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랑스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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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빌헬름 랑스도르프(Hans Wilhelm Langsdorff)
1894년 3월 20일 ~ 1939년 12월 2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나치 독일해군 장교.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의 3번함이었던 그라프쉬페(Graf Spee)의 함장.


2. 생애[편집]


한스 랑스도르프는 1894년 독일 제국 뤼겐 섬에서 태어나, 4살 때 뒤셀도르프로 이주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라 어린시절 목회자를 꿈꾸었으나 뒤셀도르프로 이사 후 이웃에 살던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의 영향을 받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2년 킬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해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전술적으로 패배시킨 공으로 빌헬름 2세로부터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6년 도이칠란드급 장갑함 3번함 그라프슈페[1] 가 완공되자 랑스도르프는 그라프슈페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는 부하들과 전함을 이끌고 남대서양의 연합국 상선을 격침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동년 8월 21일 빌헬름스하펜에서 출항한 그라프슈페는 10주 동안 9척의 영국 상선을 격침시켰는데, 이때 랑스도르프 함장은 만국평화회의를 근거로 영국인 포로들에게 인도적인 대우를 하여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

그러나 그라프슈페는 영국 해군의 끊임없는 추격에 시달렸고, 마침내 12월 13일 영국 함선(중순양함 MHS액세터, 경순양함 MHS에이잭스, 경순양함 MHS아킬레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리버 플레이트 전투'에서 그라프슈페의 승무원 36명이 전사하고 6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발의 명중탄을 맞아 식량창고가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특히 경량화와 함속증가를 위해 채택한 선박용 디젤엔진은 당시 기술로는 연료로 사용하던 중유의 점성이 높아 바로 엔진에 주입 할 수가 없기에 중간에 중유의 끓여 점도를 낮혀 주입하는 방식이였는데 중유를 끓이는 장치와 이를 연결해주는 파이프라인의 파손이 결정적이였다.
[3]
또한 이 전투에서 랑스도르프는 순양함으로 이뤄진 적의 함대를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으로 오판하여 사거리가 길고 화력이 앞선 11인치포로 중순양함 MHS액세터에 큰 피해를 입히지만[4] 적의 사정권 내에 접근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5][6]

이 전투로 연료장치의 큰 손상을 당한 그라프슈페는 전선을 이탈 남미중립국이었던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정박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추격해 온 영국 해군이 몬테비데오 항구 주변을 봉쇄하였고, 우루과이 정부가 허가한 72시간의 체류기간이 끝나가자[7] 제한된 시간과 영국의 압박으로 인한 현지 수리 인력들의 협력 거부로 그라프슈페의 수리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독일 해군 본부는 랑스도르프에게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국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탈출을 명령한다. [8]. 하지만 당시 국제 해양법상 전쟁중인 나라의 상선이 중립국이 항구를 떠나면 적국의 군함은 24시간 동안 항구를 떠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영국은 매일 상선을 출항시켜 그라프슈페의 출항을 막았으며 그 사이 주포에 타격을 입어 이탈했던 MHS아킬레스가 돌아오고 또한 큰 피해를 입었던 MHS액세터는 포틀랜드에서 온 중순양함 MHS캠벌랜드와 교대를 하는등 전력을 회복하였다.
독일 해군본부의 명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문제였는데 리버 플레이트 하류는 수심이 낮아 기동을 어렵게 만들었기에 제대로 수리를 받지 못한 그라프슈페가 출항을 했다간 손쉬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영국의 정보전으로 인해 독일측으로 하여금 항공모함 아크로열이 기다리고 있다는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심을 하던 랑스도르프 함정은 함내의 기밀서류를 소각하고 당시 최신기술이던 해군 레이더등 중요 설비들의 파괴를 시지하였고 12월 17일 저녁 40여명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항구를 출항 항구에서 벗어나 닺을 내린 뒤 타이머가 폭발물을 작동시킨 뒤 하선 후 보트를 타고 항구로 돌아온다. 몇 분 후 수천명의 사람들[9]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라프슈페는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바다에 가라 앉았고 랑스도르프는 부하들과 함께 독일 화물선 타코타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을 한다.
이후 부하들에게 배를 자침시킨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설명을 한 후 20일 묵고 있던 호텔 객실에서 나치 독일기가 아닌 프로이센기를 두른 채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랑스도르프가 그라프슈페를 자침시킨 것에 대해서 독일에선 많은 비난 여론이 있었는데 랑스도르프의 후원자였던 독일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은 모든 함정에 대해 전투시 불가항력적인 상황외엔 절대로 자침을 하지 말 것을 명령했으며 독일 정부는 랑스도르프의 미망인에게 연금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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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의 일치인지 그라프슈페의 선명은 랑스도르프를 해군의 길로 인도했던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의 이름에서 따왔다[2] 랑스도르프는 국제법에 준수해 선원들을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했으며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1939년 11월 15일 그라프슈페에게 침몰된 영국의 유조선 아프리카 쉘(Africa Shell)호의 선장 '패트릭 도브'는 포로신분으로 그라프슈페에 잡혀있다 리버 플레이트 전투까지 겪은 후 그라프슈페가 12월 14일 몬테비데오에 정박하자 풀려났는데 이때의 경험담을 담은 책 '나는 그라프슈페의 포로였다'(I Was Graf Spee's Prisoner)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 따라면 랑스도르프는 포로들을 신사적으로 대했으며 압류한 개인소지품들도 꼼꼼히 기록해 돌려주었다고 한다. 부하들에게도 포로들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하라고 명령하였고 부하들도 최대한 이 명령에 따르려 노력하했으며 보급품이 부족할 때도 수병들과 같은 식사를 받았다고 했다. 이에 리버 플레이트 전투에서 사망한 독일 수병들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포로로 잡혀있던 영국측 선원들이 참석해 애도를 표했으며 랑스도르프가 아르헨티나로 이동 후 자살을 하자 포로로 잡혀있던 상선의 선장이 영국측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3] 도이칠란드급 장갑함 항목에 나와 있듯 당시 독일은 바르세유 조약에 의해 군비 증강의 제한을 받고 있었는데 해군도 마찬가지여서 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만을 보유 할 수 있었다. 드레드노트급은 서양식 기준으로 중순양함에 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중순양함의 주포는 8인치가 표준이였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대형함에 달린 12~14인치 포와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에 대형함을 건조 할 수 없던 독일 해군은 중순양함급의 신규함인 도이칠란드급에 11인치 포를 달고 당시 최신 기술이였지만 아직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선박용 디젤엔진을 채택, 화력과 속도를 높이는 대신 방어력을 포기 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4] 액세터에서만 총 85명의 사상자(전사 61명 부상 24명)가 발생하게 된다[5] 만약 랑스도르프가 적함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사거리와 화력, 속도가 앞선 이점을 이용해 전투를 펼쳤을 테지만 위의 오판으로 경순양함만 파괴하면 구축함들은 퇴각 할 것이라 생각했다.[6] 에이잭스 전사자 7명, 부상자 5명/ 아킬레스 전사자 4명, 부상 1명.[7] 원래 영국측은 24시간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항구를 봉쇄하고 있던 중순양함 액서터와 경순양함 에이잭스는 앞선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상태라 그라프슈페가 출항을 해 전투가 벌어진다면 큰 피해가 예상되었기에 다른 전함들이 올 시간이 필요했고 한편 그라프슈페를 잡기 위해 대규모 함대가 몰려온단 여론전을 펼쳐 독일과 랑스도르프를 압박한다.[8] 당시 그라프슈페는 하루정도 운행이 가능한 정제된 중유가 있었고 이는 리버풀 레이트만 반대편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에 충분한 연료이긴 한다.[9] 그라프슈페와 영국 함대가 전투를 벌인다는 소문이 퍼져 그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항구에 모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