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태자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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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93oouchi.jpg
일본 콘피라산(金比羅山) 신사[1]에 소장되어 있는 임성태자의 상.

1. 개요
2. 행적
3. 실존 인물인가?
4. 여담

○抑先祖ハ百濟國ノ始祖都慕大王ニ始マリ其第拾參代威德王第三王子琳聖太子推古天皇之十九年日本ニ移リ山陽八箇國ヲ賜ハリ子孫相嗣ギ(…)

높으신 선조는 백제국의 시조 도모대왕에서 시작하여 그 13대 위덕왕 제3왕자 임성태자(이다.)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에 옮겨 와 산양 8개 나라를 주어 자손이 서로 대물림하고(…)

오우치-타타라씨 족보》


1. 개요[편집]


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大內)씨와 토요타(豊田)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2]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2. 행적[편집]


위덕왕 붕어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3](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 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3. 실존 인물인가?[편집]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수백년이 지난 14세기 말, 일본의 기록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창작 인물이거나 원형을 잃은 기록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타타라'라는 성씨 자체는 이미 9세기경 나라 시대목간에서 확인된다. 《신찬성씨록》에서도 등장하긴 하는데 가야계 가문으로 나오고, 시조의 이름이 거등이다.

서일본의 다이묘였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사신을 보낸 예가 많다. 오우치 가문의 당주가 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는 자신이 백제 부여씨 왕가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받으려고 시도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오우치씨가 백제 왕가의 후손이라는 점은 인정했고 상당히 우호적 교류가 많았다.[4] 다만 무역 특권 획득은 결국 성공하진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종 1년(1399)에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며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그가 '충청도에 있는 조상님들의 영지를 주세요'와 '《팔만대장경》판도 덤으로 같이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여서 조선 대신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5] 세종 때도 조상들의 백제 땅을 달라고 다시 청했는데 이 때는 땅 300결(結)을 주자고 구체적인 논의까지 있었으나 결국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단종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몇 번 거절당해서인지 이때는 "계보만 적어주시면 영지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로 일종의 봉건체제하에 있었던 당대의 일본인과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당시 조선인의 인식차가 극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담으로 오우치 가문은 1557년 32대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가 또다른 다이묘이자 한땐 산하에 있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패배해 자결하면서 멸망했으나[6] 방계 혈통이 간간히 내려오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이름이 비슷한 '임정태자'(臨政太子)로 나온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대부가 되어 '오우치도노'라 불리며 그 후손이 47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만 실제 오우치씨는 31대인 오우치 요시타카때 멸망했다.[7] 종손 가문은 31대에서 전멸했지만, 분가의 자손들이 토요타씨로 성을 바꿔서 살아남았다.[8] 그밖에 임성태자 사후부터 1400년대까지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방계들이 존재했다. 스에 하루카타로 유명한 스에씨도 오우치씨의 방계였다.

사실 당시 다이묘 가문들은 멋대로 일본의 주요 명문가 '우지'(씨)를 참칭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오우치 가문이 다른 다이묘 가문들과 같이 겐지, 헤이케, 후지와라시 기타 등의 흔한 '우지'(氏)를 택하지 않고, 대체로 드문 백제계 조상인 '타타라'(多々良)를 택한 것은 경제, 정치적인 이유가 다분히 있다고 보인다.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 막부가 기능하고 있었던 센고쿠 시대 이전 한반도 및 대륙과의 감합무역에서 오우치 가문은 아시카가 쇼군가 및 호소카와 칸레이(관령) 가문과 함께 중요한 3축으로 활동했지만 쇼군가인 아시카가와 막부 관료 가계인 호소카와에 비해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름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반도와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백제계 도래인들의 자손임을 자칭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단순한 정황 증거로서 오우치씨가 진짜 도래인 계열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애초에 '우지'(氏)참칭은 대외적으로 지배권을 정당화시키고, 가문의 격을 올리는 것이 주요 목적인만큼 일본 열도내에서 마이너한 성인 '타타라'(多々良)를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우치 가문은 조선같은 외국엔 외교적 이익을 위해 백제의 후손을 자칭한다고 치더라도 내부적으로는 다른 가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9] 일본 내에서도 뻔질나게 '우리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예'임을 내세우며 활동했다.

실제 일본의 유력 영주들은 오우치 가문에 대해 본국 사람이 아닌 고려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이 오히려 일본내에서 '이단 세력'이라는 배외심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자세로 일관되게 임성태자의 후손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임성태자의 직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조상이 진짜 백제계 도래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자신들은 도래인의 후손이라고 믿었던 것이 확실하다.

4. 여담[편집]


  • 2010년 3월 30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임성태자의 45대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 公夫)씨 부부를 익산명예흥보대사로 임명하였다. 2009년에도 익산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

  • 사료가 부족한 것과 별개로 일단 사극의 소재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는 인물이지만,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임성태자가 주인공은커녕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조차 단 한 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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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한 이곳에는 임성태자의 투구와 말타는 상도 같이 소장되어 있다.[2] 당장 이름부터도 의조와 아좌로 서로 비슷하다.[3] 만주족의 성씨들 중 하나인 '타타라'와는 동음이의어다.[4] 조선왕조실록에는 주로 대내전(오우치도노, 大內殿)으로 기록돼있다.[5]팔만대장경》판은 훗날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오우치 요시히로에게 했듯이 영인본을 대신 넘겨주었다.[6]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 시대 문헌에 '모리씨의 선대가 임성태자를 따라 왜로 건너 왔던 종자(하인)'로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리씨의 경우는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 공신이었던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후예였다. 하지만 모리씨가 한 때 오우치씨의 산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 흔하다면 흔했던 하극상은 오우치씨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정도로는 볼 수 있다.[7] 32대 당주인 오우치 요시나가는 오토모 가문에서 들여온 양자로 파양되었다가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당주 요시타카를 살해한 후 당주로 앉힌 인물이었다.[8] 토요타 가문의 족보에도 백제 부여씨 왕가 족보가 표시되어 있다. 링크 연결이 안된다.[9] 실제 오우치씨의 분계는 후지와라씨를 참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