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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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홍우백(洪祐伯)
출생
1903년 11월 18일
사망
1982년 7월 28일
자녀
3남 4녀
학력
경성제2보통고등학교
수상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6회 / 입선 10회
조선미술협회 양화전람회 입선 등 5회
경력
조선일보 업무국 부국장

1. 개요
2. 생애
3. 작품 현황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화가. 호 경산(耕山), 사백(思百). 대한민국 경성 출생,


2. 생애[편집]


1921년에 경성제2보통고등학교(현 경복고등학교) 1 회 졸업생으로 입학 후 경성미술대학 출신 미술교사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로부터 1923 ~ 1927년간 그림 지도를 받았다. 경성제2보통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 4회(1925년)에서 ”坂道“로 최초 입선 후 7회(1928년)에 “庭”을 출품하여 特選을 하였으며 8회에는 玄石風景, 花 2점이 입선을 했고 9회에도 朝 風景, 靜物 2점이 입선을 했으며 도합 6회 特選(무감사 포함), 10회 入選 총 16차례 受賞을 하며 한국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1926년 2월 22일 경성제2보통고등학교 5학년으로 경성제2보통고등학교 야마다 신이치 및 경성중학교 히요시 마모루, 용산중학교 토다 가즈오 등이 설립한 조선미술협회가 주최한 제1회 洋畫展覽會에 “탑이 보이는 풍경, 겨울의 오후, 廢墟”를 출품하여 3점 전부 입선을 하고 ‘폐허“는 최고상인 K氏 상을 수상하게 됨에 따라 조선미술전람회 5회(1926년)는 불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출품했던 ”겨울의 오후“는 사전에 판매예약이 되어 그의 작품의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7년 11월 20일 조선미술협회 제2회 양화전람회에서 ”시골의 풍경“ 외 2점을 출품하여 입선을 했다.

1928년 12월 2일 경성제2보통고등학교에서 열린 1회 제2고보양화전에는 야마다 신이치, 사토 구니오등 경성에 미술교사로 근무하는 일본인 교사들이 출품한 작품을 전시했는데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그의 작품이 찬조 출품되었다.

1929년 12월 1일 2회 제2고보양화전에는 경성제2고보 학생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일본인 미술교사들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이 찬조 출품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朝鮮書畫協會가 주최하는 10회 協會展에 ”석류“로 입선을 했다.

1935년 3월 3일 경성사범대학교에 재학 중인 막내 동생 홍우원이 폐결핵으로 사망함에 따라 작품을 그리지 못해 조선미술전람회 14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못했다.

1935년 10월 23일 조선서화협회가 주최하는 14회 협회전에 ”裸女“로 입선을 했다.

1936년 11월 9일 조선서화협회가 주최하는 15회 협회전에 ”풍경“으로 입선을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 15회에 불참한다.

1938년에는 조선일보의 요청으로 구보 박태원의 장편소설 ”우맹“의 삽화 219회를 준비하는 라 조선미술전람회 17회에 출품을 포기하게 된다.

그는 1926년, 1935년, 1936년, 1938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못해 입선을 하지 못했지만 1938년을 제외하고는 타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함에 따라 실제 수상기록은 조선미술전람회 16회 타 기관 미술전람회 5회 등 도합 21회의 미술전람회 입선경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입선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가 대부분이었지만 유학을 다녀오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16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경력을 가진 그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정물화 및 풍경화를 주로 그렸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그림 중에 특이하게 서양화에 동양화로 대나무를 그린 것이 도판으로 확인된다.

그는 1926년 경성제2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교사인 야마다 신이치의 도움을 받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있었지만 집안의 장남이며 한 가정의 아버지인 그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유학을 포기하고 남산의 구 통감부 청사 건물인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에 졸업과 동시에 짧은 기간 근무 후 동아일보 미술부기자로 입사하였으며 노양근의 소년소설 ”열세동무“가 동아일보에 1936년 7월 2일 ~ 8월 26일 까지 45화로 연재될 때 29화 ~ 45화까지의 삽화를 그린 것이 동아일보 디지털 아카이브에 확인됨에 따라 그가 1936년 8월까지는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조선총독부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문교의 조선(”文敎의 朝鮮“) 1927년 5월 은사기념과학관개관호 장정은 그가 그린 것으로 확인되며 이것은 그가 경성제2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근무를 했던 이유도 있지만 그의 도안 실력을 그 당시 일본인들이 인정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하여 8월 29일자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간의 장기정간 후 1937년 6월 3일자로 속간되었지만 그는 1936년 12월 동아일보 광고부를 퇴사하고 1937년 2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으며 1940년 8월 10일 폐간 때 퇴사했다. 1945년 10월 복간 후 재입사해 광고부 차석(1945), 1950년 10월부터 1962년 11월 까지 광고 부장(부장석 근무 포함), 영업국 국차장 겸임(1956), 영업국장대우(1959), 업무국 부국장(1962)을 지내고 1965년 퇴임한다.

조선일보 근무 당시 벽초 홍명희는 1928년부터 10년간 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동생 홍성희는 학예부장을 거쳐 판매부장으로 재직했으며 아들 홍기문은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학예부장으로 근무했다. 홍기문은 그와 같은 풍산 홍씨 종친이고 1903년 同年生이라 매우 가깝게 지냈을 것으로 추측되며, 민족주의 정신을 추구하는 홍명희의 영향을 받아 철저하게 그 역시 민족주의 화풍을 고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4년 설립된 신회화예술협회는 홍우백을 주축으로 경성제2보통고등학교 후배인 정현웅, 조선미술원 동기인 구본웅과 신홍휴, 김경준, 권영준 6명이 설립했고 목적은 연구원을 모집하여 미술교육을 실시하고 전람회를 개최해 미술을 사회에 널리 보급시키고자 했으며 장소는 종로 3정목(현 종로3가) 66번지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연구원을 모집했다.

해방 후 최초 어린이날 기념 "어린이 한글책"(1946.05.01, 윤석중지음, 홍우백그림, 조선아동문화협회발행)을 발행했고 1945년에는 홍명희의 둘째아들 홍기무의 장인인 정인보 선생의 권유로 정진숙이 설립한 乙酉文化史의 회사 로고를 도안했으며 노천명 시인의 수필집 “산딸기”의 책표지 장정을 맡았고 신석정의 시집 “슬픈 목가” 의 장정 및 이태준의 장편소설“별은 창마다”도 장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1954년 신현중의 수필집 “두멧집”과 1941년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의 장정을 했고 1937년 조선일보사 출판부 발행 잡지 “여성” 11월호에 그의 화문이 실려 있다.

1930년~50년대 초 발행된 책표지 장정 및 삽화로 살펴볼 때 경성최고의 장정, 삽화가로 명성이 높아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며 본인이 지은 시 2점(비로봉에서, 삼일포)이 조선일보 자매잡지 “여성(昭和 14년 9월 호)”에 실려 있다. 1939년 “博文” 第11輯(9월호), 第12輯(10월호), 第13輯(12월호), 1940년 신년호, 2월호의 표지 장정을 했으며 월간잡지사 新時代에 전속화가로 근무하며 1941년 8월부터 1942년 8월까지 1년간 조선의 풍경과 자연을 주제로 한 표지장정을 그렸으며 이것은 그 당시 대부분의 표지장정이 전선의 군인이나 노동자등 시국적인 색채를 담은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매우 다른 것으로 그는 조선의 모습 즉 민족주의적 색채를 담고자 노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1954년 “두멧집-신현중” 이후로는 책표지 장정에서 이름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보아 장정, 삽화가로써의 활동은 중단한 것으로 추정되며 개인전 및 전시회의 출품 경력 또한 일체 발견 되지 않고 있어 화가로의 활동도 중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일보사의 “조선뉴스라이브러리”의 “옛 기사검색”창 에서 그를 검색해보면 박태원의 장편소설 “愚氓” (1938년 4월 7일~1939년 2월 24일 219회)이 조선일보사 장편소설로 연재될 때 삽화를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一等作 현덕의 “남생이”(1938년 1월 8일~25일 14회)의 삽화 역시 그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1940년 신춘문예 二等作 김만선의 “홍수”(1940년 1월 10일~27일 7회) 역시 그가 삽화를 그렸으며 1955년~56년 동안 다수의 컷을 그린 것으로 확인된다.

박태원이 1946년 출간한 “중등문범”은 근대독본총서에 포함된 정인승의 “한글독본”과 함께 “부독본총서” 중의 한권으로 해방 이후 중등 교과용 도서를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며 박태원 문장론의 집성이라 할 수 있다. 문인 150여명의 문장이 실린 “중등문범”에 화가로는 유일하게 홍우백 “박.고추” 및 정현웅의 작품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박태원과 홍우백은 절친한 사이였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1938년~1956년까지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며 수백여점의 삽화를 그린 것이 “옛 기사검색”창에서 확인되지만 지금은 조선일보에서 조차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조선일보 인명검색에서 광고부, 업무부에 근무했던 직원으로 검색될 뿐이다. 반면에 동시대에 활약 했던 경성제2보통고등학교(현 경복고등학교) 후배인 정현웅은 조선일보를 빛낸 대표화가로 조선일보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그린 수백 점의 조선일보 삽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에서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러한 이면에는 조선일보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기자들(홍기문, 홍성희, 이여성, 김기림, 백석 등)의 越北, 그리고 신회화예술협회의 설립 회원 6명 중 정현웅, 김경준, 권용준 3명의 월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6.25전쟁 후 극심한 멸공사상 으로 인한 연좌제를 우려하여 부득이 화가로써의 붓을 꺾고 광고 업무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1965년 조선일보사를 퇴직 후에는 洪思百이라는 藝名으로 그림을 그렸고 洪思百 이란 예명이 적힌 정물도(100호 유화)한 점이 발견되어 그의 화풍을 알 수 있으며 조선미술전람회 13회 특선작 “花 金魚”의 도판을 보면 필치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943년 금강산 여행 때 스케치북에 그린 수채화 5점 및 연필 소묘 6점을 유족이 소장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기념으로 "한국근대미술 60년" 전시회가 열렸지만 출품 명단 및 도록에 그의 이름 및 작품이 없는것으로 보아 개관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은것로 추정된다. 당시 목우회(木友會) 회장이며 개관 전시회 서양화 부문 집행위원인 李馬銅은 경성제2보통고등학교(현 경복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야마다신이치(山田新一)가 세운 조선미술원에서 수학한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하는 "한국근대미술 60년"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출품되지 않았다는것은 매우 의아하다.

월북화가의 작품은 출품이 거부되었지만 월북화가가 아닌 그의 작품이 개관 전시회에 출품되지 않은것으로 추정컨데 미술계가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전시회에 초대받지 못한 그는 다음해인 1973년 구상미술작가들의 모임인 목우회가 주최하는 10회 공모전에 홍사백이라는 예명으로 출품하여 특선을 했고 연이어 1974년 공모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한다.

이마동이 회장으로 있는 목우회에 홍사백이라는 예명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전시회가 끝난 후 이듬해 1973~1974년 2회 연속 목우회 공모전에 출품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구상미술작가들의 모임인 목우회 공모전에 의도적으로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유화 작품인 靜物圖 1점(100호 1974년 작)은 당시 일본서양화단을 선도했던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아카데미적 사실주의 화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것은 스승인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가 동경미술학교에서 배웠던 화풍을 사사한 것으로 아카데미적 사실주의 화풍의 궁극적 완성의 美를 보여주고 있다.

정물도의 백자 및 배경의 색감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천재성을 볼 수 있으며 정물도 우측 하단을 보면 "一九七四年 洪思百" 을 세로로 검정색 물감으로 漢子로 적어 놓은것을 볼 때 그가 일제강점기 활약했다는것을 의도적으로 서명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으며 그는 정물도를 통하여 그의 실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80년사”에 실린 기사를 보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흩어졌다가 10월 23일 속간 때 참여한 사원 명단에 그가 광고부장으로 참여한 것이 확인되며 셋째 아들 홍승규가 6.25전쟁 당시 해병대에 입대하여 참전했고 종전 후 2년 뒤에 제대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명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부총리를 역임한 풍산 홍씨 종친인 홍명희 및 홍성희, 홍기문과의 관계 및 조선일보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의 월북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좌익으로 오인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954년 독립운동가, 반공주의자, 시인으로 활동한 신현중의 1954년 수필집 “두멧집”의 장정 및 한국초대 경찰학교 교장을 역임한 함대훈의 “희망의 계절”의 장정이 그의 작품임이 확인됨에 따라 그는 좌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일제강점기 화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고졸 출신인 그가 독학으로 공부하여 16회 受賞(무감사 및 입, 특선)의 기록을 가진 화가는 그와 이인성이 유일하며 이와 같은 놀라운 수상경력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시대 다른 화가 정현웅 13회, 김인승 8회, 박수근 7회, 장욱진 2회와 비교하면 얼마나 뛰어난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 최고 화가의 명성을 얻었지만 6.25전쟁이후 사상과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붓을 꺾어 미술사에서 잊혀져 사라져버린 비운의 천재화가이지만 지난 1988년 월북화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월북화가인 정현웅, 이쾌대, 정종여 등이 재조명 받아 대중들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에 대한 조사는 전무후무한 상태이다.


3. 작품 현황[편집]


2021년 2월 4일 ~ 5월 30일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강점기 문인과 화가와의 관계 책 장정, 삽화 등을 소개하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에 그가 1943년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 스케치북에 그린 수채화 5점과 연필스케치 1점(3남 홍승규 소장), 박태원의 장편연재소설 ”우맹“의 삽화 및 화문, 자작시 등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의 손녀 홍명희(장남 홍승원 딸) 역시 할아버지의 집에서 석류를 그린 작품과 100호 정물도를 본적이 있다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그린 작품이 다수 남아 있을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100호 유화 정물도 1점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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