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르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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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르무스
(Firmus)
출생
미상
사망
375년
직위
베르베르 왕자
반란 대상
발렌티니아누스 1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반란자. 아프리카 속주에서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상대로 3년간 반란을 이끌었으나 진압당했다.


2. 생애[편집]


베르베르 족장이자 로마 장교였으며, 기독교 신자였던 누벨의 아들이다. 누벨이 370년대 초에 사망하자, 그의 자녀들은 영지를 놓고 다퉜다. 결국 피르무스는 사생아지만 아프리카 속주 총독 로마누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형제 잠멕을 살해했다. 로마누스는 이에 격분하여 트리어의 황궁에서 내무장관으로 봉직 중이던 인척 레미기우스를 통해 피르무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걸 알게 된 피르무스는 진짜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372년 무리를 모아 아프리카 속주를 침략했다.

당시 아프리카 속주는 363년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의 실정으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도나투스파 문제도 작용했었음은 물론이다. 트리폴리타니아[1] 렙티스 마그나 시 주변의 농촌 주민들은 오지 사막에 사는 베르베르인에게 빈번하게 약탈당하자,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로마누스는 렙티스 마그나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주민들에게 낙타 4,000필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이 거절하자, 로마누스는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출정하기를 거부했다. 주민들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로마누스의 행태를 규탄했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레미기우스를 꼬드겨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에 사태의 경위를 날조하여 황제에게 먼저 보고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양측의 말을 모두 믿지 않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미적거리는 사이, 베르베르인들이 렙트시 마그나를 습격했다. 주민들은 두 번째 사절을 황제에게 파견해 로마누스의 계속되는 직무유기를 고발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팔라디우스를 파견하여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파악하게 했다. 팔라디우스는 현지에 도착한 뒤 로마누스가 저지른 행태를 파악했으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주둔군 지휘관 및 경리관들과 짜고 공금 일부를 횡령했다. 그 후 팔라디우스와 로마누스는 악마의 거래를 했다. 팔라디우스는 트리어로 돌아와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의 탄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보고했고, 로마누스는 팔라디우스의 공금 횡령을 숨겼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거짓 탄원을 한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했고, 368년경 트리폴리 시 장관 한 명이 처형되고 대표 2명은 혀가 뽑히는 처벌을 받았다.

이렇듯 든든한 '빽'을 둔 로마누스는 주민들을 마음껏 수탈했고, 이로 인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피르무스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했고,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대 테오도시우스를 아프리카로 파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73년 시티피스에 도착한 뒤 로마누스가 수탈을 일삼은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긴급 체포했다. 그 후 로마누스의 문서들을 조사하다가, 팔라디우스가 제삼자에게 보내고 다시 제삼자가 로마누스에게 인사를 전하는 편지를 발견했다.

"팔라디우스가 사령관께 안부를 묻는다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관직에서 해임된 것은 트리폴리 사건에 대해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황제에게 보고했고, 팔라디우스는 은퇴하여 살고 있던 시골 영지에서 끌려나와 트리어로 압송되던 중 자살했다. 또한 내무장관 레미기우스는 처형되었고, 거짓 증언을 한 자들 역시 뒤따라 처형되었다. 그렇게 사건을 수습한 뒤, 테오도시우스는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로 진격하여 피르무스를 토벌할 군대를 조직했다. 피르무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사절을 3차례 보내 로마누스가 자신을 몰아세워서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며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사정을 잘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피르무스는 보라색 망토를 두르고 목줄을 맨 채 돌아다니며 황제 행세를 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가 협상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건 이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피르무스는 테오도시우스에 맞서기 위해 형제 마시젤과 디우스에게 틴덴스와 마시니센스 인을 이끌게 하였고, 누이 키리아는 피르무스를 대신하여 베르베르 부족의 내정을 이끌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전력상 열세여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375년경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피르무스는 이사플렌세스 족장 이그마젠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힌 뒤, 테오도시우스에게 끌려가던 중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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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르타고의 동부지방에 해당하는 곳으로, '세 도시'라는 뜻의 로마식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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