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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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허성도.jpg
성명허성도(許聖徒)
생몰1902년 8월 28일 ~ 1944년 6월 4일
출생지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은리
사망지대전형무소
추서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허성도는 1902년 8월 28일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은리에서 부친 허주와 모친 남금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모친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착실히 출석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총명해 서당 훈장으로부터 칭찬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안동 계남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계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경 대구 계성중학교 5학년 재학생으로서 이만집 등이 주동한 대구시민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은거한 그는 동료인 김수길, 이영식, 이기명, 이종식 등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상인들에게 철시협조공문을 보내고 친일파조선인과 일본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간 만주, 러시아, 상하이 등지를 떠돌며 사회주의에 감명받기도 했지만, 곧 사회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귀국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간 허성도는 1925년 9월 일본 명치대 영문학부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1927년 가을학기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동경지역소 토목과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간에 일본신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귀국해 경주군 서면 운대리 교회 조사로 공식적인 교역생활에 접어들었고 이듬해인 1937년 사월교회로 옮겨 봉직했다.

그러나 1938년 교회 본부가 신사참배를 따르기로 결의하자 환멸을 느껴 성직을 떠난 그는 공무원이 되어 충북도청 토목과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편으로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청주제일교회 목사 구연직에게 발탁되어 194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실시하던 고등성경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41년 6월 15일에는 충복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청주 제2교회를 담임해 부임했다. 1943년에는 청주제2교회를 떠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에 소재한 연풍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연풍교회 목사로서 설교를 통하여 궁정요배를 거부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했다. 특히 교회를 '농민, 청장년 보충병 양성소'로 사용하라는 일제 경찰의 요구에 거부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3년 9월 13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청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충주형무소, 청주형무소,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1944년 6월 4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허성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