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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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령총(金鈴塚)

조성형태
돌무지덧널무덤
피장자
신라 왕자(신라 왕족의 어린아이 추정)
조성시기
신라 6세기 초[1]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번지

1. 개요
2. 발굴조사
3. 여담
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1. 개요[편집]


6세기서라벌(경주시)에 위치한, 주인이 알려지지 않은 신라시대의 무덤. 신라의 어린 남성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금령총은 본래 경주 노동리 고분군 중 하나로서 사적 제38호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에 경주 노동리 고분군, 경주 노서리 고분군, 경주 황남리 고분군, 경주 황오리 고분군, 경주 인왕리 고분군 등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했다.


2. 발굴조사[편집]


1921년 금관총의 조사 이후 정식으로 신라고분을 발굴하고자 하였던 때에 당시 가장 잔존상태가 좋지 못했던 곳이 노동동 고분군인데, 여기는 지금의 봉황대 고분이 소재한 대릉원의 북쪽 구역이었다. 1924년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발굴을 담당하여 금령총, 식리총을 조사하였고 각각 가장 특징적인 출토 유물에서 이름을 따와 각 고분의 명칭을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이라고 작명하였다.[2]

금령총은 대릉원 고분군 안에서야 중소형 고분에 불과하지만, 대릉원이 신라 고분들 중에서 당연히 왕의 무덤군으로 위계가 가장 높은 곳이기에 금령총 또한 당시 최상위 묘제인 적석목곽묘 구조로 축조되었다. 천마총과 크기만 다를 뿐 금령총 역시 전반적인 축조방식은 동일한 지하식 구조였다.

세월의 흐름을 못 이기고 이미 무덤이 많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4년 발굴에서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금령총에서도 금관을 포함하여 흔히 '풀셋'이라고 말하는 신라 상위 신분의 상징 아이템들이 모두 출토되었다. 여기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지만 이미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분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조사자들은 요패(腰佩, 허리장식) 아래에 잔뜩 달린 금방울(金鈴)에서 이름을 따 '금령총'이라 명명하였다. 그 밖에도 상형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기마인물상은 당시의 마구 및 마장(馬將)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아 이후 국보 제91호로 지정되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중에서는 가장 작고 장식도 곡옥이 없이 금으로만 만든 간소한 형태다. 금관의 크기가 작고 피장자의 키가 1m 가량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보아 10세 전후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본다고 한다. 이 금관은 보물 제338호로 지정됐다.

금관의 크기나 고분 자체의 규모는 물론, 피장자가 완연한 성인이 아닌 점을 종합하면 왕릉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무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이 출토되었던 점은 금관이 '왕'만을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훗날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이 발굴되면서 '금관=(남성) 왕'이라는 등식은 완전히 깨졌고, 금동이든 금이든 재질보다는 상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쪽으로 연구방향이 모였다.

일제가 했던 발굴조사는 시대적 한계도 있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러모로 부족했기 때문에 100여년이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00일 동안 진행했고 여러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재발굴 과정에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와 같은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말 모양 토우가 발견되기도 했다.관련 기사


3. 여담[편집]


  • 비슷한 시기(5세기 말) 비슷한 피장자(신라 공주)를 피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쪽샘지구 44호분과 비교되기도 한다. 쪽샘지구 44호분은 여유로운 공간에, 나무 기둥을 적석부 중간에 세운 것에 반해, 금령총은 봉황대와 127-1, 2호 사이의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 만들었고 나무 기둥도 확인되지 않아, 쪽샘지구 44호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사인은 사고사. 추가로 쪽샘지구 44호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지만, 금령총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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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증왕의 아들로 추정하기도 한다.[2] 이와 같이 주요 출토 유물에서 따와 이름을 붙임은 전형적인 일본풍 작명법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조사한 한반도의 많은 고분들이 이처럼 고분의 특징을 살린 명칭을 종종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