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겐/악곡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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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의미'의 초월과 현실
4. 존재와 관계성
5. 양분화와 이분법의 거부



1. 개요[편집]


호시노 겐의 중심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형태는 항상 변화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인생은 지옥, 인생은 희극(코미디), 그래서 재미있다」 #


'모르는 것'을 사랑하고,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자기모순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하지만, 그 혼돈이야말로 호시노 겐의 독창성일 것이다. #

일본의 음악가, 배우, 작가인 호시노 겐의 악곡에 드러나는 그의 세계관을 서술한 문서.


2. 특징[편집]


호시노 겐은 싱어송라이터로서, 악곡에 자신의 직접적이고 암울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편이다. 그 대신 그가 보는 세상과 그것에 따른 그의 세계관이 곡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창작물과 관련해서는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가상의 세계 및 배경 설정'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의미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가깝다. 그 외에도 '호시노 겐의 관점을 바탕으로 새로 생성된 인물 및 화자(話者)들[1]'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경우도 꽤 많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 심상 및 풍경, 그리고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펼쳐내 사람들의 감상을 이끌어내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도 집중하거나, 사람들의 마음 속 아픔이나 사회의 어둡거나 힘든 면을 경험한 사람들을 '인물'로 만들어 그 인물들의 행동 또는 회복탄력성을 보여주거나, 또는 공감 및 격려를 촉발시키거나, 그 외에는 특정한 메세지들을 남기기도 한다.

3. '의미'의 초월과 현실[편집]


왜 호시노 겐은 「의미」를 넘어서려고 하는가?

호시노 겐이 소위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한 부류의 아티스트냐?'는 질문을 받으면 답은 바로 나오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표현하는 것들은 때때로 난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를 자랑해 지리멸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만드는 작품에는 언제나 뚜렷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만인에게 인기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쉬운 건 아니다. (중략) 이제부터 그의 악곡 세계관에 기반된 기초적인 바탕 중 하나를 읽어내려고 한다.
호시노의 악곡에는 자주 반복되는 모티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의미의 부정'이다.
- 日常(일상)(2011) -
꿈 밖으로 데려가줘 / 그저 웃는 얼굴을 보여줘 / 이 세상은 빛을 비추고 있을 뿐>
(중략)
나에게만 보이는 것과 / 다수가 보는 세계 중 / 어느 쪽이 거짓인지 선택하면 돼 //
너는 어느 쪽을 갈래? / 나는 한가운데를 갈래 //
의미 밖으로 데려가줘 / 그 알 수 없음을 인정해줘 / 이 세상은 빛을 비추는 거울이야
- 夢の外へ(꿈 밖으로)(2012) -

무엇도 알아듣지 못하는 너에게 나는 / 어떤 것을 노래할 수 있을까 / 의미를 넘어서
- 知らない(모르겠어)(2012) -
곡들 속에서, 「의미」는 네거티브하고 불필요한 것으로서,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중략) 다만, '너의 인생에 의미는 없다'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미만을 요구하지 않는 것, 의미에 구애받지 않는 것, 만일 의미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꿈 밖으로(2012)에서 그려지듯이 모르겠다는 걸 인정하기도 한다. 또한 시간이여(2015)에서 그려지듯이, 담담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진행되어 가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는 어지럽게 변해가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현실은 부조리하고 이해가 불가능하다. (중략)
호시노는 2013년에 지주막하출혈이 발병해, 그 후 치료를 위해 활동을 쉬었다. 한 때 생명의 위기와 죽음의 직전까지 갔지만, 이후 어느정도 회복돼 병원 투병 생활을 하게 됐다. 이 사이, 호시노는 격통과 마주하면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같은 시기 제작이 진행되던 지옥이 뭐가 나빠(2013)에는 당시 호시노의 심정을 전하는 듯한 구절이 담겨 있다. '병실에서의 / 밤이 마음을 / 슬슬 갉아먹어 / 울부짖는 옆 방이 / 시작 신호야' 등은 그 전형이다. 이 곡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도 있다.
- 수많은 / 수많은 / 별 같은 / 구름 같은 // 「어디까지든」이 / 어느샌가 / 시끄럽게 / 무너지듯이 // 거짓으로 된 세계가 / 눈 앞을 물들이며 펼쳐져
여기에도 그가 처한 현실에 대한 절절한 절망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올 수 있는 「의미」의 붕괴의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 일, 연애, 학업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그것들을 잃어버린다. (중략) 그리고 종종 그것을 잃어버리는데에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다. 그러한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붕괴할 때,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좋은가. 좌절로 인한 의미 상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회생해야 할까. 지옥이 뭐가 나빠는 그 물음에 상당히 쉬운 말로 답하고 있다.
- 거짓인 게 뭐가 나빠 / 눈 앞을 물들이며 펼쳐져 / 그저 지옥을 나아가는 자만이 / 슬픈 기억을 이겨내
지옥이란, 예를 들면 호시노가 경험한 것과 같은, 병실에 있어서의 투병 생활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단지 거기에 있는 것뿐인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지옥을 나아가는 자」란,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 현실로부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를 추구하는 한, 그 의미가 상실될 때 삶 자체마저 붕괴되고 슬픈 기억에 얽매이게 된다. "내가 '진짜'였다면 이렇게 되었을텐데" 같은 원한에 인생을 지배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 곡이 호소하는 건, '그런 의미 등은 처음부터 거짓(가짜)일 뿐이다, 그리고 거짓(가짜)이어도 별로 상관없다'이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믿는 의미가 유일 절대는 아니다, 그것은 별개일 수도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지옥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의미에 얽매이지 않는 삶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메가히트를 치며 사회현상을 일으킨 恋(사랑)(2016)에서도 (의미의 부정과 초월은) 여지 없이 드러난다.
사랑을 했어 너의 / 마주 건 손가락 / 두 뺨의 향기 / 「부부」를 넘어서 가자
호시노 겐에게 있어 사랑은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도 아니고,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붉은 실도 아니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일상의 생활'을 분리하는 걸 거부하고 있다. (상술한) 이 가사는 '생활이라고 하는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나날이 반복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활'이야말로 '사랑'이 발견되는 장소라는 것, 그러한 형태로 '생활'의 정서적 풍요로움을 되찾는 것이 호시노의 메시지인 것이다.
비슷한 호시노의 사상은 2017년에 발표된 「Family Song」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만남에 의미는 없지만 / 피의 색과 모습도 다르지만 / 언제까지나 곁에 있는 것을 / 할 수 있다면 좋을려나
여기서는 두 사람의 만남의 「의미」가 부정된다. 그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우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남의 우연성은 언제까지나 곁에 있고 싶다는 행복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또 반복되는 '오직 행복이 / 하루라도 더 / 곁에 있기를'이라는 가사에도 호시노에게 사랑이 함께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루라도 더' 더불어 사는 날들이 존재하는 것, 비록 그 날들이 숱한 우연과 재난에 직면하고,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사건들로 넘쳐나더라도 그 현실을 '당신'과 공유하는 것이 그가 표현하는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중략)
호시노의 악곡을 전반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현실로부터 완전히 연결되지 않고 떨어져 존재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정당화하는 의미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이 놓여져 있는 현실을 소중히 한다' 라고 하는 태도다. 그것은 동시에 '현실'이, 현실을 넘어선 의미에 의해 비로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현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색채를 지닌 것으로 다시 바라보자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다만, 그것은 '현실이 우연적인 것이며,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담담하게 진행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현실은 자신이 그때까지 믿었던 삶의 의미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붕괴에 직면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의미의 붕괴'로부터 재생하는 것. 그러한 생활방식을 이루어가는 게, 호시노의 세계관 주변에서 요동치고 있다.


4. 존재와 관계성[편집]


한 사람의 집합체로 집단이나 조직은 형성된다. 아무리 결속력이 강한 수단이라도 얼굴도 목소리도 사고방식도 모두 다르다. (중략) 설사 북한 퍼레이드처럼 아무리 짜여져 보여도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많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녀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둘이다.

정말 우수한 집단이라는 것은 아마 '하나로 있는 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들보다 '모두가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2009)


호시노 겐의 일인관

호시노 겐이 보고 있는 인간의 본연은 어쩔 수 없이 고독한 것이다.
- 肌(피부)(2017) -
호시노 겐의 곡은, '나'와 '당신'이 완전히 동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현실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한 사람에게 하나의 세계가 있다.'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말을 쓰고 있어도, 다른 사람과 자신이 완전히 같은 기분일 수는 없는 그런 한 사람의 세계다. '혼자 있는 편이 편하다'라든가 '사람은 혼자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중략)
그의 노래에서는 이러한 「혼자」인 것을, 가사 중의 '나'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즉, 의사나 욕망을 넘어선 곳에 고독이 있는 것이다. (중략) 노골적인 진리가 아니라 진리와 작은 자신과의 갈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호시노 겐의 일인관을 언급한 후에, 이 곡의 가사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진짜」 「가짜」 「단 하나의 것」이라고 큰 표현이 이용되지만, 말이 생물로서 꿈틀거리고 있어, 하나의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그래도 본다면, 우선 이 '진짜 당신'은 1절과 2절 가사의 연결고리에서 겹쳤을 때의 '당신'으로 들린다. 즉 '나의 세계와 겹쳐진 당신의 세계'이다. 또, 「단 하나의 것」도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다면, 「가짜의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서로 겹쳤을 때의 「당신」이 진짜라면, 이 「가짜의 나」는 겹친다고 하는 현상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직전의 문맥의 「마음이 맞는다」라고 눈속임으로 믿고 있는 '나'는,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나」. 즉, 자신이 마음대로 상상한 '남이 보는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품는 그 허상을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중략)
「나는 '나의 세계'를 살고 있다」가 호시노 겐의 세계관이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나」라고 하는 궁극적인 자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람의 수만큼 세계가 있다면, '나'도 상대하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야. 나는 당신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당신은 나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당신과 당신이 생각하는 나, 그 둘 다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만이 나는 아니고,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만이 당신은 아니다. 나는 당신에 의해서 처음으로 내가 되고, 당신은 나에 의해서 처음으로 당신이 된다.
이처럼 호시노 겐의 ばらばら(뿔뿔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존재의 근거를 공유하며 생존해 있는 관계성 자체를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고 있다. 호시노 겐의 음악은 恋(사랑)(2016)에서의 부부나, 不思議(불가사의)(2021)에서의 사랑 등, 둘 사이의 사건을 노래할 때 관계성을 나타내는 기존의 말과 거리를 두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러한 호시노 겐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견해'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사는 언제라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순간에 전혀 다른 경치가 펼쳐져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후략)


5. 양분화와 이분법의 거부[편집]


그의 무서운 점은, 누구보다 세상의 훌륭함을 믿는 동시에, 누구보다 세상을 'X같다'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줄 것 같은 부드러움과 한순간에 베어버릴 것 같은 잔혹함, 애정과 살의, 절망과 희망, 상냥함과 두려움. 그 양면성을 모두 숨김없이 받아들이고 흡수해 혈육으로 만드는 음악가, 그게 호시노 겐이다. #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감정도 그는 다르게 바라본다. 매번 느끼는 기분도 넓게 본다면 희로애락과 같은 여러 감정 중 하나가 부각된 것일 뿐이기에, 단수의 감정만을 다루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서 패러렐 월드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인생은 자신이 기획하는 영화이니 포기하지 말고 나만의 작품을 완성하자’는 곡 ‘エピソード(2011)’와 ‘フィルム(2012)’에서는, 빛과 그림자 혹은 진실과 거짓과 같은 삶의 양분화를 경계한다. #

솔로 초기 음악적 변화의 첫 번째 과도기를 거쳐서부터는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희망찬 사운드에 맞는, 전체적으로 보면 즐거움을 나타내거나,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밝고 긍정적인 메세지를 주는 노래가 많아졌다. 그러나 그 건강한 사운드 속에는 상당히 어두운 부분이 계속 숨어있다.

마냥 '낙관적인 밝음'이 아니라, 밝음 이면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암울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가사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밝은 사운드 속 어두움을 암시하거나, 밝음을 진지하게 다루거나 부각시키기 위해 어두움을 표현하거나, 어두움과 밝음은 이분법적인 존재가 아니라 궤를 같이 한다 등을 이야기한다. '희극비극' 또한 마찬가지로, 희극 안에는 이미 비극이 포함되어있다라고 하는 그의 가치관에 맞게 가사가 씌여진다. '거짓'과 관련해서도 거짓(말)과 현실은 서로 부정하는 관계가 아닌, 거짓(말)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현실은 거짓(말)에 의해 비춰지는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호시노 겐이 말하기를, 곡을 만들거나 하면 아무래도 본인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데, 춤을 추고 싶어지는 곡이나 밝아지고 해피해지는 곡을 만들 때 본인 속의 계속 옆에 있는 어둠 같은 게 무럭무럭 나온다고 한다. 다만 이 어둠을 차단한다거나, 거기에 집어삼켜지기보다는 그 어둠도 빛과 같이 을 추게 해주고 싶어져서 어둠을 제대로 그리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면서 가사를 쓰거나 곡을 만든다고 한다. #

이러한 이분법 및 확립의 거부는 젠더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관념에서도 일어나고, 각 단어들에 있어 관습적인 의미를 두지 않고 벗어난 것이 많다. 당장 일본에서 메가히트쳐 사회현상을 일으킨 코이(2016)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을 그렸으며, Family Song(2017)은 '혈연관계, 나이, 성별, 인종, 차원 같은 것들에 상관하지 않는 사랑노래를 쓰고, 듣고 싶었다'는 의도로 제작했고, 희극(2022) 당시 "가족상은 가족 수만큼 전부 제각각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사회적 관념상의 다수'나 관습적인 의미만을 생각하지 말자는 그의 생각이 큰 셈. 물론 이것들에 있어 '사회적 관념상의 소수'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애초에 호시노 겐 본인이 자신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고 이성애자'라고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고.

[1] 예시로는, SAKEROCK 당시 정규 4집 등은 물론이고, 솔로 활동 시작 이후 본인의 오리지널 곡들에서는 특히 정규 1집이나, 정규 2집에서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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