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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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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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정익공(貞翼公)
이완
李浣
출생1602년(선조 35)
사망1674년(현종 15)
시호정익(貞翼)
본관경주 이씨
징지(澄之)
매죽헌(梅竹軒)
부모부친 - 이수일(李守一, 1554 ~ 1632)
모친 - 전주 이씨 이기연(李竒姸, 1563 ~ ?)[1]
형제자매
3남 4녀 중 3남 [ 펼치기 · 접기 ]
(출처_선원록 #)
형 - 이정(李淀, 1589 ~ 1668)
형 - 이용(李溶, 1597 ~ ?)
남매 - 화순 최씨 최휘(崔椲)의 처(1602 ~ ?)
남매 - 청주 한씨 한필후(韓必厚)의 처
남매 - 채계주(蔡繼周)의 처
남매 - 전주 이씨 이시해(李時楷)의 처
부인서산 정씨 - 정민구(鄭民求)의 딸
자녀서장남 - 이인준(李仁俊)
서차남 - 이인척(李仁倜)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겸 무신. 훈련대장, 어영대장, 수어사, 포도대장, 한성부판윤, 병조·형조·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효종북벌(北伐)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로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아버지 이수일(李守一)[2]임진왜란인조반정, 이괄의 난에 활약한 잔뼈가 굵은 무인으로,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완은 1624년(인조 2) 증광시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고 부친의 뒤를 이어 무관직에 나아갔다.

1627년(인조 5)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정방산성 등 여러 곳에서 분전했으며,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승지를 지냈다. 1644년(인조 22)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이후 포도대장을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효종의 군사력 증강 정책에서 어영대장을 맡아 병제와 군비를 재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을 다스리기 위해 포도대장을 거듭 맡았다. 1653년(효종 4)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훈척(勳戚)만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훈련도감의 대장, 즉 훈련대장에 임명되었고 현종 대에 걸치도록 16년 동안 직책을 유지하였다.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문관직에도 두루 중용되었고 훈련 대장을 겸하였으며 때로 포도대장까지 겸하였다. 1666년(현종 7) 8월에는 판의금부사에 올랐고, 그 해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고 또한 병조와 훈련도감을 겸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두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가지 않고 훈련대장으로만 있었다. 1669년(현종 10)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을 계속 사양하였으나, 1671년(현종 12) 수어사를 거쳐, 1674년(현종 15) 우의정이 내려졌고, 그해 사망했다. 사후 정익(貞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석 달 후 현종도 사망하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효종과 현종 두 부자와 함께 한 인물이다.

3. 여담[편집]


  • 이완은 조선시대에 단 7명뿐인 무과 출신 정승이다. 차례대로 우의정 조영무(1338~1414), 좌의정 최윤덕(1376~1445), 좌의정 홍달손(1415~1472), 영의정 박원종(1467~1510), 영의정 신경진(1575~1643), 좌의정 구인후(1578~1658), 우의정 이완(1602~1674) 등이다.

  • 이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을 11번 역임하여 이언강(李彦綱, 1648~1716)[3]과 함께 최다 역임 기록을 갖고 있다. 총 재임기간은 7년 6개월~10년 4개월[4]로 추정되어 이석형(李石亨, 1415~1477)[5]최장 재임 기록을 다툰다. 이석형의 총 재임기간은 7년 4개월~8년 5개월[6]로 추정된다.

  • 뭔가 사람됨이 특이했는지 야사에 이완의 기행과 재치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라면 산적 두목을 부하로 영입했다는 이야기. 이완이 젊었을 적 사냥을 갔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멀리 불빛이 보여 가보니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떡하니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한 여인이 있어 "여기는 산적 소굴이고 자신은 잡혀온 여자인데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며 이완을 내쫒았다. 하지만 이완은 배가 고프다며 밥을 얻어먹고 배부르니 졸리다고 그대로 누워 자는 게 아닌가. 곧이어 산적 두목이 들이닥쳐 태평스레 자고 있는 이완을 보자 기가 차서 밧줄로 묶고 칼로 위협했으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완의 배짱에 놀란 두목은 이완을 풀어주고 큰절을 올리면서 두목이 말하길 "젊어서 점을 봤는데 포도대장에게 잡혀 참수당한다는 예언이었다. 지금 행동으로 보건데 이완이 미래의 포도대장감이니 훗날 자신이 죄를 짓고 잡히면 살려달라"는 약조를 받아냈다. 이완이 포도대장을 역임할 때에 한 부하가 큰 도적을 잡아들여 이완에게 보고하기를 "죄가 많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놈이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포도대장을 뵙겠다고 합니다." 그가 만나보니 젊었을 적에 안면이 있었던 자라 약속을 지켜 특별히 사면하고 그의 용력을 높이 사 자신의 부하로 삼는다.

  • 이완이 젊은 시절 사기꾼에 속아 한겨울에 옷을 빼앗기고 홀딱 젖은 채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한 집 사랑방에 들어가 안주인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밥을 얻어먹고 옷을 빌려 자신의 집마냥 잠을 청하니 안주인이 참다못해 따끔히 꾸짖었다. 안주인의 말에 이완도 부끄러워 나가려던 찰나 바깥 양반이 들어와 숨어버렸다. 바깥 양반은 방 안이 어지럽혀져 있자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웃으며 오히려 이완을 가엽게 여겼다. 몰래 듣고 있던 이완은 그대로 엎드려 절하며 집주인 부부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고 성명을 물었으나 "언젠가 연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며 넘겼다. 수십 년 후 조정에 출사한 이완이 이 때 일을 끄집어내자 그 자리에 동석했던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길 "그 때 그 집주인은 자신이었고 불청객이 바로 이완이었느냐"며 웃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이완이 "어려울 때의 은혜를 어찌 잊겠냐"며 정태화를 극진히 모셨다.

  • 밤중에 효종의 호출을 받은 이완이 에 들어서자 화살들이 날아왔는데 태연히 효종의 대전까지 들어갔으며 대전으로 들어선 이완에게 효종이 "안 놀랐냐"고 묻자 철릭 속에 갑옷을 입고 있어서 효종이 이완의 대범함과 철저함에 탄복한다. 실제로도 포도대장이 직접 먹이를 줄 만큼의 솔선수범형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이완이 바로 이 사람인데 <허생전>에서는 허생이 내놓는 치국책에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발뺌하다가 허생이 화를 내며 을 뽑아들자 줄행랑을 치는 굴욕을 당한다. 하지만 이인이 있다는 변씨의 말을 듣고 허생의 집에 직접 찾아가거나 허생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기 위해 집에 다시 찾아간다는 점에서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은연 중에 나타내기도 했다.[7]


4. 대중매체[편집]





  • 시인 김지하의 시 오적에서 한 행[8]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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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귀년(李貴年)의 3녀로, 선성군의 고손녀. #[2] 1554년(명종 9) ~ 1632년(인조 10).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였기에, 이완은 이항복처럼 늦둥이로 태어난 셈이다. 이완이 태어났을 당시 부친 이수일의 나이는 만 47~48세로 요즘에도 이 나이에 자식을 얻으면 늦둥이 소리를 듣는다. 하물며 혼인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이른 조선시대에 47~48세에 자식을 얻었다면 항렬만 자식이지 손자뻘에 가깝다.[3] 숙종 때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4] 중간에 한성부판윤으로 있던 김광욱(金光煜), 윤강(尹絳), 허적(許積)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완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김광욱, 윤강, 허적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10년 4개월에 이를 수 있다.[5] 세조 때 판중추부사를 역임.[6] 중간에 한성부윤으로 있던 이서(李墅)와 윤자(尹慈)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석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이서와 윤자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8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7] 시대상 다른 사람이었다면 허생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포졸을 보냈을 것이라 묘사했을 것.[8] 우뢰 같은 저 함성 범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 재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