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환

덤프버전 : r20210301




출생
1895년 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부 부원정 2정목
사망
1929년 9월 20일
뤼순감옥
이명
황일초(黃一樵), 황건(黃鍵)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황덕환은 1895년 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부 부원정 2정목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1916년 10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선편으로 국내로 들어오다가 부산항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송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 판결을 내리면서 출옥했다. #

출옥 후 만주로 도피한 그는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군사위원장 김좌진 휘하에서 문우천(文宇天)의 후임으로 별동대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8월 중동선 해림 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裵斗山)이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면서 신민부의 활동을 방해하는 한편 국내로부터 이주하는 동포들을 핍박하자, 그는 1927년 8월 11일 대원 이영상(李永祥)·최진만(崔晋萬)·채세윤·박병찬(朴秉燦) 등과 함께 해림으로 가 배두산을 총살하였다.

또한 동년 10월 26일에는 다시 하얼빈 조선인민회를 습격하여 해산한다는 서약을 받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1일에는 하얼빈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동부(東部)로 옮기다가 발각되어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1928년 2월 20일 대련(大連)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5월 17일 대련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1929년 제3공장에서 일본인 죄수와 같이 노동하고 있을 때, 그 죄수가 한국인에 대하여 매일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하자 작업용 칼로 찔러 죽였다. 이로 인해 사형언도를 받았고, 1929년 9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황덕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