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샐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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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백악관 대변인
피에르 에밀 조지 샐린저
Pierre Emil George Salinger


출생
1925년 6월 1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사망
2004년 10월 16일 (향년 79세)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카바용
종교
가톨릭
학력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B.S.)
의원 선수
1 (상원)
의원 대수
88
지역구
캘리포니아 클래스 1
소속 정당


약력
존 F. 케네디 대선후보 공보담당관 (1960)
제9대 백악관 대변인 (1961~1964)
제88대 미국 상원의원 (1964)
로버트 F. 케네디 대선후보 공보담당관 (1968)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언론인, 작가. 존 F. 케네디의 최측근 중 하나[1]로 그의 대선 공보관과 백악관 대변인을 맡았다. 케네디 암살 이후에는 로버트 F. 케네디를 모신 케네디 가문의 대표적인 가신이다.


2. 생애[편집]


1925년 6월 14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의 국회의원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고 드레퓌스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유명한 좌파인사였다.

어릴 때는 피아노를 엄청 잘쳐서 "샌프란시스코의 베토벤" "음악 신동" 소리를 들었고, 6살 때 공개 콘서트를 열었다. 하루 4~5시간 씩 피아노를 연주해서 진지하게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12살 때 어머니가 그의 내향적인 성격을 우려해 피아노를 1년동안 못치게 하자 그 사이에 피아노 연주보다 글 쓰는거에 더 관심이 가서 저널리스트로 꿈을 바꿨다. 물론 피아노 치는 것은 계속 취미삼아 했고 백악관 최고의 피아니스트여서 린든 B. 존슨, 재클린 케네디의 행사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케네디 가문과 연이 생긴 것은 1957년 지미 호파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 로버트 케네디와 만나면서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를 호파를 공격하기 위한 보좌관으로 고용했고 존 F. 케네디에게도 샐린저를 소개시켰다. 본래 존 F. 케네디의 언론 담당자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대필 작가이기도 한 테드 소렌슨이었는데, 존 케네디는 캠페인에 다양성을 더하고 싶어서 피에르 샐린저를 자신의 공보담당 비서로 발탁해 1960년 대선 때 언론 대응을 총책임하게 했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샐린저는 정치외교적 경력은 없었지만 케네디는 그를 종종 특사로 써먹곤 했는데, 쿠바 핵위기 때는 그를 소련으로 보내 니키타 흐루쇼프와 2일간 회담하게 했다. 이는 당시 언론에게 문고리 권력의 전형이라고 욕을 먹었지만 어쨌든 쿠바 핵위기를 잘 끝낸데에 샐린저의 공이 어느정도 있다고 평가받는다.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이후 잠깐 린든 존슨의 대변인을 맡았지만 이내 사퇴하고,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직에 출마했다. 1964년 클레어 잉글 상원의원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캘리포니아의 민주당 후보 예비선거에 승리해 팻 브라운 주지사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지명되었고, 1964년까지 재직했다. 하지만 1964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며 겨우 4개월 남짓만 상원에서 재직하고 물러나야했다. 1964년 대선에서 LBJ에 반대하기 위해 대선 출마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단념하였다.

이후 1966년 케네디 평전을 저술했다. 이 평전은 유려한 문체와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엄청난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케네디 신화를 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로버트 케네디가 대선에 출마하자 샐린저는 RFK를 돕기 위해 다시 정계에 뛰어들었고 그의 최측근 인사로 RFK의 경선 선전을 이끌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할 때 바로 옆에 있었을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만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에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그는 다시는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RFK 암살 이후에는 여러 언론에 기사를 기고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살아갔다. 말년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음모론 글을 믿고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가 아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주장하다가 망신을 당했으며, 인터넷에 있는 글을 아무거나 믿는 현상이 "샐리저 현상"이라고 불리면서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에 반대했고, 조지 부시가 당선되면 미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부시가 이기자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자기 어머니의 나라인 프랑스로 떠나 죽을때까지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내며 은둔 생활을 했다. 2004년,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4
연방 상원의원 선거
캘리포니아


3,411,915 (48.46%)
낙선 (2위)


4. 여담[편집]


  • 죽기 9년 전에 한 인터뷰가 있다.# 케네디 가문에 관심이 많으면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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