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음악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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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정규 1집

S.E.S.
(1997.11.24)

정규 2집

Sea & Eugene & Shoo
(1998.11.23)

정규 3집

Love
(1999.10.29)

정규 4집

A letter from Greenland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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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4.5집

Surprise
(2001.07.11)

정규 5집

Choose My Life-U
(2002.02.14)

리믹스 싱글

Remixed
(2002.08.28)

스페셜 5.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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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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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Love [story]
(2016.11.28)

스페셜 20주년 기념

REMEMBER
(20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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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걸그룹 역사의 관점에서 의의
2.1. 최초의 여자 아이돌 그룹
2.2. 걸그룹 전성시대의 주역
2.3. 걸그룹 명칭의 대중화
2.4. 걸그룹 콘셉트의 시초
3. 문화적 현상의 관점에서 의의
3.1. 걸그룹 최초로 데뷔 전부터 팬덤 형성
3.2. 연예계 최초로 누나부대라는 새로운 팬덤의 등장
3.3. 걸그룹 최초 언니부대 등장 :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 팬덤의 등장
3.4. 걸그룹 최초의 떼창 문화
4. 상업적 성과의 관점에서 의의
4.1. 걸그룹 최초로 18년 만에 1위 수상
4.2. 여자 가수 최초로 공식 유료 팬클럽 보유
4.3. 여자 가수 최초로 공식 팬클럽 창단식 개최
5. K-POP 시스템의 관점에서 의의
5.1. 그룹 가수 최초로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어 다국적 군단의 멤버 구성
5.2. 아이돌 그룹 최초로 해외 현지화 활동
5.3. 가수 최초로 송 라이팅 캠프 시도
5.4. 한국 가수 최초로 한국 단독 공연에서 일본어곡 가창
5.5. 아이돌 그룹 최초로 모든 멤버 개인 활동
6. 음악의 질적인 관점에서 의의



1. 개요[편집]


S.E.S.의 음악사적 의의를 정리하는 문서.

2. 걸그룹 역사의 관점에서 의의[편집]



2.1. 최초의 여자 아이돌 그룹[편집]


대한민국 '1세대 걸그룹의 포문을 연 걸그룹'. S.E.S.의 등장은 1세대 걸그룹이라고 분류되는 90년대 걸그룹의 포문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훗날 'K-Pop 걸그룹씬의 토대로 일컬어지며 대한민국 대중 가요 내에서 걸그룹의 역사가 시작 된 등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장이 아니라 4세대 걸그룹까지 거쳐오며 내려온 K-POP 걸그룹 역사에서 S.E.S.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댄스 음악 역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역할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K-POP 걸그룹의 지난 타임라인에서도 S.E.S.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S.E.S. 이전에도 여성으로만 구성된 그룹은 무수히 존재했었지만, 주요 소비자를 10대로 타켓팅하며 데뷔 전부터 대형 기획사가 철저한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컨셉, 음악, 안무, 패션 등을 연구하고 그에 맞는 역량과 스타성을 가진 멤버들을 발굴하고 트레이닝하여 소위 아이돌형 그룹으로서 상품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기획을 거쳤다.

2.2. 걸그룹 전성시대의 주역[편집]



2.3. 걸그룹 명칭의 대중화[편집]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여자로만 구성된 그룹 가수를 통칭하는 용어는 시스터즈, 자매, 듀엣, 트리오, 합창단 등 각 그룹이 지향하는 음악 스타일과 콘셉트에 따라 걸맞게 통칭되었다.

걸그룹이라는 명칭이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된 시기는 1993년 9월 25일 한겨레 신문 보도(문헌)로 보고 있다. S.O.S, 칼리, 와일드 로즈 등의 여성 그룹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는 내용을 다루면서 대중 가요계애 '걸그룹' 선풍이 일어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최종적으로 걸그룹의 황무지인 음악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데 실패하였고, 그렇게 얼마 안 가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걸그룹이라는 명칭도 함께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1997년 11월 28일, S.E.S.가 세상에 등장하였고, 데뷔와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비로소 걸그룹이라는 명칭이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당시 S.E.S.를 필두로 '걸그룹', '소녀그룹', '댄스그룹' 등으로 넓게 통칭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10대 소녀 3명으로 구성된 S.E.S.는 대중에게 걸그룹이라는 명칭을 알리고 이후 걸그룹 전성 시대를 연 주인공인데요.

2014.05.26 채널A '그때 그 사람' 중}}}

걸그룹인 만큼 소녀의 매력을 십분 살렸다.


걸그룹 S.E.S.한국 톱가수들이 잇따라 일본으로 진출, 엔화 획득에 나선다. S.E.S.는 데뷔곡 <I'm Your Girl>로 한국 의 대표적 걸그룹으로 떠오른 스타.


소년 그룹 H.O.T.가 선풍적 인기를 끌자 비슷한 이미지의 젝스키스가 등장하고, 소녀 그룹 S.E.S.에 맞대응하는 핑클이 나오는 등 국내 가요계가 베끼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귀여운 요정의 이미지로 국내 가요계에 '걸그룹(Girl Group)’붐을 일으킨 S.E.S.는 이번 앨범에서 기존의 순수한 이미지에 성숙한 느낌을 더해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걸그룹 S.E.S.한·일 가요시장 동시공략에 들어갔다.



2.4. 걸그룹 콘셉트의 시초[편집]


S.E.S. 등장 이전 여자 가수들은 주로 무거운 주제의 가사를 부르거나, 섹시하고 파워풀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게 주류를 이루었다. 더 올라가면 신세대층을 공략하는 애플이나 S.O.S 등이 있었지만, 가요계의 주류로 진입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들이 주류로 진입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가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본기 즉, 노래의 퀄리티, 안무 등이 남자 가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였기기 때문이다.

S.E.S.는 이런 부족한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하여 청순 컨셉트로 대박을 터트린다. 또한, 당시는 IMF 경제위기 시대 속에서 사회적으로 많이 쳐져있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그런 시대인 만큼 무겁고 섹시한 이미지보다 훨씬 더 다가가기 쉽고 소비하기도 쉬운 청순 콘셉트는 시대적 상황과 제대로 맞물렸던 것이다. 즉, 대한민국 대중 가요 역사상 청순 콘셉트로 정상을 차지한 걸그룹은 S.E.S.가 최초인 셈이다.

S.E.S.가 청순 콘셉트로 대박을 터트린 후 여전사를 자청했던 베이비복스와 보컬 그룹 느낌으로 차별화를 두려했던 핑클은 각각 다음 앨범과 후속곡에서 청순 콘셉트를 차용하여 전작보다 훨씬 큰 흥행을 거둔다. 그리고, S.E.S.가 증명한 청순 콘셉트의 흥행력은 이후 걸그룹 역사에 꾸준히 소환되어 그 힘을 증명한다.

2002년을 끝으로 S.E.S.핑클이 퇴장한 이후, 한국 가요계에서 걸그룹은 한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 그나마 베이비복스가 있긴 했지만, 베이비복스 역시 2004년 7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R&B와 소몰이창법으로 대표되는 발라드가 큰 인기를 얻었던 시기로, 이 시기에 아이돌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쥬얼리, 슈가, 샤크라 등의 걸그룹들이 꾸준히 활동하였으나 활동 텀이 들쑥날쑥 하기도 했고, 전체적인 가요계에 분위기에 밀려 엄청 큰 빛은 보지 못했다. 2005년 SM엔터테인먼트에서 걸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데뷔시켰으나,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게 걸그룹 시장은 반강제적으로 휴지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2세대 걸그룹 소녀시대가 청순 콘셉트로 등장하여 성공을 거두고 단 번에 2세대 대표 걸그룹으로 등극하였다.

2011년, 걸그룹의 콘셉트가 대부분 섹시로 일관되어 있던 시대에 2.5세대 걸그룹 에이핑크가 청순 콘셉트로 등장하여 차별화를 두며 눈도장을 찍고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실제로 에이핑크를 보며 S.E.S.풍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에이핑크의 최고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NoNoNo>는 S.E.S.의 히트곡 <꿈을 모아서>와 굉장히 유사함을 보였는데, 실제로 이 곡을 작곡한 신사동 호랭이는 남성들이 그 당시 첫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자 S.E.S.를 참고하기도 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15년 2세대 걸그룹이 성장하여 어느덧 숙녀가 되었고, 해체나 활동 중단에 돌입하며 본격적으로 세대 교체의 바람이 불며 새로운 걸그룹이 등장할 시기가 돌아왔다. 이때도 역시나 세로운 시대를 열 트렌드 콘셉트로 등장한 것이 청순함이었다. 러블리즈, 여자친구, 오마이걸 등이 세세한 정체성은 달리하지만, 10대 소녀가 낼 수 있는 풋풋함, 청순함이 베이스라는 것은 일괄적인 공통점이다. 특히, 여자친구가 청순함 콘셉트에 함께 녹여낸 칼군무는 '파워청순'으로 불리며 S.E.S.소녀시대를 잇는 느낌이라는 평을 받았다.

2022년, 이제 3세대 걸그룹의 연차가 어느 정도 차고 4세대 걸그룹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새로운 그룹들이 쏟아져 나와 3세대 걸그룹과 4세대 걸그룹이 서로 공존하며 가요시장을 양분해내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해가 되었다. 이 시기 4세대 걸그룹 NewJeans는 주로 걸크러쉬 콘셉트가 주를 이루는 걸그룹 시장에서 10대 소녀 특유의 꾸미지 않은 순수함, 풋풋함, 청순함으로 차별성을 두어 어필하며 데뷔와 동시에 가요계를 석권하였다. 실제로 NewJeans 데뷔 당시, 많은 이들이 S.E.S. 데뷔 당시를 를 보는 듯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1] S.E.S. 멤버인 바다도 주위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어떠한 느낌으로 이런 평이 오가는지 알 거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기사

이렇 듯, S.E.S.가 제시한 청순 콘셉트는 시대를 돌고 돌아 결국 새로운 소녀들의 등장이 다다른 세대교체의 시기가 올 때, 지치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나 음악적 트렌드에서 벗어나 진입장벽이 낮고 누구나 부담 없이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할 때 대두되는 스테디 콘셉트로 자리 잡은 것이다.

즉, S.E.S.는 소녀만이 낼 수 있는 풋풋하고 순수한 매력을 최대치로 이끌어 내어 청순 콘셉트를 가요계의 스테디 콘셉트로 정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래퍼런스가 반복될 때마다 그 흐름에서 S.E.S.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릴 것이고, 후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향수를 향유하며, 그 사이에서 S.E.S.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 내지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로 군림한다는 것이다.

3. 문화적 현상의 관점에서 의의[편집]



3.1. 걸그룹 최초로 데뷔 전부터 팬덤 형성[편집]


S.E.S.는 대한민국 대중 가요 역사상 데뷔 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다.

당시 10대들의 우상으로 떠오르며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H.O.T.를 배출한 SM엔터테인먼트에서 곧 데뷔할 여동생 그룹이라는 점이 데뷔 전부터 큰 주목을 끌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 전인 PC 통신 시대에 통신을 토대로 이러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자연스럽게 이 말은 오프라인까지 돌게 되어 S.E.S.의 존재를 알고 있는 팬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 멋진 H.O.T. 소속사에서 나온다는 여동생 그룹은 대체 얼마나 대단할까?'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셈이다.

한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 전 연습생 시절부터 많은 주목도를 가지고 좀 더 유리한 첫 시작을 끊은 마케팅 사례라고 할 수 있다.

S.E.S.도 데뷔 초 자신들의 폭발적인 인기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 이유 중 하나로 H.O.T.와 같은 소속사 출신으로 입소문을 탄 것도 있는 거 같다고 밝혔다.


3.2. 연예계 최초로 누나부대라는 새로운 팬덤의 등장[편집]


S.E.S.의 등장은 남자 가수의 인기에 가려져 철저히 비주류로만 취급 받았던 걸그룹이 주류로 격상되어 남자 가수와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대중 음악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음악 시장의 소비파워를 쥐고 있었던 소위 '오빠부대라' 불렸던 남자 가수를 지지하는 여성 팬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S.E.S.의 등장으로 대한민국 대중 가요사에 누나부대라는 신조어가 탄생'하며, 남자도 음악 시장에서 충성도 있는 소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주류 계층으로 격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가요 프로나 쇼프로 MC들이 S.E.S.를 보기 위해 방송국에 떼를 지어 몰려든 남학생 팬들을 보며 전에 보기 힘든 광경이라며 놀라는 모습들이 줄곧 포착되는 게 일수였다.

`누나부대' 창조한 `느낌세대'…재미·재일교포 출신.


'누나부대'란 신조어를 처음 만들게 한 S.E.S.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드림 컴스 트루>로 이미 음반 판매와 가요 인기 순위의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을 넘나들며 강행군을 하고 있는 3명의 미인 군단을 향한 '누나부대'의 향배도 관심거리다.


'누나부대', 그거 진짜인가. '오빠부대'라는 말은 있어도 '누나부대'라는 말이 대한민국에 있었던가'. 그러나, 이건 실제 상황이다. ''S.E.S. 누나'를 쓴 플랜카드가 방송국에 뜨고, 박박머리 남학생들이 스튜디오 앞자리를 다툰다'.

파일:SES_Magazine_1st_noonaboodae1.jpg (데뷔 당시 잡지 기사 중 잡지명 미상 224 페이지) }}}

새로운 사회현상이 나타낼 때는 이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S.E.S.를 우상처럼 섬기는 남성팬 층이 형성되면서 누나부대라는 호칭이 인구에 서서히 회자될 즈음이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S.E.S.MBC의 쇼 프로그램을 녹화하려고 가수 대기실에서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국집 철가방을 든 남자 한 명이 대기실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가방 안에는 중화요리 대신 세 명의 소녀에게 줄 갖가지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S.E.S.로부터 직접 사인을 받으려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변방하고는 방송국 안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정성이 정말로 대단했던 것은 배달원으로 위장한 문제의 남성팬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철가방 소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S.E.S.가 무대에 설 때마다 주로 남학생들과 군인들로 구성된 팬클럽 회원들이 '우리들의 천사, S.E.S.'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세 멤버들의 이름을 사자후를 연상시키는 우렁찬 목소리로 환호했다. '누나부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1998년 5월, S.E.S.의 공식 팬클럽인 '친구'의 창단식이 스타월드 주관으로 세종대학교에서 거행됐다. 약 2,500여 명[2]의 팬들이 모였는데 이들 가운데 90% 가량이 남학생들이었다. 회장단에도 8명 중 6명을 남자들이 채웠다. 이날의 행사는 걸그룹에 대한 남성들의 지지와 응원이 가요계의 인기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다. S.E.S. 멤버들은 이날의 창단식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너무 놀랐어요.", "상상이 안 가요.", "정말 감사합니다."

S.E.S.의 팬클럽 창단식은 이수만의 선견지명이 다시 한번 적중했음을 증명하는 뜻 깊은 이벤트가 되었다.

이수만 평전 2012.12.24 출간 }}}

3.3. 걸그룹 최초 언니부대 등장 :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 팬덤의 등장[편집]


S.E.S.의 팬층은 누나부대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주요 타겟팅이 남자걸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언니부대라고 일컬어 질 만큼 여자 팬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은 그룹'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이돌 문화가 태동기를 거쳐 점차 성숙한 팬덤 문화로 개선되어 가고 있어서 여자걸그룹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많이 개선 되었지만, 그 당시에 소녀 팬들에게 걸그룹의 존재란 자신들이 좋아하는 보이그룹 오빠와 혹시 두터운 관계로 발전될 수 있는 경계 대상이라는 팬 문화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다. 물론 S.E.S.도 데뷔 당시 보이그룹 H.O.T. 젝스키스, NRG 멤버들과 열애설이 돌아 그들의 팬들로부터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들이 반대 세력으로 군림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자 팬들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데뷔 초의 양상과 다르게, S.E.S.를 지지하는 팬덤의 남녀 성비가 6:4 정도로 걸그룹 팬덤에게는 이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비를 보이며, 당시에도 걸그룹인데도 불구하고 여자 팬들도 참 많이 보유한 그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공개 방송에 모인 팬들을 보면 여성 팬들의 모습이 다수 잡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심지어 S.E.S.를 보며 오열하는 여자 팬들의 모습이 잡힐 정도였다. 당시 S.E.S.가 여자팬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멤버 유진은 한 방송 인터뷰[3]에서 자신들은 걸그룹인데도 불구하고 여자팬들도 많았던 그룹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을 정도다.

걸그룹이라는 한계와 당시 걸그룹을 대하는 소녀 팬들의 미성숙한 문화가 만연하던 시기, S.E.S.가 어떤 셀링 포인트로 이례적인 여자팬들의 지지를 받았는 지는 몇 가지 사례로 풀이된다.

S.E.S.가 보여준 고급스럽고, 사랑스러운 컨셉과 실력과 멋진 무대매너까지 겸비하였음은 물론 여기에 S.E.S.가 노래하는 화자는 대부분 여성으로서의 능동적이고 희망적인 면모를 강조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마디로, 남성들에게는 꿈에서 나마 한 번이라도 사귀고 싶은 로망 같은 존재로, 여성들에게는 저렇게 되고 싶다는 워너비 같은 존재로 성별은 다르지만 각기 다른 양상으로 우상이 된 것이다.


3.4. 걸그룹 최초의 떼창 문화[편집]


대형 공연장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합동 콘서트에서 걸그룹 무대에도 가수의 이름과 가사를 따라 부르는 현상 일명 '떼창' 문화가 시작된 것도 S.E.S.가 최초였다.

S.E.S.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규모 합동 콘서트에서 걸그룹의 무대에 이러한 환호성이 터져나온 사례가 없었다. 공연장의 관객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S.E.S.를 외치는 함성과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함성 소리는 TV 화면을 뚫고 나올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이후, 원더걸스, 소녀시대, 에이핑크, 여자친구걸그룹 무대에서 떼창이 터져나오는 건 흔하게 볼 수 있는 하나의 공연 문화로 자리잡았다.


1998년 스피드 콘서트 <Oh, My Love> 무대 }}}


1998년 SBS 가요대전 <Dreams Come True> 무대 }}}

4. 상업적 성과의 관점에서 의의[편집]



4.1. 걸그룹 최초로 18년 만에 1위 수상[편집]




4.2. 여자 가수 최초로 공식 유료 팬클럽 보유[편집]




4.3. 여자 가수 최초로 공식 팬클럽 창단식 개최[편집]



5. K-POP 시스템의 관점에서 의의[편집]



5.1. 그룹 가수 최초로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어 다국적 군단의 멤버 구성[편집]


SM엔터테인먼트S.E.S.기획 단계 때부터 한국을 넘어서 일본, 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걸그룹이라는 청사진을 그리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지금보다 반일감정이 더 심했을 때며, 서양인은 외모적으로 아시아인과 많은 이질감이 있기에, 다른 국적의 멤버를 포진시키는 대신 그 나라의 문화권에서 다진 오랜 생활로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한국인 멤버를 포진시켜 이 점을 완벽하게 상쇄시키는 것과 동시에 한국과 세계에서도 어필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절충안인 셈이었다.

이러한 전략하에, 일본 문화에 익숙하고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재일교포 출신 슈와, 영어가 가능한 재미교포 출신 유진을 팀에 포진시켰다. S.E.S.는 데뷔 때부터 각종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기획 초기 때부터 세계적인 진출을 토대로 염두에 둔 그룹이라는 점과 3개 국어를 선보이며 다국적 군단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다.

당시 한국 음악시장은 원래도 한계가 명백한 시장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 IMF 경제위기 상황으로 음악시장도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수만 프로듀서는 재빠르게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해외로 눈을 돌린 선구안을 발휘한 것이다. S.E.S.가 이러한 비지니스 모델을 제시한 후 일본인중국인이 포진된 다국적 걸그룹 써클이 등장하였고, 걸그룹 투야도 기획 초기부터 일본 진출을 목표로 일본에서 데뷔를 먼저 갖고, 재미교포 및 재일교포 출신의 멤버가 포진된 걸그룹이 늘어나는 등 걸그룹계에서 다국적화, 세계화 바람은 가속이 붙었다.

그리고, 현재 K-POP 걸그룹에서 이러한 다국적 군단이 포진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S.E.S.가 제시한 기획 초기부터 해외 진출을 함께 목표로 런칭 된 다국적 걸그룹이라는 비지니스 모델은 시대를 앞서간 K-POP의 원형이다.

5.2. 아이돌 그룹 최초로 해외 현지화 활동[편집]


당시 1세대 수많은 남여 아이돌 그룹들을 모두 통틀어 해외 현지에 진출하여 현지의 소속사와 계약하고, 현지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고 그 곡을 현지의 언어로 부르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철저히 현지의 색을 입고 현지 활동을 한 유일한 그룹'이다.[4] [* 당시 H.O.T, NRG, 베이비복스 또한 중화권 내에서 활동했지만 현지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아 그 곡을 중국어로 발매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중국어 곡을 발매한 경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 작곡가로부터 받은 곡을 번안해서 발매하는 정도로만 그쳤다.) S.E.S.는 또한, '대만에도 진출하여 당시 대만 자국내 걸그룹도 따라오지 못 하는 인기'를 누렸으며, 중국 내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5] 명실공히 한국-일본-대만-중국을 오고가며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걸그룹의 자리에 올랐다.

S.E.S.의 이런 범아시적 인기를 입증하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일본, 대만 세 국가에서 공식 팬클럽을 보유한 그룹이었다는 것이다.[6]

이수만이 이 시기 S.E.S.의 일본 활동을 통해서 얻어낸 전략을 후배 가수인 보아, 동방신기 등에 그대로 적용시켰고 이들 역시 일본에서 큰 성공을 맛보게 된다. 즉 케이팝의 해외진출의 시초는 S.E.S.가 닦았다고 할 수 있다.

5.3. 가수 최초로 송 라이팅 캠프 시도[편집]


최초 외국,국내 작곡가의 협업곡: 송캠프의 시초.
1998년 11월 23일 발매한 정규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는 핀란드 작곡가 Risto(리스토)가 만든 원곡의 판권을 사와서 국내 정서에 맞게 가공 한 후, 원곡에 없는 유진과 슈의 스캣랩 부분은 유영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한국 가수로서 최초로 시도하는 형식이었다.

이후 2002년 2월 14일 발매한 정규 5집 타이틀곡 U는 스웨덴 작곡가 Nick Manic(닉 마닉)과 Keith Beauvois(키스 보보아)가 만든 곡을 이수만 프로듀서가 현지에서 사온 후 황성제 작곡가와 박창현 작곡가가 편곡한 곡이다.

이러한 시도는 음악적 한계가 분명한 한국 시장을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 음악 장르의 다양성을 확대한 사례로 후에 이러한 방식은 SM엔터테인먼트가 주도한 송캠프 시스템의 시초가 됐으며, 다른 기획사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K-POP이 서구권에서도 서 이질감 없이 어필될 수 있는 요소에도 큰 몫을 한 요소이기도 하다.

1998년 K-POP이라는 용어조차 생기기 이전 S.E.S.의 시대를 앞서나가는 이러한 시도는 K-POP 시스템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렇게 낯선 외국곡을 사서 국내 정서에 맞게 가공한 뒤 공동작곡으로 발표하는 것은 일본에선 고무로 데츠야 등 인기 프로듀서들의 단골 기법. 하나 국내에선 S.E.S가 처음이어서 가요계의 관심을 모으고있다. ‘}}}


국내 아이돌 가수들이 외국 작곡가의 곡을 받아 음반으로 발표한 첫 사례는 16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S.E.S.가 1998년 발표한 2집 앨범의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를 비롯해 수록곡 3곡이 핀란드 작곡가 리스토가 만든 것이었다.


해외에 케이팝이 먹힌 것은 이미 세계 표준에 근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SM이 도입한 국제협업 시스템을 통해서다. SM은 1998년 S.E.S. 2집에 핀란드 작곡가의 곡을 삽입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 작곡가를 발굴해 음악 제작을 함께 했다.


SMS.E.S.는 아이돌 가수 중 최초로 외국 작곡가의 곡으로 음반을 발표한 가수가 됐다. 1998년 2집 앨범의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는 핀란드 작곡가로부터 나왔다. S.E.S.는 이 노래로 최고의 '걸그룹'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현재, K팝 아티스트와 작업하는 외국 작곡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거의 모든 엔터사가 'A&R 팀'을 조직한다. 업계 표준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 시스템의 선봉에 선 곳은 SM엔터테인먼트다. SM엔터테인먼트는 1998년 S.E.S의 정규 2집 앨범 타이틀 곡 <Dreams Come True>를 핀란드 작곡가 리스토에게 받았다. }}}


돌아보면 SM은 늘 먼저였다. 기획의 중심에는 늘 이수만이 있었다. S.E.S.를 통해 글로벌 A&R과 송 캠프 문화를 한국에 도입했다.

다시 만난 아이돌의 세계 아카이브 (2021.08.06 GQ코리아) }}}


5.4. 한국 가수 최초로 한국 단독 공연에서 일본어곡 가창[편집]



5.5. 아이돌 그룹 최초로 모든 멤버 개인 활동[편집]


1세대 아이돌 시대만 하더라도 그룹 활동을 벗어나 개인 활동을 펼치는 일은 팀을 배신한다는 이미지가 강하여 금기시 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한 마디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라는 집단주의 인식이 전체적으로 팽팽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기를 깨고 아이돌 그룹 모든 멤버가 개인 활동에 돌입하는 일명 '따로 또 같이' 활동 전략을 최초로 제시한 것도 S.E.S.였다. 당시 이러한 개인 활동 프로모션은 일본 SMAP 등의 그룹에서 시도되는 것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2001년 유진은 MBC 설날 특집극 주연 및 단독 패션 잡지 화보 촬영, 바다는 문명진 뮤직 비디오 주연, 는 한일 합작 뮤지컬 주연 등의 행보를 보였으며 이러한 개인 활동 행보는 마지막 계약 시기인 2002년부터 더욱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SBS 예능 토요일이 온다에서 진행자와 배우로, SBS 단막극 남과 여-해피 버스데이와 KBS2 미니시리즈 러빙유에서 주연 배우로 전향했다. 바다는 가수 의 피쳐링에 참여하며 솔로 가수로서의 행보를 차츰 준비하고 있었으며, 는 2001년부터 이어진 한일합작 뮤지컬 동아비련의 주연 배우와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 및 고정 패널로 나섰다.

S.E.S.가 선보인 '따로 또 개인 활동' 전략은 이제 아이돌 그룹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룹의 마케팅 전략으로 자리잡았다.


6. 음악의 질적인 관점에서 의의[편집]


S.E.S.는 1990년대 후반 당시 국내에서 시도되지 않은 혁신적인 음악적 장르로 한 시대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한 마디로 시대를 앞서나갔다고 할 수 있다.

S.E.S..는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성별과 특정 범위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나의 가수만으로 놓고 볼 때도 대한민국 대중 가요사에 큰 이바지를 한 존재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최초였고 최고였다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S.E.S.라는 이름이 더 빛을 발하는 건 그들이 남긴 음악적 행보에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가수의 본분은 노래를 남기는 것이 근본적인 태생이다.

당시 K-POP이라는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고, 한국 가요는 전형적인 한국형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속에서 S.E.S.는 세계 최고의 음악시장인 미국 팝시장에서 대세를 타고 있는 음악을 받아 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실제로 뉴잭스윙 장르의 데뷔 타이틀곡 I'm Your Girl과 3집 타이틀곡 Love는 힙합 리듬을 걸그룹이라는 특성에 맞게 절묘하게 녹아내어 당시에도 음악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들어서도 그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이 빛을 발한다.

한국 가수 최초로 시도한 유로팝 장르의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는 당시 한국 음악시장에서 처음 시도되는 생소한 장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정서와 세 멤버들의 화음이 잘 어우러져 단숨에 히트하였다.

음악적인 성장의 최고조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4집 활동에서 Be Natural로 후속곡 활동을 펼쳤다. Be Natural은 전형적인 힙합 그루브에 사라본의 보컬 멜로디가 가미된 곡으로써, 한국 가수 최초로 시도한 Jazzy-Hop 장르 곡이다. 외국에서는 로렌 힐이나 에릭 베넷 등 아이돌과 재즈풍의 합은 그 당시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충격적인 시도였고, 지금도 사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조합이다. '아이돌 아니 감히 아이돌 따위가 무슨 재즈풍 음악을? 그게 가능하겠어?'라는 의심 어린 시선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도 잠시 S.E.S.일본 활동에서 갈고닦은 라이브 실력을 바탕으로 그 편견을 당당하게 깨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1] 참고로 뉴진스 멤버들은 S.E.S.가 활동할 때 태어나지 않았다.[2] 책에 나와 있는 내용에 틀린 부분이 있어서 수정되었다. 책에는 1,200여 명이라고 나와있는데, 그 당시 팬클럽 회계 보고서나 당시 팬들의 입장한 규모를 보면 2,500여 명 정도의 팬들이 집결하였다.[3] 2009년 12월 29일 tvN Enews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4] 심지어 일본어로 곡을 발표하는 K-Pop 아이돌 그룹이 한국이 출신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가사의 일부는 한국어로 넣는 것 또한 S.E.S.가 진출 당시 시도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いつまでもオンジェ·カジナ(이츠마데모 언제까지나)다. [5] 실제로 2016년 개최 된 데뷔 20주년 기념 단독 콘서트에는 일본-중국-대만에서 온 팬들이 다 있을 정도였다.[6] 일본은 당시 현지 소속사인 스카이 플래닝에서 모집한 HaNa이며, 대만에서는 실제로 팬클럽 창단식을 기념한 대규모 단독 팬미팅도 두 번이나 개최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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