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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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동북부 랴오닝 성의 지급시. 선양시에서 서쪽으로 250km 떨어져 있는 평원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는 300만명이다. 랴오닝 성과 허베이성이 만나는 요서 지방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 진저우에서 서북쪽으로 70km, 츠펑에서는 동남쪽으로 120km, 청더에서는 동쪽으로 200km 떨어져 있다. 내몽고 자치구와도 접경하고 있어 근교에서 화석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중국에서는 화석 도시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외에도 석탄/기계 공업이 발달된 도시이며 시내에는 사찰, 탑 등 불교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2. 역사[편집]
차오양 일대는 고대로부터 고고학적으로 굉장히 풍부한 역사를 지녔다. 홍산문화의 대표적 유적인 뉴허량(우하량) 유적지가 위치하였고, 이후 하가점 하층 문화가 자리하였다. 하가점 하층 문화가 기원전 15세기 경 기후변화로 쇠락한 이후로는 1~2세기 간의 공백기를 거쳐 위영자 문화 → 십이대영자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중 십이대영자 문화는 최근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의 초기 중심문화일 가능성이 높게 여겨져, 고조선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후 십이대영자 남동구 유형(고조선계열 예맥문화)을 거쳐 전국시대에 연나라에 정벌된 후 요서군에 속하였고, 남동부 지역에 류청(유성)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요서군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후 오환이 이곳을 점령하였다가, 조조가 재정벌하였고, 이후 전연의 모용황이 이 곳을 점령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용성 (龙城)이 바로 이곳이었다. 341년에 전연의 황제인 모용황에 의해 건설되었고, 342년부터 350년까지 수도였다. 전진의 화북 통일 후에 용성은 397 ~ 409년간 후연의 수도였고 뒤를 이은 북연 (407 ~ 436년)의 유일한 수도로 번영하였다.
이후 북위가 북연의 영토를 노리고 대대적으로 북연을 공격하자 북연 황제 풍홍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북위를 위압하고 먼저 용성에 입성한 고구려군은 풍홍과 주민 수만 명을 모두 고구려로 이주시킨 후 용성에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다. 이후 고구려와 중원 국가들 사이의 국경지대가 된 이 일대는 점점 쇠락하여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는 인구 수천~수백 규모의 소규모 거점 수준으로 전락한다. 오죽하면 요서 일대를 싹 무시하고 유주부터 요동까지 2천리 구간에 당나라 행정구역이 없어서 보급이 안된다는 말까지 당태종 입에서 나올 정도.
용성, 즉 룽청은 현재 차오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구이다. 당나라 때에는 영주로 불렸으며, 요서 지방의 중심지였는데,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장소가 되었다. 그 유민들 중 일부는 거란의 대봉기 시에 대조영을 따라 발해를 건국하였다. 남은 유민들은 한화 정책에 결국 순응하게 되었지만 이정기와 같은 호걸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1891년에는 도시에서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나 수천명의 몽골/만주족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러허성에 속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랴오닝성에 편입된다.
3. 교통[편집]
관내에 랴오닝차오양역(辽宁朝阳站)과 차오양 남역(朝阳南站)이 존재한다. 랴오닝차오양역은 징하고속철도(京哈高速铁路)와 차오링고속철도(朝凌高速铁路)가 교차하는 고속철도역이며 차오양 남역은 진청 철도(锦承铁路)와 차오마 철도(朝马铁路)가 지나가는 재래선 역이다. 또한 관내에는 차오양 공항(朝阳机场)이 존재하는데, 베이징, 다롄, 톈진, 상하이, 쑹위안과 연결중인 국내선 전용공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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