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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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南仁樹 | Nam I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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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강문수 (姜文秀)
출생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군
사망1962년 6월 26일 (향년 43세)[1]
서울특별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배우자김은하
가족자형 손홍팔 (법조인)
종교불교
데뷔1935년 '눈물의 해협'

1. 개요
2. 생애
3. 대표곡
4. 여담
4.1. 친일 논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서정가요의 황제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 소개 문구


일제강점기 후기와 한국전쟁 전후를 풍미한 대중가요 가수.


2. 생애[편집]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강문수(姜文秀)이다.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2]를 통해 확인된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11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남인수의 친모 장하방은 처음 최씨 집안(진주시 미천면 미곡리)으로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사망으로 진주 하촌동 드무실에 사는 강영태의 소실로 들어가 낳은 아이가 강문수(예명 남인수)이다.[3]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인수의 가족은 미국에 살고있는데 그간 진주의 강씨집안과는 교류가 없었다. 이는 남인수의 어린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강씨집안에서는 추정한다. 현재 진주 강씨집안과 남인수 전승 보전회에서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강씨집안 묘지에 남인수의 묘를 이장하여 단장하고 관리하고 있다[4].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3997http://www.kny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9 남인수 묘소 근처에 진주시에서 설치한 작은 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이름이 '문수정'이다.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36년 김상화[5]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그리고 이 곡은 토도로키 유키코가 <哀愁のセレナーデ>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가사를 붙여 불렀고 1940년에 남인수와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 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3. 대표곡[편집]




4. 여담[편집]


  • 남인수의 부인은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용환의 3녀 김은하이다. 김은하는 16세에 일본으로 가서 아크로바틱을 배웠다. 귀국무대에서 대중가수로 인기가도를 달리던 남인수를 만났고 연애 끝에 결혼했다. 김은하는 무용의 길을 포기하고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아내와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남인수의 그늘에서 내조의 길을 걸었다. 남인수와 동료 가수 이난영의 불륜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어도 김은하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이난영과 동거하던 남인수는 임종직전 김은하를 불러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자녀들을 잘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남인수가 사망한 후, 김은하는 재혼하지 않고 4남매를 키웠으며(남인수 사망 시 김은하는 37세 정도였다.) 5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남인수의 사십구재 때 KBS 초청으로 장남과 함께 내한하여<가요무대>에 출연했다.[6]

  • 사망 전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7]

  • 사진에 관해서도 유명한데,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한 모든 남인수 앨범의 커버가 전부 똑같은 사진이다. 이유는 불명이다.

  • 친일 가요 이천오백만 감격에서 3절을 일본어로 부르는데, 상당히 일본어 실력이 뛰어난지 발음이 꽤 좋다. 유성음과 무성음 구분이 확실하다.

  • 공연 후 앙코르곡으로 <희망의 나라로>를 주로 불렀다고 한다.


4.1. 친일 논란[편집]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이천오백만 감격〉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취입함으로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것이 자발적으로 부른 것인지 강압에 의해 부르게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친일 경력 때문에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 된 남인수 가요제 개최에 관한 것을 어떤 시민 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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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핵으로 사망했다.[2] 진주 강씨집안에서 봉래초등학교 학적부를 통해 확인하였다[3] 진주 강씨문중에서 남인수의 출생관련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최씨집안 대종회를 방문하여 확인한 사실이다. 최씨집안에서는 남인수의 출생 관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최씨문중의 족보에는 장하방의 첫 남편과의 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4] 남인수의 묘를 이장할 당시에 강씨집안은 미국에 거주하는 남인수 가족의 허락을 얻었다.[5] 배우 김자옥의 아버지이며 눈물의 해협을 발표할 당시 9살이었다. 눈물의 해협을 비롯한 자작시들을 학교 문집에 발표해 시인으로 일찍 데뷔했다.[6] 김은하가 남인수와 이혼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7] 다만, 생가의 경우, 후술한 친일 논란과 더불어 생가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이유로 인해서 2013년도에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