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데리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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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 프랑크인의 왕
Childeric I | 킬데리크 1세
파일:킬데리크 1세.jpg[1]
제호
한국어
킬데리크 1세
라틴어
Childericus
프랑스어
Childéric
생몰 년도
미상 ~ 481년
재위 기간
457년 ~ 481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살리 프랑크족의 왕.


2. 행적[편집]


살리 프랑크족의 왕이자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조 메로베우스의 아들로, 457년경에 왕위에 올랐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저술한 <프랑크인의 역사>에 따르면, 그는 신하들의 아내들을 겁탈했다가 백성들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쫓겨났고, 백성들은 갈리아 민병대장 아에기디우스를 왕으로 모셨다. 그는 8년간 튀링겐에 망명하면서, 튀링겐 왕의 아내 바시네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 프랑크인들이 돌아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귀국하면서 남편을 떠난 바시네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클로비스 1세가 태어났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조르주 보르도노브는 이 이야기는 킬데리크 1세와 아에기디우스의 대립을 암시한다고 본다. 당시 서로마 제국 장성이자 갈리아 주둔 로마군 사령관이었던 아에기디우스는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족, 프랑크족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만들어서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킬데리크는 이를 거부했다가 로마인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프랑크인들에게 축출되었고, 나중에 킬데리크가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한 뒤 아에기디우스의 승인을 받고 프랑크 왕에 복위했을 가능성이 있다.

램스 주교 레미가 클로비스 1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당신은 방금 제2의 벨기카 행정부를 접수했다. 당신이 당신의 부모님처럼 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킬데리크가 적어도 로마 속주에 속한 벨기카 속주의 제2의 군사 및 시민 지도자로서 로마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색 십자형 비골과 인장 반지는 로마 황제에게 수여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프랑스 역사가 미셸 루슈는 이를 근거로 킬데리크가 벨가이의 두번째 총독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갈리아 방면 로마군 사령관 아에기디우스와 동맹을 맺고, 458년경에 아에기디우스가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지령에 따라 갈리아 북부를 장악하는 데 협조해 리옹에서 부르군트족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피살되자, 아에기디우스가 리키메르에 대항해 독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463년 킬데리크가 오를레앙에서 전투를 벌였다"라고 기술했으며, 마리우스 아벤티센지스(Marius d'Avenches)는 아에기디우스와 서고트 왕국이 오를레앙 인근에서 격전을 벌여 서고트군이 패했고 서고트 왕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이로 볼 때, 그는 463년 아에기디우스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 토리스문드를 상대로 오를레앙에서 맞붙었을 때 아에기디우스 편에 가담하여 승리에 기여했을 것이다.

464년경 아에기디우스가 사망한 뒤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군을 통솔했다. 그는 시아그리우스에게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갈리아 북부를 방어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469년, 앙주의 벡직 피울루스가 도시를 지배하던 색슨족 지도자 오도바크리우스(Odovacrius)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파울루스를 도와 색슨족을 앙주에서 몰아냈고, 파울루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앙주를 그대로 장악했다.[2] 이후 루아르 강 하류의 섬들을 장악하고 그곳의 수비를 자신의 친척이자 캉브레 프랑크 족의 왕 라그나카르의 형제인 리그노메르에게 맡겼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왕을 자처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오도아케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했고 자신은 여전히 로마의 갈리아 사령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로마 제국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서로마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노 황제가 거부하자 교류를 끊었다. 반면, 킬데리크는 제노에 충성을 맹세했고, 원정대를 파견해 오도아케르가 장악한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 후 그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지만, 511년에 사망한 아들 클로비스 1세가 30년간 집권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481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킬데리크 1세는 튀링겐족의 바시네와의 사이에서 클로비스 1세, 아우도플레다(Audofleda), 란데칠드(Lanthechild), 알보프레다(Albofleda)를 낳았다. 아우도플레다는 동고트 왕국테오도리크 대왕과 결혼하여 아말라순타를 낳았고, 란데칠드와 알보프레다는 아리우스파 신도였지만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 세례를 받을 때 함께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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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킬데리크 1세의 인장 반지. 투르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원본은 1831년 도난당했고, 현재는 복사본만 남아 있다.[2] 다만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파울루스를 살해하고 앙주를 탈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