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샤 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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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니 왕조 제2대 샤
티무르 샤 두라니
تېمور شاه دراني


이름
티무르 샤 압달리 두르에두란
تېمور شاه دراني
출생
1746년 12월
[[아프샤르 왕조|

아프샤르 왕조
display: none; display: 아프샤르 왕조"
행정구
]]
마슈하드
사망
1793년 5월 20일 (향년 46세)
[[두라니 왕조|
두라니 왕조
display: none; display: 두라니 왕조"
행정구
]]
마루프[1]
재위 기간
두라니 왕조 샤
1772년 11월 ~ 1793년 5월 20일 (21년)
대관식
1772년
전임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
후임자
자만 샤 두라니
부모
아버지 : 아흐마드 샤 두라니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일생
2.1. 즉위 이전
2.2. 두라니 왕조의 제2대 샤
2.2.1. 반란 진압
2.2.2. 시크교도와의 전쟁



1. 개요[편집]


두라니 왕조의 제2대 샤.


2. 일생[편집]



2.1. 즉위 이전[편집]


티무르 샤는 1746년 12월 마슈하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였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당시 아프샤르 왕조나디르 샤 아래에서 종군하는 부관으로, 나디르 샤의 총애를 입어 상당한 권력을 누리는 무장이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가 그 포악한 성격으로 원한을 입어 살해당하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기회를 꿰찬 뒤 세력을 모아 두라니 왕조를 건국하게 된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티무르 샤를 무굴 제국의 황제 알람기르 2세의 딸과 결혼시켰고, 티무르 샤는 결혼 선물로 시르힌드 시를 받고 겨우 11세에 시르힌드, 카슈미르, 펀자브 주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등 요지부동한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티무르 샤는 어린 시절부터 승마와 검술을 배우며 헤라트펀자브를 통치하고 군주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다만 아버지만한 군사적 재능은 없어서 11세에 첫 패전을 치르는 등 수난도 많이 겪었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처럼 너무나 강한 적들을 상대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군재가 부족한 탓이 컸다.[2]

아흐마드 샤는 코에 입은 부상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 상당히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다. 그는 죽기 몇 달 전인 1772년 티무르 샤를 불러 두라니 왕조의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봉신들의 합의를 전혀 구하지 않은 독단적인 결정이었기에 내부 반발이 있었으나 아흐마드 샤의 권위가 워낙 절대적이라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이러한 계승 자체는 훗날 티무르 샤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당시 신하들 대부분은 아흐마드 샤의 장남이자 칸다하르 총독인 술라이만을 후계로 밀고 있었기 때문. 신하들은 술라이만을 공식 후계자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흐마드 샤는 술라이만이 폭력적이고 비타협적이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아흐마드 샤가 굳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티무르 샤를 후계로 정한 이유는 아마 술라이만이 제위에 오를 시 신하들의 입김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3]

하지만 신하들은 아흐마드 샤의 뜻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력 권력자였던 샤 왈리 칸과 사르다르 자한 칸은 티무르 샤가 먼 헤라트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아흐마드 샤와 티무르 샤의 연락책을 몰래 죽여버렸다. 1772년 아흐마드 샤가 마침내 임종하자 왈리 칸은 시신을 두꺼운 커튼이 달린 가마에 실어 썩는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고 칸다하르로 이동해 왕이 몸이 좋지 않다고만 알린 채 죽음을 은폐했다. 왈리 칸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마침내 왕의 죽음을 선포하고 계획대로 술라이만을 새 왕으로 옹립했지만, 이미 아흐마드 샤의 의중이 어느 정도 퍼져있던 터라 술라이만을 왕으로 인정하는 세력은 많지 않았다. 이 소식이 티무르 샤의 귀까지 들어가자 티무르 샤는 당장에 군사를 끌고 헤라트에서부터 행진해왔다. 티무르 샤의 군세를 두려워한 왈리 칸은 항복했지만 결국 처형당했고,[4] 술라이만 왕자 역시 티무르에게 항복하며 티무르 샤가 명실상부한 두라니 왕조의 제2대 샤로 즉위한다.


2.2. 두라니 왕조의 제2대 샤[편집]



2.2.1. 반란 진압[편집]


중간에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티무르 샤는 1772년 11월 두라니 왕조의 제2대 샤로 즉위하는 데 성공한다. 샤로 즉위한 티무르 샤는 일단 왕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했다. 대관식을 치른 티무르 샤는 일단 자신의 즉위를 지지한 아미르들에게 대대적인 포상을 내렸고 아흐마드 샤의 신하들이 맡고 있던 직위를 거의 그대로 유임하며 신하들을 달랬다. 칸다하르의 상황을 정리한 티무르 샤는 카불로 행군해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토후나 아미르들을 대거 처형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티무르 샤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아미르들을 쓸어버리자 일부 아미르들은 아예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에 이른다. 개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아브드 알할리크 칸 사도자이는 칸다하르를 기반으로 한 유력 아미르로, 스스로 아흐마드 샤의 삼촌으로 자칭하며 왕족의 지위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아브드 알할리크 칸이 봉기하자 무려 6만에 달하는 대군이 집결했고, 아브드 알할리크 칸은 티무르 샤가 머무르던 카불로 향했다. 티무르 샤는 당시 고작 6,000여 명 밖에 거느리지 않고 있었기에 자칫하면 즉위하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다만 종교계는 티무르 샤의 정통성에 손을 들어줬고, 덕분에 일부 아미르들이 이탈해 티무르 샤의 편에 서면서 어느 정도 세력의 균형이 맞춰졌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아브드 알할리크 칸이 패퇴해 눈이 뽑혀 장님이 되어버렸고, 티무르 샤는 칸다하르로 진군해 쿠데타 가담자들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데 성공한다.[5]

아브드 알할리크 칸의 반란을 진압한 뒤에도 봉기는 끊이지 않았다. 티무르 샤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페샤와르에 머무르는 틈을 타 파이즈 알라 칸이 또다른 반란을 기획한 것이다. 그는 야쿠트 칸, 궁정의 환관들과 공모해 몰래 티무르 샤를 암살할 계획을 짰다. 어느 정도 세력이 모이자 파이즈 알라 칸은 일단 티무르 샤에게 군대를 모으는 걸 허가해주길 요청했다. 핑계는 시크 왕국의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무슬림들을 탄압하고 있는데, 군대를 맡겨주면 이 시크교도들을 단죄하고 펀자브 지방을 다시 아프간 영토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반란을 꿈에도 생각치 못한 티무르 샤는 아무 생각 없이 파이즈 알라 칸의 요청을 허가했고, 파이즈 알라 칸은 무려 2만 5천여 명의 대군을 소집한 뒤 페샤와르에 주둔시키며 때를 기다렸다.

어느 날 저녁, 티무르 칸이 점심을 먹고 발라 히사르 요새에서 낮잠에 들자 파이즈 알라 칸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요새 내부로 진군했으며, 요새의 호위병들에게는 샤가 군대를 시찰할 예정이라고 둘러대며 무사히 요새 입구까지 통과했다. 하지만 호위병들이 샤의 허가가 있어야만 무장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며 거부하자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내부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깨어난 티무르 샤는 발라 히사르 남쪽 건물 꼭대기로 피신했고, 근위병들에게 반란군들을 당장 진압하라 명했다. 피아식별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무차별적으로 죽여댔는데 그 좁은 요새 내부에서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6] 치열한 전투 끝에 반란군들은 진압당했고 파이즈 알라 칸과 그 아들은 살해당했다.

티무르 샤는 1776년 페샤와르에서 카불로 돌아와 카불을 두라니 왕조의 새 수도로 삼아 천도했다. 일단 카불이 지리적으로 두라니 영토의 중심에 있었기에 국경 어디에서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바로 향할 수 있었고, 기후적으로도 상당히 쾌적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티무르 샤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두라니 부족과 그 중심지 칸다하르를 싫어했다. 게다가 칸다하르의 요새와 궁전에는 포병 공격에 대한 변변찮은 방어 시설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불을 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포를 끌고 올라오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뿐더러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이전 파이즈 알라 칸의 반란으로 진심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티무르 샤는 카불의 궁전을 두터운 돌벽으로 에워싸기도 했다. 결국 티무르 샤의 카불 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칸다하르와 두라니 부족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을 뿐더러 여러 부족들이 섞여사는 카불 특성상 두라니 왕조 특유의 부족 중심주의가 약화되었던 덕이었다.[7]


2.2.2. 시크교도와의 전쟁[편집]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죽기 1년 전, 시크 교도들은 1772년 물탄을 두라니 왕조에게서 빼앗았다. 당시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지나치게 병약해서 공세를 지휘할 여력이 없었고, 티무르 샤는 막 제위를 계승하느라 물탄을 되찾아올 여력이 없었다. 물탄 지방과 라호르가 시크교도들에게 빼앗긴 탓에 아프가니스탄의 대인도 영향력은 극도로 위축되었는데, 일단 신드 지방의 속국들이 두라니 왕조에게 공물 바치기를 거부하는 건 당연하고 두라니 샤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속국들이 티무르 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니 인근의 두라니 족장들이 티무르 샤를 무시하는 건 예측된 일이었다. 이를 두고볼수만은 없던 티무르 샤는 외교적으로 물탄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그는 하즈 알리 칸은 사절로 보내 시크 군주들과 협상하도록 했지만... 하즈 알리 칸이 제발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티무르 샤의 당부를 싹 무시하고 고압적으로 행동한 탓에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갔다. 이로써 두라니 왕조와 시크 교도들 사이에는 무력 충돌이 시작된다.[8]

외교적 방법이 실패한 것을 깨달은 티무르 샤는 18,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친히 출정을 나섰다. 장기 칸 장군은 극도로 군사를 조심스레 운용했고, 몰래몰래 시크 군영 코앞까지 다가가 아침에 기습했다. 아무 방비가 되어있지 않던 시크 군대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쓸려나가며 3,00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강에 빠져 익사하는 참패를 겪었다. 티무르 샤는 그 여세를 몰아 1780년 1월에 물탄 공략에 들어갔다. 시크 군주들은 포위당한 물탄을 구원하기 위해 15,000여 명의 기병대를 보냈는데, 하필이면 모래 폭풍이 불어 시크군대의 지휘관이 납치당하는 바람에 지휘 표시가 엇갈리며 대참패를 겪었다. 모래 폭풍이 걷히자 시크 교도들은 썰려나간 시체들을 보고 경악하며 라호르로 후퇴했다.

라호르에서 보낸 시크 지원군이 패퇴하자 물탄 내부의 시크교도들은 티무르 샤와 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협상이 체결되어 물탄 요새가 티무르 샤에게 다시 넘어갔고, 1780년 2월에 물탄은 다시 아프간 영토로 복속된다. 물탄을 복속시킨 티무르 샤는 페샤와르를 거쳐 카불로 돌아가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티무르 샤가 카불로 돌아간 틈을 타 부하들이 다시 물탄과 신드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포하자 격노한 티무르 샤는 곧바로 돌아와 반란군들을 제압하려 들었다. 티무르 샤는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였던 바하울 칸의 도시 바하왈푸르를 불태웠고 오랜 공성전 끝에 바하울 칸의 요새를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바하울 칸이 먼저 항복했기에 그를 죽이진 않았고, 그대로 물탄의 지배자로 유임시켰으며 대신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들을 견제하도록 시켰다. 바하울 칸의 반란마저 재진압한 티무르 샤는 카불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티무르 샤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2년 반만에 겨우겨우 진압했고, 특히 1788년에는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알람 2세를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샤 알람 2세가 다스리던 무굴 제국은 망하기 직전의 제국이었던 터라 굴람 카디르라는 반역자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던 상태였다. 굴람 카디르는 붉은 요새로 쳐들어와 샤 알람 2세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리는 등 막장 행각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티무르 샤가 샤 알람 2세를 도와주려 시도했던 것.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진군하기도 전에 이미 마라타 제국이 한발 앞서 굴람 카디르를 축출하고 샤 알람 2세를 복위시키면서 티무르 샤가 델리로 진군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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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마루프.[2] 한 번은 마라타 제국에게 패배해 펀자브 일대를 그대로 내주고 아프간 일대로 북상해 후퇴한 적까지 있다. 놀란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마라타 군대를 쳐부수고 북인도 지방의 패권을 확고히 한다. 이렇게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살아있을 때는 티무르 샤가 사고를 쳐도 아버지가 뒷수습이 가능했지만... 아흐마드 샤가 죽은 이후부터 두라니 왕조는 속절없이 무너진다.[3] 당시 아흐마드 샤가 얼굴에 퍼져있던 병이 감염되어 까지 침투해 제대로 된 상황판단이 어려웠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그것보다는 술라이만이 신하들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했다는 가설이 더 합리적이다.[4] 이건 멍청하게도 아무 공지 없이 막무가내로 티무르 샤의 군영에 도착했던 왈리 칸의 실책이었다.[5] 여담이지만 이때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파슈툰계 두라니 부족이 소외되기 시작한다. 두라니 왕조를 세운 핵심 그룹이었으나 이젠 오히려 하자라족이나 키질바시들에게 밀려나게 되었던 것.[6] 얼마나 피해가 컸는지 요새 내부에서 시체를 발로 밟지 않고 이동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7] 당시 카불은 지금의 헬게이트가 아니라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아름다운 자연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도시였다. 중앙아시아 최고의 중심지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8] 하즈 알리 칸은 멍청하게도 물탄과 라호르에서 철수하든지 아프간에 복속되든지 둘 중 하나를 당장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시크 군주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고 하즈 알리 칸은 나무에 묶인 채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