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기무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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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은 조선 말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된 정1품아문 관청이다. 당시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고하여 설치하였다.
2. 상세[편집]
2.1. 설치 이전[편집]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던 시기의 국제 정세는 날이 다르게 변화해가고 있었다. 조선 역시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고 수신사를 파견하는 등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에서 본격적인 개화의 흐름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에 맞추어 변화를 이끌고 근대적 내정 사무를 관장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정확한 설치 날짜는 1880년(고종 17) 12월 21일#이다. 참고로 고종이 외교와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아문의 설치를 명한 것은 같은 해 12월 5일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삼군부는 결국 1882년(고종 19) 6월경 완전히 폐지된다.
2.2. 구성[2][편집]
- 사대사(事大司): 사대문서와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업무
- 교린사(交隣司): 외교 업무
- 군무사(軍務司):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솔
- 변정사(邊政司): 변방의 사무와 외국의 정보와 관련된 업무
- 통상사(通商司): 통상을 담당
- 군물사(軍物司): 병기 제조
- 기계사(機械司): 기계 제조
- 선함사(船艦司): 각종 선박의 제조와 통솔
- 기연사(譏沿司): 포구에 왕래하는 선박의 순시
- 어학사(語學司): 번역 관련 업무
- 전선사(典選司): 인재 선발 업무
2.3. 역할[편집]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서 군국기무란 국가의 군사 업무와 일반 국정#을 뜻한다. 즉 통리기무아문은 당시 조선의 정치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통리기무아문은 대신(大臣) 중에서 총리(總理)를 마련하고 통제하거나 정무를 보는 것을 의정부와 같게 할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였다.
3. 폐지[편집]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개화정책을 뒤엎는 와중에 폐지되었고 삼군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삼군부는 동년 12월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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