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시티고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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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고 당시
3. 사고 이후



1. 개요[편집]


Peshtigo Fire

1871년 10월 8일 미국 위스콘신주 페시티고에서 있었던 대화재.


2. 사고 당시[편집]


페시티고은 위스콘신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페시티고 강으로 유명한 곳이다. 강시엔 약 2,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마을에는 나무 가공 공장과 교회, 학교가 있었다.

사고 당일, 인근 철도 작업을 하던 도중 작은 화재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 불정도는 흔했다. 기름 램프가 흔한데다 그 램프가 깨져 불이 나는 일도 흔했고, 목수들이 나무를 자르고 남은 가지를 태우다 불이 번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당시 상황이 안좋았다. 비가 며칠 째 내리지 않아 날씨가 매우 건조했고, 바람마저 엄청 불었다. 작은 화재는 바람을 타고 금새 퍼져나가 대형 화재가 됐다. 화재가 일어나고 1시간이 지나자 불은 인근 도시 페시티고를 다 태워버렸다. 바람이 너무 강해 강을 건넜고, 약 시속 160km의 속도로 바람이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불이 너무 커서 불 자체가 기류를 만들고, 그 기류를 타고 이동하는 탓에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필 당시엔 나무로 거의 모든 걸 만드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집부터 시작해서 가구, 보도블럭, 보도블럭 사이를 채우는 톱밥, 심지어 침대 매트리스도 나무 톱밥을 썼다. 나무로 가득찬 마을들은 불을 키워주는 땔감 역할만 했고, 맥 없이 타들어갔다. 불의 규모가 너무 커서 끄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근처에 있던 소방차들도 하필 시카고에서 일어난 시카고 대화재를 진압하러 출동한 상황인지라, 사람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사람들은 인근 페시티고 강에 대피했다. 불이 너무 강해 철도가 녹고, 모래가 유리로 변했을 정도였다.

불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꺼졌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피해를 남긴 뒤였다.

사고로 피해를 입은 도시와 마을은 17개가 넘었고, 불탄 면적은 120만 에이커를 넘는다. 최소 3,000명이 집을 잃었고, 재산피해만 당시 기준으로 3억6900만 달러에 달한다. 사망자 수는 추정치 최소 1,700명에서 최대 2,500명에 달한다. 사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편집]


페시티고는 사고 이후 재건됐다. 여러 주택과 교회, 학교가 다시 들어섰다. 하지만 나무 가공 공장은 주변에서 가공할 나무들이 전부 타버린 탓에 복구하지 못했다. 현재 페시티고는 인구가 약 3,400명이고,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난 도시(City rebuilt from ashes)" 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현재 페시티고에는 페시티고 대화재를 기리는 추모 박물관이 세워져있고, 안에서 관련 역사적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도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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