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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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제9대 황제 숙종 효명황제 | 肅宗 孝明皇帝 | |
출생 | 510년 4월 8일 |
북위 하남군 낙양 황궁 선광전 동북부 (現 허난성 뤄양시) | |
즉위 | 515년 2월 12일 |
북위 하남군 낙양 황궁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528년 3월 31일 (향년 18세) |
북위 하남군 낙양 황궁 현양전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정릉(定陵) |
재위기간 | 북위 황태자 |
512년 11월 12일 ~ 515년 2월 12일 | |
제9대 황제 | |
515년 2월 12일 ~ 528년 3월 31일 | |
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9대 황제.
묘호는 숙종(肅宗)이었고, 시호는 효명제(孝明帝)였다. 휘는 후(珝)였으며, 어머니는 선무영황후 호씨로 불교에 심취했다.
2. 상세[편집]
제8대 세종 선무제의 차남으로 510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선무영황후 호씨였다.
호씨는 자귀모사 제도에 따라 장남을 낳고 일찍이 살해당해야 했으나 남편인 선무제의 결정에 따라 살 수 있었던 북위 역사상 최초의 황제의 생모였다. 이후 호씨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원후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펼쳤으며 이 시기의 권세로 인해 오늘날 '영태후' 혹은 '호태후'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대대로 누적된 한화정책의 피로와 남편 선무제에 이어 불교에 심취해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영태후 호씨에 대해 북변 6진의 선비족 군벌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급기야 낙양으로의 천도로 원래의 수도였던 평성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6진의 세력이 기울자 524년 이들의 불만이 기어이 폭발하여 반란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바로 육진의 난이었다.
이때 토벌에 앞장섰던 이주영 등 이주씨 혈족들과 그의 부하들이었던 고환, 우문태 등이 이끄는 군벌이 급성장했다.
육진의 난이 진압되자 이제 영태후 호씨의 전횡을 막기 위해 효명제는 암살을 기도하고, 이주영의 힘을 빌리고자 했으나, 이를 알아챈 영태후가 선수를 쳐서 친아들인 효명제를 독살했다.
즉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다가, 어머니가 선수를 쳐서 아들을 죽이는 개막장 상황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영태후는 효명제의 딸을 황제로 세웠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손자뻘인 원조로 바꿨지만 곧 효명제의 밀명을 받고 온 이주영에게 잡혀서 영태후와 원조 모두 황하에 던져저 살해되었다.(하음의 변)
숙종 효명제의 능호는 정릉(定陵)이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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