기습 공격해 선봉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고트족들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였는데, 전염병에 걸려 3만의 군대가 2만명으로 축소되었다.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을 지었다. 이후 18,000명의 동로마군이 현지에 도착해 탑에 불을 질러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어진 회전에서, 프랑크군은 완패했고 부틸리누스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이 이탈리아에서 섬멸당하고 있을 무렵, 테오데발트는 허리가 아파서 곧게 펴지 못하는 등 중병에 시달리다가 555년 11월 또는 12월에 사망했다. 테오데발트의 아내이자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부데트라다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클로타르 1세는 테오데발트가 사망하자 즉시 영지를 접수하고 부데트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이 일에 비난을 퍼붓자 부데트라다와 이혼하고 비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에게 부데트라다를 시집보냈다. 그 후 동로마군은 556년 프랑크군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한때 테우데베르 1세가 정복했던 땅에 대한 로마 제국의 권력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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