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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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 말기의 귀족. 무열왕계의 유력 인물이자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명주로 좌천된 김주원의 아들이자 김헌창의 난의 주도자. 장안국의 왕.
2. 생애[편집]
애장왕(800~809) 대에 이찬(伊飡)이었다가 807년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후 다시 이찬을 지냈다. 헌덕왕(809~826)대에 813년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 도독이 되었다가 8월에 중앙으로 부름을 받아 시중이 되었다. 816년 외직으로 나가게 되면서 청주[2] 도독이 되었다.
821년 웅주(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옛 백제 웅진) 도독이 되었고 822년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킨다. 다만 시점을 보면, 정말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흥덕왕(826~836)이 태자가 된 것이 더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건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고[3] 김헌창은 그동안 정계에서 잘 있다가 이제 와서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는 좀 뜬금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원래는 모종의 이유로 헌덕왕 바로 다음 순번으로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모양. 원성왕의 차남 김의영과 혈연관계로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헌창은 본인이 도독으로 부임해 있던 공주에서 신라 조정에 대항해 장안국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4주의 도독들과 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해 부하로 삼는 등 크게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녹진(祿眞)의 지휘 아래 한산주(漢山州), 우두주(牛頭州), 삽량주(歃良州), 패강진(浿江鎭), 북원소경(北原小京) 등의 여러 성에서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알고 성을 지켰으며 헌덕왕이 파견한 신라군과 맞서 싸웠지만 도동 고개, 삼년산성, 속리산, 성산 등 여러 곳에서 패해 도망가서 웅진에서 농성했다가 10일만에 함락되려고 하자 패배를 직감하고 자결했다. 김헌창이 자결하자 김헌창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 중앙군은 반역자 김헌창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다시 부관참시했다.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나타나 4일만에 죽었는데 김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고 한다.
아들 김범문은 피신해 북한산에서 산적에 의탁해 3년간 지내고 남평양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재차 난을 일으켰지만 크게 호응이 없었는지 한산주 도독에게 토벌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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