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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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생애
1.1. 출생과 본가
1.1.1. 악명 높은 본가 이야기
1.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
1.3. 즉위 초반과 친족 살해
1.4. 옥타비아와의 이혼과 아내 살해
1.5.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
1.6. 계속되는 폭주와 사촌형 살해
1.8. 화폐개혁
1.9. 몰락
1.9.2. 그리스 순회 공연과 코르불로 숙청 사건
1.9.3. 고립과 최후


1. 생애[편집]



1.1. 출생과 본가[편집]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온 뒤, 클라우디우스의 딸과 결혼하면서 클라우다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네로의 모계는 익히 알려졌듯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며, 네로의 외삼촌은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이다. 따라서 네로의 외조부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이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낙점한 게르마니쿠스였고, 외조모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아그리피나. 그리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동복동생이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로 생전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말한 대 드루수스이다. 따라서 네로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차남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외종손이 되며, 모계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그 자체였다.

부계로도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혈족인데, 정확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일찍이 제위계승권과는 먼 방계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네로의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받은 셈이다.

입양 전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며, 서기 37년 12월 15일 남이탈리아의 안티움에서 태어났다. 안티움은 오늘날의 이탈리아 안티노로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귀족, 기사계급 부자들의 초호화 별장이 즐비한 동네였다. 이곳에서 네로는 태어났고, 이 해는 외삼촌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시절이었다.

부모가 낳은 첫 아이로 태어났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오랜만에 태어난 방계황족 중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1] 외삼촌 칼리굴라는 이례적으로 축전을 보내 자신의 첫 조카가 건강하게 자라고 첫 아이를 힘겹게 낳은 여동생의 건강회복을 기원했다.

그렇지만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친부 그나이우스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이 첫 아이 탄생을 축하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놈이 될 수밖에 없을걸?! 얘는 국가적 위험이 될거야."


이후, 그는 아들을 쿨하게 인지해주고 평소대로 행동하면서 아들이 생후 7일까지 생존하길 기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첫 아이를 얻은 아그리피나는 남편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로마의 팔라티노 황궁에 사람을 보내 자기 아들에게 마땅한 이름을 지어달라고 전갈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오빠 칼리굴라에게 이 뜻을 간곡히 전했는데, 이는 부모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도 방계황족인 자기 아들을 황족으로 만들려는 의미가 강했다. 따라서 그 의도를 눈치챈 칼리굴라는 이를 거절하고, 미래의 네로로 불릴 첫 조카의 미래와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번영을 축원만 했다고 한다.

이때 일에 대해 수에토니우스는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저서에 표현하길, 아그리피나가 오빠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사람을 보내 마땅한 이름을 지어 달라고 재촉했을 때, 가이우스는 자신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와 황궁 안에서 국가 사무를 논의하다가 이를 듣고 힐끗 숙부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클라우디우스라고 짓는 게 어떠냐?"라고 농담하곤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존중해주는 사가들의 해석에 따르면, 황제권 강화와 카이사르 가문 직계의 지위 강화를 열망한 칼리굴라가 정적인 여동생 아그리피나 부부를 향해 정곡을 찌른 뼈있는 농담이 와전됐을 수 있다고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아그리피나와 그 남편 그나이우스에게도 웃음거리 내지 조롱거리로 인식된 것을 칼리굴라가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 그래서인지 오빠에게 대놓고 면박을 당한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그 말에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 그대로 네로의 외삼촌 칼리굴라는 축전문 외에는 자신의 첫 조카에게 조금의 지위, 영예, 특권도 내리지 않고 철저히 무시했다. 따라서 어린 네로는 황제였던 외삼촌에게 카이사르 가의 상속권을 받지 못했고,[2] 어머니가 외삼촌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가 추방형에 처해졌을 때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마음 착한 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의 보살핌을 받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어릴 때 영특하고 현명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1.1.1. 악명 높은 본가 이야기[편집]


네로의 본명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과 똑같고 가문 대대로 세습해온 이름 중 하나였다. 그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家)[3]는 평민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도미티우스 씨족[4]에 속한 노빌레스 가문 중 하나로 대대로 로마 집정관(consul)을 역임해 온 로마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여타 도미티우스 씨족 내 분파가문이나 다른 노빌레스 가문들과 달리 출신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하나같이 좋지 못했고, 가문에 대한 명성도, '마리우스와 술라 시대' 이래 옛 공화정 유력 가문이라는 것을 빼곤 늘 최악이었다. 그 예로 네로의 직계 조상인 현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6년 법무관으로 시칠리아에서 근무할 당시, 노예가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노예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그 잔인함으로 질타를 받았다.

100여 년 뒤 사람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아헤노바르부스 가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이 후술할 네로의 증조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그나이우스라고 기록했다. 또한 다른 역사가들도 한결같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상당히 나쁘게 평가했는데, 그럼에도 네로의 조상 중에서 이름 있는 인물들은 상당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로마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익숙할만한 이름들이 꽤나 있는데,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당시 술라 편을 대놓고 들었다가 카이사르의 고종사촌형 소(小)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한 네로의 현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네로와 이름이 똑같은 고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5] 네로의 고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포르키아(Porcia)[6]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7],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동안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 함께 장군으로, 동방에서는 뛰어난 행정가 겸 외교관으로 상당한 능력을 뽐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할아버지)[8]가 있다.

먼저 네로의 본가 가계 중 네로의 고조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 중 하나인 카이사르폼페이우스 간의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선 뒤 대항한 정치인이었다. 네로의 고조부 루키우스는 공화주의자 소 카토의 누나 포르키아의 남편, 즉 소 카토의 매형으로도 익히 유명한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기간 당시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최종권고를 한 뒤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지명한 원로원파 인사이자 카이사르에게 생포됐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람과 포르키아의 아들인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9]와 더불어 카이사르의 대표적인 적수(適手)였다.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의 행적을 좀 더 살펴보면, 그는 소 카토의 조카로 기원전 32년도 집정관을 지낸 거물급 인사이자 공화정 말의 이름 높은 해군제독이었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젊은 시절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고조부)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맞섰다가 같이 포로로 잡힌 전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는 카이사르에게 칼을 겨눴어도 반대편에게도 관용을 베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사면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면령을 받았음에도 기원전 46년까지 이탈리아에 일부러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정치경력도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정치활동을 그만두지 않았고, 속주에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기원전 46년 이탈리아로 귀국해 다시 정치경력을 시작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됐는데, 암살 전후 그나이우스가 보인 여러 행동들은 로마인들에게 그의 지난 행실과 암살 직후 보여준 태도 때문에 암살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이렇게 세간의 의심을 받는 와중, 그나이우스는 필리피 전투 당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 맞서 브루투스, 카시우스 편에 가담했고, 130여 척의 로마 해군을 진두지휘하며 공화정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기원전 42년 10월,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의 원로원파가 삼두파에게 필리피 전투에서 패하자 다른 동료들처럼 항복 또는 자살하지 않고 휘하 해군을 온전히 이끌고 탈출해 지중해를 떠돌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전기작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로마인들에게 카이사르 암살범 못지 않은 살인마 같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후 그는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 아래 삼두파 중 한축인 미래의 사돈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안토니우스파의 해군을 사실상 이끌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칼을 겨눴다. 하지만 그나이우스는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 내 여론이 안 좋고 안토니우스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가차없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한 뒤 그동안 죽일 듯 욕을 해댄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 의사를 먼저 밝히고 자신이 합류일을 정한 뒤 옥타비아누스 측에게 갔다. 하지만 그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도 전에 함선 위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행적상 모습은 부친이나 먼 친인척들(특히 외삼촌 소 카토)과 달리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하다고 평가를 받았고, 급기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됐다. 그리고 이런 조롱은 단순한 조롱을 넘어 해군 제독으로서 악티움 해전 이전까지 세운 많은 공적과는 별개로, 그 인간성이 비루하게 여겨졌으며 그러한 인식은 내전 이전인 마리우스술라 시대동안 가문이 쌓아놓은 안 좋은 이미지까지 겹쳐 그의 가문과 자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해군제독 그나이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외아들[10]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할아버지)는 로마인들에게 들은 악평과 달리 생각외로 괜찮고 재능 있는 로마귀족이자 장군,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실제 인간성과 달리 비루한 인간의 표본으로 까인 그나이우스의 외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운 가문의 악명"을 죄다 뒤집어 써야만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 안토니아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던 그는 기원전 49년생으로 기원전 16년도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비록 그나이우스가 인간성으로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제독이라는 고위직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대의를 찾아 후에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하려 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기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11]

거기에 더해 그나이우스 생전 안토니우스는 자신과 옥타비아 사이의 딸 소 안토니아를 그나이우스의 아들 루키우스와 맺어주기로 약속했는데, 내전의 결과 약속의 당사자 둘이 모두 사망했는데도 아우구스투스는 약혼을 깨지 않고 그대로 이행하였다. 이는 안토니우스 가문에 대한 배려의 성격도 있겠으나[12],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결혼이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리비아와의 결혼으로 아우구스투스의 가족이 된 그녀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는 자연스럽게 공화정기의 명문대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브랜드를 아우구스투스에게 안겨주었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당대 열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대가였으며 그나이우스가 죽고 십대 소년 루키우스가 가장이 된 그 가문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지를 위협할 성인 정치인도 없었다. 그러니 이 결혼은 카이사르 가문에 가장 집요하게 반대했던 이 명문대가를 친황제파로 끌어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후손들이 인성 문제로 비판받은 것과는 별개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인사들은 꾸준히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기대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결국 그나이우스가 죽고 옥타비아의 사위가 된 루키우스는 제정 고위직에 기용되었다.[13]

루키우스는 실제 인간성과 별개로 죽을 때까지 미움을 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이름난 전차기수였는데, 전차기수로 활동할 당시 그는 로마인들에게 헌신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때 경력은 훗날 가문의 악명과 아들, 손자의 평판 탓에 이 사람이 후세 사람들로부터 "전차 경주에 미쳐 있었다"고 비난 받는 이유가 됐다. 조부 루키우스는 여러 공직 생활을 거쳤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공직 생활을 한 이후부터 계속 승진했고, 아우구스투스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게르마니아 전쟁에 참전했다. 이때 그는 자신보다 6살 어린 티베리우스 밑에서 복무하는 동안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부교를 놓고 도로를 건설하는 임무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또 그는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 외의 다른 전임자들이 시도조차 못한 성과를 내면서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게르마니아에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제단 등도 건설했다. 즉, 그는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처럼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눈 앞에 뒀던 장군이기도 했다.

그 결과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으로 파견될 당시 능력과 인간됨을 상당히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가 손수 고른 수석고문단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가문의 이미지 때문인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원로원에게 지나친 폭력성과 비열함과 잔인함을 갖췄다고 죽을 때까지 비난받았다. 그가 비난받은 주된 이유는 젊은 시절 전차기수를 하면서 취미활동으로 무언극 연기를 하면서 너무 몰두한 나머지 로마 기사계급의 기혼 여성을 상대역으로 삼는 연기까지 벌였던 것이 컸다고도 한다. 또한 그가 가문행사를 위해 검투사 경기를 역대급 규모로 개최했었는데, 이때 참전한 검투사들의 경기력이 과도하여 유혈사태가 날 정도로 격렬해지며 욕을 먹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서 야수쇼를 열었던 것도 비난 받았는데, 통상 이상으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때 그를 비난한 이들은 "역시 아버지처럼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는데, 이렇게 말한 이들은 대부분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이런 전적 외의 이유로 욕먹은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루키우스의 고조부 이래 내려온 가문의 악명과 부친의 행적, 큰아들 루키우스와 둘째 아들 그나이우스의 망나니 행동 탓이 컸다. 따라서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사망 당시에는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옥타비아의 사위였고 집정관까지 지낸 최고위 원로원 인사였음에도 원로원 내에서 늘 평판이 나쁜 탓에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에 시달리다가 결국 서기 25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고대부터 내려온 기록상 네로 본가 내에서 나쁜 면으로 가장 유명한 인사는 네로도 있지만, 그 이전 가장 망나니로 유명했던 사람은 바로 네로의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 그는 아들 네로가 폭군으로 공인되어 불행하게 몰락하기 이전부터 로마 내에서 가장 질 나쁜 사람 중 한명으로 유명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안토니아의 아들이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기에, 대 안토니아의 누이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이종 사촌 동생[14]이 된다. 그런데 그나이우스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이므로 그나이우스는 그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오촌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부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뻘이 되지만, 모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손자뻘이 되는 것이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중 한 명인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 클라우디우스의 맏사위 파우스투스 술라의 어머니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 레피다(Domitia Lepida the younger)이므로 네로와는 사촌 관계이다.

상술했듯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자신의 조부 그나이우스, 부친 루키우스보다 평가가 더 안 좋았고, 아들 네로가 막장스러운 행동을 하기 전부터 평가가 최악이었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大) 안토니아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나이우스는 형 루키우스가 요절한 탓에 사실상 외아들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부계가 당시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에다가, 악티움 해전 당시 고위 장교였던 그의 조부가 안토니우스를 떠나 아우구스투스에게 귀순한 것을 시작으로 황제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어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에게 신임받던 집정관이었으며 모계는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였던데다가 사실상 외아들이기까지 했으니 그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고, 그는 이것을 이용해 자기 마음대로 전횡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나이우스의 악명이 시작된 시기는 기록상 서기 2년 벌어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출장 당시라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하는데, 이 사람이 기원전 2년생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져보인다. 왜냐하면 4살에 불과한 아이가 술을 먹고 자유민을 살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질랜드의 고대 로마사 권위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정국과 그 흐름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로널드 사임과 같은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아헤노바르부스가 그나이우스의 형 루키우스라고 추측하는데, 루키우스가 게르마니쿠스보다 2살 위였다는 것과 이들 형제의 아버지 루키우스가 동방에 가이우스 카이사르 고문으로 파견됐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사임 등의 추측대로 그나이우스가 동방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져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과 별개로 그나이우스는 죽을 때까지 가문의 권력과 황제 가문과의 가까운 혈연 관계만 믿고 막장 짓을 저질렀고,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비열하고 더럽기로 유명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 시내의 포룸에서 놀면서 여러 사람들을 별 이유없이 괴롭혔고, 일부러 시내에서 말을 몰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한건 기본이었다. 또 그는 병상에서 죽을 때까지 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신분에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모욕과 폭행은 예사였으며, 다혈질과 잔인함까지 가지고 있던 막장황족이었다. 아울러 그는 귀족 자제답지 않게 거액 사기 및 국고 횡령의 명수였고, 어릴 때부터 늘 도박과 전차경주, 검투사 경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늘 질 나쁜 부류의 인사들이 많았다. 또한 그는 여자 관계가 매우 더러웠는데, 단순히 난잡한 사생활을 벌인 것이 아니라 질이 상당히 나빴다. 특히 여자 문제는 범죄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연년생 누이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메살리나와 파우스투스 술라의 어머니, 브리타니쿠스의 외조모)[15]와 근친 혐의까지 받을 정도였고, 다른 귀족들의 부인 여럿과도 비슷한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외에도 네로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황실 일원인 탓에 남들보다 일찍 공직경험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 직위를 안 좋게 이용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그는 법무관 시절 그 직위를 이용해 거액의 사기를 주도한 뒤 여러 은행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강탈하기도 했고, 상금을 이유로 다른 이들의 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 탓에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평판을 계속 깎아 먹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딸과 결혼한 뒤 집정관까지 올랐음에도 결국 완전히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평소 성격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동안 그나이우스가 한 악행을 모아서 여러 가지 죄목(반역, 간음, 사기, 횡령, 근친상간)으로 기소한 뒤 법대로 처벌했다. 따라서 그나이우스는 실제로 기소 후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티베리우스에게 손수 사형 판결까지 받은 다음 그대로 사형수 신분이 됐다.

그러나 판결을 내릴 당시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얼마 안지나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사형은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 이종사촌형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됐다. 이때 갓 즉위한 황제는 민심을 잡기 위해 티베리우스 때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을 사면해줬는데, 그 역시 사형을 앞두고 있다가 바로 석방됐다. 네로는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석방된 지 얼마 안 있어 소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안티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네로의 아버지는 서기 41년 아들 네로가 2살도 채 되기도 전에 부종으로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칼리굴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재산을 아들 네로 뿐만 아니라 칼리굴라[16]에게도 일부 넘긴다고 했었고 그것을 빌미로 칼리굴라는 그의 대부분의 재산을 가져가 버렸다. 죽음과 재산 기부, 당신의 선택은?! 그러나 칼리굴라가 가져갔던 재산은 네로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돌아왔다.

네로는 서기 55년, 자신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생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원로원에 그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1.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편집]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네로가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해도, 네로는 어머니의 재혼 전까지 로마 사회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였고, 당시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타니쿠스의 친모 메살리나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의 딸이었고, 네로에겐 고종사촌누나로 칼리굴라가 직접 결혼을 주선해 자신의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결혼시킨 사람이었다. 따라서 황실 정통성상 정상적으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네로의 사촌누나인 황후 메살리나가 간통을 넘어서 중혼까지 저지르고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가 전체를 먹칠한 뒤, 황제가 처벌을 미루던 중 황제의 해방노예 출신 측근 나르키수스에게 제거된 대형 스캔들이 터지면서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게 된다.

사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결혼은 아무리 근친혼이 성행하던 당시에도 무리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적됐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혈통적으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카와 삼촌의 결혼식은 법적으로는 성이 다른 결혼이어도 불가능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뜻이 확고한데다 비텔리우스[17] 등 원로원 내 결혼 찬성파들의 지지로 통과됐다. 이렇게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면서 미성년이었던 네로도 어머니를 따라 황궁에서 살게 된다.

아그리피나는 황후가 된 이후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클라우디우스에게 영향력이 큰 측근들을 포섭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증조할머니 리비아가 과거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18]을 주도해 자신의 친아들 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의 공식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것처럼, 친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19]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는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와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음에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사위이자 의붓아들이며 조카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예 양자로 들이고 이름까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고 지어줬다. 아울러 아그리피나의 뜻에 따라 그녀의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임명시켜주고 네로의 교육은 박식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담당케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 양자 입적은 공식적으로 네로를 후계자로 결정지은 행동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양자로 삼은 네로를 계속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20] 자신의 맏사위이자 인망 높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21]를 브리타니쿠스의 제위를 잠시 맡아놓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는 건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쿠스가 제왕 교육을 받기 시작할 10살이 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급사 후 공개된 유언장를 생전 작성했는데, 이때 그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공동 후계자로 지명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네로의 양자 입적 후, 건강하던 클라우디우스가 54년 독살로 의심되는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기 전, 혼란한 틈을 노린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황제의 측근 팔라스[22] 등과 함께 클라우디우스의 또 다른 측근세력인 나르키수스[23] 등에게 요양을 베푼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내세워 로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했는데, 이런 혼란한 틈에 네로의 어머니는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 등과 사실상 궁정 쿠데타 형식으로 17세에 불과했던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 네로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에서 공동 후계자로 지명된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이 유언장을 무시했으며, 자신들의 궁정쿠테타 계획을 알고 이를 기소하려던 나르키수스 등을 로마에 떨어뜨려 놓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따라서 이는 오늘날에도 클라우디우스가 독살당한 것으로 강하게 확신되는 증거로 평가받는데, 궁정쿠데타를 성공한 아그리피나 세력은 자신들이 앞세운 네로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을 방문했다. 이때 아그리피나, 부루스, 세네카 등은 네로를 앞세워 각 병사들에게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세네카가 신중히 작성한 원로원 선언서는 원로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1.3. 즉위 초반과 친족 살해[편집]


오현제 중 지고의 황제로 불린 트라야누스의 평가로 와전됐다고 해도, 네로의 첫 5년은 확실히 축제 분위기였고[24]실제로 즉위 초반은 이후 재위기간과 비교해 성공적이었고 표면상으로는 괜찮았다.

세네카가 작성한 원로원 즉위 연설이 세네카 특유의 문체와 젊고 잘생긴 금발머리 소년 네로의 외모와 쾌활한 성격까지 결합돼 원로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특히, 어린 네로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따르고, 원로원의 특권들과 권한을 존중해주겠으며 본인은 오직 군 통수권만 갖겠다'고 약속하자 원로원은 과거 칼리굴라의 첫 등장 때처럼 네로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네로의 즉위 시정 연설은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이전 정권의 병폐를 없애겠다"는 말이 그 핵심이었다. 세네카의 문구를 읽어나간 네로의 시정연설에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병든 악폐[25]와의 절연"과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와는 다른 원로원의 자유 보장", "황제의 재판 관여 금지", "비밀재판을 하지 않을 것이며, 관저와 사저를 분리해 운영하겠다"는 약속이 담겼고, 이 4가지 조항은 동판에 새기도록 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네로의 연설에 환호했는데, 네로와 그 시대를 연구한 독일 사학자 위르겐 말리츠, 영국의 저명한 고대 로마사학자 하워드 헤이스 스컬러드 등이 지적했듯 이 조치는 모두 지켜지지 않았고 네로와 섭정들에 의해 더 악랄하게 집행됐다. 특히 스컬러드는 아예 '네로가 가이우스와 클라우디우스를 병폐로 지적하면서 원로원의 자유를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네로의 모친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통해 다스렸다".'고 기술하면서 이 연설들이 얼마나 모순되고, 지켜지지 않았는지 조목조목 짚었다. 실제 첫 시정 연설이 끝난 직후 소년 네로가 이끈 새 정부의 첫 조치는 소 아그리피나가 유배될 당시 아기 네로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준 친고모와 먼친척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가 누명을 뒤집어 씌워 처형한 일이었는데, 어린 네로는 고모와 친척들에게 불리한 증언까지 하면서 그들이 유죄를 받게 영향을 행사했다.

네로는 본래부터 자제력이 약했고 감성적인 소년인데다 겁도 많았다. 또 그는 본인 스스로 원래 황제가 될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음에도 어머니, 세네카, 부루스 등에게 친위쿠데타 형식으로 옹립된 상태였는데 더 비극적인 일은 닳을대로 닳은 세네카를 위시한 권신들의 행정능력과 정치력에 의존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네로는 즉위 후 실무경험조차 경험하지 못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가 됐는데, 설령 소년 네로가 선의가 있었던 의도로 벌인 결정이나 명령조차 실권이 없어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경험들은 그가 성인이 된 이후의 여러 실언이나, 법에 따르지 않고 명령을 내린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네카 등은 자신이 실권을 쥐기 위해 네로가 미성숙하도록 교묘하게 방치했다. 따라서 네로는 위기상황마다 스스로 당황해 머뭇거리고 혼란스러워했다.

네로의 정통성은 클라우디우스의 사위라는 타이틀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부모 양쪽에서 이었다는 것에 기반했지만, 그럼에도 정통성의 약점은 뚜렷했다. 네로의 외삼촌인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는 네로의 탄생을 축전을 보내 축하하면서도 자신의 여동생 중 둘째동생인 율리아 드루실라와 그 남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부부의 자녀 외에는 카이사르 가문의 직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고, 실제로 네로에겐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남처럼 취급했다. 이는 6촌까지를 같은 가문으로 보는 로마인들의 관습과 대개의 로마 귀족들이 남자조카가 그 대를 이어야 할 경우 일찌감치 선을 긋는 관례를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는데, 네로의 장인으로 양부가 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역시 소 아그리피나가 지속적으로 네로를 양자로 입적시키려고 시도했음에도 끝까지 네로의 입양을 망설였고 사위로 맞이하고 양자로 입양하면서도 그를 가문의 후계자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문제는 정숙하지만 외모가 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수준으론 상대적으로 예쁘지 않은 옥타비아와의 결혼이 사실상 강제인데다 서로 성격도 상극 그 자체라서 네로 부부의 금슬은 결혼식 직후부터 좋지 않았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 등이 기록한 고대 기록들은 타고난 고귀함과 귀족적 품성을 갖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방종스럽고 자유분방한 네로와 여러 가지 부분에서 불화가 있었다고 직간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분명한 점은 네로와 달리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인데다 그녀의 증조모인 소 옥타비아를 연상시킬 정도로 교양 있고 로마의 남녀노소 모두 반할 만큼의 품성과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그 존재만으로도 로마 각계에서 명망이 높았고, 속된 말로 별 볼 일 없이 제위를 차지한 네로가 부부 관계만 완만하면 알아서 후광이 될 존재였다. 하지만 네로는 즉위 직후부터 성격도 안 맞고 본인의 기준으론 엄청난 미인까진 아니었던 옥타비아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 결과, 네로가 이렇게 행동하면 할 수록 옥타비아는 로마 시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았다.

네로의 아내 무시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은 로마 정부와 귀족 사회 전통 모두에서 그 정통성이 심각히 떨어지는 황제 스스로 정통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아킬레스건이 됐다. 때문에 네로의 모후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 소 아그리피나는 권력욕이 대단했지만, 애당초 며느리 옥타비아를 무척 만족스러워 했던 터라 자연스레 모자 사이는 나빠지게 됐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네로는 친구 오토의 아내로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밤마다 포파이아 사비나와 잠자리를 가졌다. 아울러 네로는 이때부터 스승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 등의 말만 듣고 어머니와 대립했고, 포파이아 사비나와 정식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정통성 기반인 아내 옥타비아를 아예 몰아내려고 했다. 이렇게 네로가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불륜을 저지르고 밤마다 질 나쁜 인사들과 문제를 저지르고 다닌 것을 모후 아그리파나와 아내 옥타비아가 모를 리 없던 터라, 황궁 안에서 어머니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감정대립은 매일같이 최악으로 흘러갔다. 특히, 오빠 가이우스 황제 시절부터 권력욕이 심해 오빠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한성격했던 아그리피나는, 황제 정통성이 되어주는 결혼을 스스로 깨려고 하는 네로의 행동에 단단히 화를 내며 며느리 옥타비아 편을 들면서 아들과 대립했다. 이때 네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고 했고, 자신의 비행과 포파이아와의 공개적인 불륜 행각을 이런 실권 행사 방법 중 하나로 여겼고 더욱 이에 몰두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세네카와 부루스는 자신들이 더 큰 권력을 쥐고 네로를 장악하기 위해선 아그리피나를 견제해야 됐기 때문에 아그리피나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한 명분을 이유로 네로를 은근슬쩍 편들면서 친 아그리피나파의 득세를 견제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네로의 뒤에서 친 아그리피나파 황실 관료들을 하나둘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클라우디우스 시대 이후에도 소 아그리피나를 돕던 칼리스투스는 실각, 나르키수스는 즉결 처형됐다. 이렇게 네로는 세네카, 부루스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황제로서 행동했고, 여기에는 세네카와 부루스조차 예상치 못한 소년 황제의 방종 속에서 이들조차 조금씩 네로의 행동에 대해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젊은 네로에게 예술과 음악, 시, 전차 경주에 대한 취미에 몰입하게끔 권장하면서, 모든 공식행사에서 네로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네로의 측근들은 젊고 미숙한 황제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행동할 것을 권장했다. 아울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에서 소 안토니아 생전부터 충성을 다하던 아그리피나의 오른팔 궁정대신 팔라스를 파면시키도록 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여자문제와 네로의 비행으로 잡음이 끊임없던 황실 내 불화를 심화시켰는데, 팔라스 파면 결정은 모자 관계를 정적 관계로 바꾸고 만다. 따라서 아그리피나는 더이상 통제되지 않는 친아들 대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황제가 되어야 할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타이틀을 강조하면서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대 드루수스의 직계인 브리타니쿠스를 권좌에 앉히겠다”고 협박했고, 아들 네로에게 “배은망덕한 아들”이라고 말하며 폐위까지 거론했다.

네로는 사실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당시 13살밖에 안 된 소년이었기에 이전까지는 그 아이를 질투했어도 견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분노와 협박이 단순한 폭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뒤부터는 위기감을 느꼈고, 어린 브리타니쿠스가 자신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선황제의 친아들이기에 일반 평민들에게 호감[26]을 받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 당장 어린 소년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네로의 측근인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 역시 네로와 생각이 비슷했다. 친구였던 세네카와 부루스는 클라우디우스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를 키워 나가면서 아그리피나의 영향력을 꾸준히 약화시켜 모자 사이를 회복불능 상태로 만든 뒤 젊은 네로를 서서히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임을 내세우면서 근위대와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를 움직일 수 있는 아그리피나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두 사람은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꼈고, 암묵적으로 네로가 브리타니쿠스와 아그리피나를 죽이려는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네로는 하수인을 시켜 독을 이용해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식사 자리에서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 이때 네로는 독약 전문가인 로쿠스타라는 여인을 고용해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한 번에 죽이고 싶어 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그의 저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뜬소문성 기록이 아닌 거의 사실에 입각한 내용이기에 오늘날에도 설득력이 높다. 이에 따르면, 네로는 로쿠스타를 고용했고, 로쿠스타는 독약을 먹였다는 의심을 줄이기 위해 양을 조절했다. 그래서 브리타니쿠스가 배탈에 시달리며 설사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네로는 “너는 내가 율리우스법 따위를 두려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호통치면서 그녀를 심문하고 매질한 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독약을 제조케했다. 네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돼지에게 독을 직접 실험케해 돼지가 즉사하자 그 약을 가지고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 살인 방법은 독탄 포도주. 당시에 술을 마셔서 독을 감정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포도주를 따끈하게 데워 마셨고, 너무 따뜻하면 냉수를 조금 탔다. 네로가 독을 탄건 이 냉수였다. 포도주에는 독이 없었기에 감정사는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냉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브리타니쿠스는 결국 독든 냉수를 탄 포도주를 마시고 급사했다. 그리고 브리타니쿠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던 티투스 역시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죽일 때 독약이 강한 탓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27]

이때 네로는 식사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독살을 의심하자 능청스럽게 브리타니쿠스가 간질을 앓아서 급사한거라고 둘러댔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독살을 의심하기에 이르자 비가 억수로 쏟아붓던 날에 브리타니쿠스의 시신을 장례식도 치뤄주지 않고 서둘러 화장해 매장했다. 따라서 모든 로마인들은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는 것을 확신했는데, 이는 훗날 네로의 몰락 당시 그의 잔인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 아울러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호위하던 게르만 친위대를 경호인력에서 제외한 뒤 본국 출신 근위병들도 철수시켰다. 그리고 네로의 손에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된 지 몇 달 뒤, 자신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어머니 아그리피나마저 네로가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이후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처형했는데, 타키투스를 비롯한 로마인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네로는 어떤 로마 사람들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내 옥타비아를 죽인 뒤 그녀의 목을 잘라 로마로 가져오도록 하고 이를 본인이 직접 확인까지 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런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또 이때까지는 네로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로마인들은 신분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심을 중요시 여긴 만큼 네로의 잔인성에 혀를 내둘렀고, 이는 네로의 실책과 기행들이 벌어질 수록 그의 여론을 나쁘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이 외에도 네로는 자신의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직계들을 끝장내기 전부터 훗날 몰락의 시발점이 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내 옥타비아를 무시하고 처형시키기 전부터 장인이자 양부, 외종조부인 클라우디우스를 능욕하고 비꼰 행동들인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유명했다. 먼저 네로는 즉위 이후, 습관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희롱하거나 비하하는 농담을 즐겼다. 따라서 그는 세네카 등과 함께 늘 클라우디우스를 비꼬면서 “(클라우디우스가) 세상에서 바보 노릇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임자 이야기가 나오면 ‘계속 머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morari'의 첫 음절을 일부러 길게 늘이면서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으며, 양부를 “늙은 바보”, “멍청하고 잔인한 노인네”라고 불렀다. 아울러 네로는 그리스 속담을 인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가져온 버섯을 “신들의 음식”이라고 불렀다.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 옥타비아를 모조리 죽인 네로는 얼마남지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까지 여럿 살해했다. 그는 아그리피나 생전때 반란을 획책했다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인 아시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그 일가를 숙청했고, 친고모 도미티아 레피다 역시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때 그의 이런 행동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를 모두 경험한 로마인들에게 "그 잔인함"을 비난받았는데, 살해된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경우에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사람이 양처럼 유순하고 너무 정직하다"고 할 정도로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인 탓에 네로의 잔인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네로는 자신의 고모 도미티아 레피다와 먼친척인 실라누스 일가가 무고죄로 고소되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머니 아그리피나보다 더 잔혹하게 친족 살해를 묵인하고 공격했다. 그래서 그는 고모와 먼친척 실라누스 부자에게 불리한 죄목을 덮어 씌우고 조작된 증거들을 이용해 이들을 공격한 뒤 정맥을 잘라 고통스럽게 죽였다. 이후에도 네로는 친족 살해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가 몰락할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1.4. 옥타비아와의 이혼과 아내 살해[편집]


브리타니쿠스와 소 아그리피나를 모두 없앤 네로는 어머니를 죽인 뒤 3년간 어떻게든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대해 네로를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네로가 자신을 과대평가한 만큼 세네카 등이 이혼만은 안된다고 조언했다고 해도 씨알도 먹힐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네로는 자신의 친부 아헤노바르부스, 사촌누나 메살리나와 마찬가지로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려고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고대 기록 곳곳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는 자신의 눈 앞에서 남동생이 독살되고 남편이 뻔뻔하게 "간질을 앓고 있어서 그런거다. 놀라지 마라"며 거짓말한 가운데에서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감정을 절제했다. 이는 놀라울 정도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정신력과 자제력을 보여준 일화가 되었는데, 이후에도 네로는 끊임없이 옥타비아의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기 62년 네로는 불륜 관계를 맺고 있던 포파이아 사비나가 임신하자마자, "옥타비아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혼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옥타비아는 네로의 정통성 기반이었고 누가 보더라도 옥타비아가 불임이라는 것은 로마인들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네로의 핑계였다고 한다. 따라서 네로는 계획을 바꿔 <율리우스 간통법>을 이용해 옥타비아가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캄파니아로 추방시킨다. 이와 동시에 네로는 옥타비아가 병으로 치료받지 못하게 방치하면서, 옥타비아가 불만을 표한 것을 이유를 들어 기어이 옥타비아를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보낸다.

결국 참다 못한 로마인들은 네로가 유부녀, 그것도 친구 오토의 아내를 빼앗아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정숙하고 문제 없는 아내에게 간통죄를 뒤집어 씌우고 인간말종의 교과서처럼 행동한 것을 질타했다. 이는 단순한 질타가 아니었는데,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로마와 이탈리아 서민들은 옥타비아의 초상화를 앞세워 "당장 죄없는 황후를 복귀시켜라"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까지 벌이며 네로의 악행을 지적하고 당장이라도 네로를 죽이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에 크게 겁먹은 네로는 옥타비아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며 재혼하겠다고 했다가, 시위가 잠잠해지자마자 마음을 바꿔 아예 옥타비아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때 네로는 모든 고대기록들이 언급하듯, 비양심적이고 잔인했는데 일단 옥타비아를 대역죄로 죽이기 위해 옥타비아의 시종들을 잡아 고문해 옥타비아를 죽일 증거를 조작했다. 당연하게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옥타비아의 시종들은 고문으로 죽거나 이후 네로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모조리 살해됐다.

이렇게 차근차근 증거조작으로 옥타비아를 없앨 명분을 만든 네로는 기어이 처형인들을 보내 옥타비아를 대역죄인처럼 포박케 한 다음 자살하는 형태로 잔혹하게 죽인다. 아울러 네로는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자신의 선물로 옥타비아의 머리를 받겠다면서 전처를 죽인 뒤 머리를 가져오게 한 다음 확인까지 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혈육이자 모든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는 황후임에도 로마의 아주 전통적인 대역죄인 사형방식으로 불명예스럽게 살해됐다. 이때 일에 대해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고대기록들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죄인처럼 포박된 뒤 정맥을 잘리고 뜨거운 증기 목욕탕에서 질식해 죽는 방식으로 자살로 위장돼 살해됐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네로의 판단과 달리 로마인들은 이 사건이 알려진 직후 네로의 잔혹함에 혀를 내둘렀고 불쌍한 옥타비아의 시신까지 능욕된 것을 알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옥타비아의 언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를 비롯한 몇 안 남은 황족과 친황실파, 원로원과 일반서민들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끔찍한 종말과 입양자 네로의 인간말종 행동으로 인식했고 이는 취약한 정통성을 가진 네로가 로마 대화재 직후 실언을 한 행동과 맞물리면서 네로의 비상대처 능력과 별개로 함량미달의 폭군으로 단단히 찍힌 큰 사건이 됐다.


1.5.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편집]


네로는 즉위 초 몇년을 제외하곤 어머니, 아내, 양동생이자 처남, 실라누스 부자, 친고모 등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로마인들에게 젊은 황제가 얼마나 잔혹한 지 단단히 알려준 일화가 됐다. 아그리피나라는 제어장치와 옥타비아를 비롯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혈육들이 대부분 네로의 손에 사라진 것은 네로가 아우구스투스 이래 유지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광을 서서히 잃게 만든다. 따라서 네로는 로마인들이 말하는 미덕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겉으로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네로는 서기 59년 이후 자제력이 상실된데다 제위에 오른 지 시간이 흘렀음에도 미숙했고, 불법과 증거조작을 통한 악행을 당연시 여겨 통제 불가능한 황제가 된 상태였다. 설상가상 세네카와 부루스가 본인들의 이익에 따라 네로에게 통제를 가한 조치들은, 세네카와 부루스조차 갓 성인이 된 네로를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어 시간이 흐를수록 네로의 방종은 그 수위가 악화됐다.

세네카는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구석이 많은 노련한 권신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칼리굴라 암살계획 음모 혐의로 기소돼 사형 판결을 받았고[28][29], 부정부패고리대, 불법적인 노예 양성과 인신매매 등의 문제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두 황제 모두 '진짜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갈았을 정도로 그 능력과 별개로, 뒤가 많이 구린 사람이었다[30]. 따라서 그는 62년 보좌의 한 축으로 있던 근위대장 부루스가 병에 걸려 죽고, 그 후임 근위대장으로 등장한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가 네로의 지시에 따라 이전까지 견제받지 않던 자신을 뒷조사하자 이를 걱정했다. 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세네카는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과 위협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결심했다[31]. 이에 세네카는 네로에게 고령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한 뒤,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물론, 이때 네로는 잔인함과 별개로 천성 자체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소년시절부터 자신의 스승이자 조력자, 자신의 일등공신인 세네카에게 환대까지 하면서 그의 은퇴를 아쉬워했다.

이렇게 세네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은퇴한 이후, 네로는 아직 미숙한 상태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32]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33]라는 장관직을 주고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으며,[34] 부루스를 대신할 사람으로는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35]를 선택했다.

자신은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36]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장환상적이었다고 한다.[37] 그 광경은 실로 클라스가 다른 중대장 축구, 부장님 개그였을 것이다.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명색이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고, 전차경기장이나 음악 경연장에서 워낙 모습을 자주 드러내다보니 실력 여하를 떠나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38][39] 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 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다만 네로 사후에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먹는 막장군주들이 속출한 덕분에 오히려 네로 치하를 그리워했다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40] 일례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41]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42]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통치는 그들보단 훨씬 잘했지만.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국방,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서방에서는 라인 방어선을 책임진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와 브리타니아 전선의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국경지역을 보호하고 영토를 확장시켜줬다. 동방에서도 두 명의 장군들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바로 코르불로베스파시아누스였다. 특히 동방 정책을 담당한 두 장군 중 전임자로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는 훌륭했다. 따라서 로마는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냈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 1세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 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네로 황제가 국가반역죄다 어쩐다 한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은인이니까 계속 축제 열어도 괜찮겠음?" 하고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문제는 정작 네로 본인은 이걸로도 까였고 덕분에 한동안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그래도 로마는 베스파시아누스부터 도미티아누스 때 까지 네로의 대 파르티아 정책을 수용했고,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가 유대 반란을 진압할 때 4만의 기병을 지원해 주었으며, 69년 내전기에도 베스파시아누스에게로 승기가 기울자 원병을 제의하기도 했다. 파르티아는 대단히 만족한 이 협정을 박살 낸것은 로마였는데 파르티아가 반란진압을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했을때 베스파시아누스가 거부한 것으로 관계가 다시 차가워졌고 이후 파르티아와 다시 전쟁을 벌인 이는 트라야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출정은 파르티아가 쳐들어와서 한 게 아니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의 정책을 파기하고 출정한 정복 전쟁[43]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반란과 파르티아 토호들의 저항으로 그 트라야누스도 파르티아를 정복하는데 실패했다. 비록 네로의 이 정책이 코르불로의 구상을 받아들인 쪽에 가깝지만 동시에 코르불로의 동방 질서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낮은 이해도를 엿볼 수 있다.


1.6. 계속되는 폭주와 사촌형 살해[편집]


네로는 64년 자신의 연극 데뷔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부자와 상류층들에게 평가가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네로는 이 무렵부터 예전과 달리 몸이 점점 비대해져 갔고, 완전히 자기절제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내세우면서 유흥과 사치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네로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고 열혈한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그리스에서 들어온 것을 사랑했다.

이때 네로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소비한 사치품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은 장미였다. 따라서 네로 시대 동안 팔라티노 황궁 안에는 네로의 명에 따라 황제 개인 방에 늘 장미꽃잎이 뿌려져 있었고, 장미로 만든 향수를 뿌린 새가 방 안을 날아다녔다. 또 그는 장미향을 사랑해 향수도 남들보다 많이 썼다. 그리고 그는 아라비아나 근동에서 가져온 온갖 사치품들을 물쓰듯 소비했는데, 대부분의 사치품들은 로마나 제국 내 대도시들에서 한 해 소비하는 양과 거의 맞먹을 정도거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조차 어려운 향신료 같은 물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네로의 이런 호화로운 생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네로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조직들을 이용해 로마 내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날조된 죄명을 덮어 씌워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방계 황족들까지 반역죄를 덮어 씌워 즉결 처형한 뒤 재산을 빼앗았다. 그 결과, 선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비롯해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이 네로에 의해 '인기가 많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때 이들의 자녀 및 손주들까지 네로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중 평소 자기 자신을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대놓고 내세운 데키무스 실라누스 내외 외에는 모두 뚜렷한 죄목도 없어서, 네로의 행동은 정치적인 이유도 전혀 없는 범죄 그 자체였다. 또 네로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칼리굴라의 반대파 숙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고, 연좌죄 등을 대놓고 활용했다. 그래서 로마의 여러 전통들을 황제 스스로 깨버린 행동들이라고 당대사람들에게 씹힐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친족 숙청 중 58년 벌어진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추방 및 처형 사건은 누가 보더라도 악질적이었다. 그래서 네로가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반역죄로 기소할 당시부터 문제가 많았다.

고대기록상 네로는 확실히 사촌형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두려워했고 그가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그의 직계조상 술라처럼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네로의 증오심과 질투처럼 비열한 악인은 아니었다. 네로가 그를 미워한 이유는 먼저 이 사람이 아우구스투스 후손이라는 점[44],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생전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낙점될 뻔한 점[45], 마지막으로 네로가 연정을 품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인데다 인기 많고 기품 있는 황족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로는 이런 사촌형을 진짜 미워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파우스투스가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인 것을 가진 점을 비난하면서 "숱이 없는 대머리"라고 지속적으로 놀렸고, 일찍부터 사람을 붙여 뒤를 캤다. 하지만 펠릭스는 본래부터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고, 황실 일원임에도 정치적 음모와는 전혀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사촌형을 진짜 두려워 했고 죽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분명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고 판단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티겔리누스에게 명을 내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제거하려고 조작된 사건을 터트렸다.

그 결과 네로는 서기 55년 이전의 근위대장 부루스가 자유민 팔라스와 공모해, "파우스투스 술라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고 재판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파우스투스는 애당초 팔라스, 죽은 부루스 같은 인사들과 거리도 멀었고, 목적 자체도 클라우디우스 시절 고위관료를 지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이기도 한 팔라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엮어버린 탓에 재판 방향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따라서 재판 진행 내내 팔라스와 파우스투스를 엮으려고 한 시도는 실패했고, 팔라스와 파우스투스를 모두 엮어 제거하려는 계획도 실패했다.

이렇게 티겔리누스를 앞세워 파우스투스를 기소했던 것은 성공했지만, 네로의 파우스투스 제거 계획은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네로와 타겔리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3년 뒤 다른 자유민을 반란 혐의로 기소하면서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어거지로 재기소했다. 그러나 이때도 파우스투스를 바로 죽이기 못했다. 왜냐하면 자유민의 입을 통해 "펠릭스가 네로를 공격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했어도, 타키투스가 지적했듯 이 사건은 실체도 없었고 그 자유민은 증거 없는 거짓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재판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무죄가 증명될 정도로 실체가 명확했다고 한다. 따라서 59년 네로는 펠릭스를 갈리아의 마실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끝내야 했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억울하게 유배된 이유는, 네로가 재판에서 "펠릭스가 그랬을 것"라는 자의적 해석과 어거지로 유죄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로는 이정도 선에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3여년 뒤인 62년, 아주 비열하고 은밀한 명령을 내려, 감옥에 있는 사촌형을 암살하고 그 증거로 그의 머리를 로마로 가져오라고 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티겔리누스는 명을 받은 뒤 불과 5일 만에 갈리아의 감옥으로 갔고, 저녁식사 자리에 있던 파우스투스 술라를 죽였다.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파우스투스 술라 사건은 애당초 목적 자체가 매우 불순한 사건인 탓에, 후에 벌어질 피소 음모 사건처럼 그 전말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네로는 막장군주들이나 할 만한 일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데다 피소 사건 이전에 처형이기도 했던 파우스투스의 아내를 노리고 실제 근친상간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 내 소문을 통해서만 여동생과 근친상간 소문이 돈 칼리굴라와 달리, 네로는 당대부터 이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다. 이 내용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오는데,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를 토대로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 기록한 그의 스타일과 플라비우스 왕조와 이 왕조 이전과 가장 가까운 네로 시대에 대한 그의 정확한 기록 특성상 이는 사실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근친혼이 빈번한 로마 귀족들과 원로원에서도 파우스투스 술라의 추방과 처형, 이후 벌어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처형사건은 다소 쇼킹할 일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네로 한명으로 바꾼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선 스스로의 정통성을 끌어올린 사건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네로 몰락의 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류층이나 로마 지식인들 사이에서 해당된 일이었을 뿐이었고, 아직까지는 민중들에게 이런 막장행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류층들의 네로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1.7. 로마 대화재[편집]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다. 우선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 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 중 4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에서도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고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유명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46] Nero Burning Rome 그 자리에 엉뚱한 걸 세우니까 이런 말을 들은 거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연구와 주장이 등장했다.[47] 반대되는 주장에 따르면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전차를 몰고 달려가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였다고 한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슬렀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한 데다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대화재를 네로가 직접 일으켰다면 네로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다. 네로가 아무리 폭군으로 악명 높더라도 그런 일로 정치적 생명을 말아먹을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48]

그러나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가 화재와 무관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었고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로의 명령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퍼졌다.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이미지 쇄신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네로는 폭군답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방화사건을 날조하여 만만한 자들에게 뒤집어씌우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희생양이 바로 기독교도들이었다. 마침 당시 로마에서는 국가의 행사에 "기독교도로써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지는 축제에는 참석할 수 없다"며 불참하고 군대에도 "기독교도는 이 세상 군대의 병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대의 병사다"라며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사실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네로 재위기간에는 콜로세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명) 원형 경기장이다. 다만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처형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설은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 + 《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로마'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콜로세움을 떠올릴 만큼 콜로세움 자체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기록이 1세기 경에 유일하게 예수를 기록한 타키투스의 기록에서만 존재 한다면서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이는 해당 기록이 나온 연대기를 잘 모르고 하는 억측이다. 해당 기록에서 예수를 서술했다는 부분 자체가 네로의 기독교인 탄압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보는 기록도 아니다. 직접 본문을 보자.
...결과적으로 그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 네로는 그들의 혐오감을 주는 행위 때문에 증오받 았던 단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가장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들은 대중에 의해 그리스도인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라는 사람에 그 기원을 둔다.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재위기간에 우리 행정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으로 고통받았던 사람이다. 이 부패한 미신은 잠깐 동안 억눌려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신앙이 처음 발생한 유대지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혐오스러운 것과 흉악한 것들이 밀려들어와 횡행하고 있는 로마에도 세력을 뻗쳤다

네로는 기독교도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했다고 하며, 십자가에 매단다던가, 화형시킨다던가 별의별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처형으로 자신에게 전가되고 있는 의심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려고 했으나 오히려 시민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찔리는게 있으니까 저렇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거지하면서 루머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초대 받고 경기장에 구경온 시민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타키투스 연대기-

이때 주범으로 몰려 죽은 대표적인 두 사람이 그 유명한 베드로바울로이다.


1.8. 화폐개혁[편집]


64년 발생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은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되었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팔라티노 황궁의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49][50]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설상가상으로 네로의 사치는 여전히 심해 국고를 곧 바닥나게 만들었고, 화폐가치는 예전보다 급락했다.

따라서 네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골격을 유지한 새로운 통화 제도를 발표했다. 새로운 아우레우스(표준 금화)의 무게를 예전보다 10% 가량 줄이고, 데나리우스(표준 은화)의 은 함량 역시 비슷하게 줄여 네로의 새 통화 조치는 금화와 은화 간의 가치 차이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이때 동화를 새롭게 도입하고 예전보다 로마와 그리스 화폐 간의 균형화를 추진시켜 제국 내 통일 화폐 기준을 새로이 만들었다. 네로 시대 이후 제국은 필요시에 은화 함유량을 줄였다 원상복귀 했다를 반복했지만 기본적으로 점점 은화 함유량이 줄었다. 이는 오현제 시대에 특히 더 심해진다.

하지만 네로의 이 조치는 당장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물가가 10% 가량 오르게 만들어, 네로는 로마에 거주하던 하층민들에게 제공된 곡물 구호 정책을 해외의 모든 빈민과 로마 거주 서민들에게까지 확대 제공해야만 했다.


1.9. 몰락[편집]



1.9.1. 피소 음모[편집]


대화재 이후 네로의 인기는 로마의 모든 계층 사이에서 추락하기 시작했고, 이런 여론은 네로의 잇딴 실언과 로마 재건 사업 발표와 맞물리면서 더 악화됐다. 그리고 네로가 65년 제2회 로마 올림픽을 개최하고 참가한 같은 해 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 암살 계획, 즉 ‘피소 계획’이라고 불린 네로 암살 미수 시도가 발각된다.[51]

결론부터 말하면, 피소 음모 혹은 피소니아 음모로 불린 일명 피소 사건은 로마 제국과 로마 귀족 사회, 로마와 이탈리아 사회 전체에 네로의 잔혹함과 독재적 학정을 알리고 네로와 본가 일족 전체가 제거돼 멸족한 사건이 됐다. 간단히 말하면, 로마 대화재보다 네로 몰락과 폭군 단죄 모두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피소 음모 사건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밑에 나올 희생자 명단에서 확인되듯, 속된 말로 "꾸어온 자식" 네로가 제 손으로 '아우구스투스-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칼리굴라, 브리타니쿠스'로 이어진 아우구스투스 직계 일가와 그 친구들을, 세네카와 그 조카 루카누스 외엔 거진 엮여 누명을 쓰고 제거하면서 자살골을 제대로 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상류층과 중산층, 서민층 모두 "네로가 아우구스투스 일족을 끝장내고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 흉내를 낸다"는 확신을 갖고 네로를 별종이 아닌 괴물로 인식하게 된다.[52] 따라서 이 사건은 네로가 승리한 것 같았음에도 네로가 자살하고 아헤노바르부스 가문과 그 친인척까지 종국적으로 연좌제 형태로 단죄된 비극이 됐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네로가 여러 번에 걸쳐 방계황족과 부자들에게 죄를 덮어 씌워 반역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유배, 사형, 자살, 사형 후 효수 등을 벌이면서 원로원, 근위대, 황궁 관료 전반에 두려움과 적개심이 번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뚜렷하게 없었고, 이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은 모두 친분을 나눈 저명한 인사들이었는데 이들 일행 중 한 명인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가 통상적으로 가족이 없는 부자들이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면서 한 일이 의심을 받으면서 커지게 됐다.

피소 계획을 밀고한 스카이비누스의 해방노예인 밀리쿠스 부부는 주인 스카이비누스의 재산 정리 당시 옛주인의 재산 일부를 받고 많은 돈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는 스카이비누스가 자신에게 단검을 갈아둔 뒤 지혈대와 함께 보관하라는 말을 의심했다. 또는 네로 시대 판결문처럼 네로 제전이라고 불린 5년제 기간 중 피소를 옹립하려는 계획의 실패를 생각한 스카이비아누스 집안 하인 부부가 밀고하면서 들통났다고 한다. 어쨌든 스카이비아누스의 하인 밀리쿠스는 이 집안 하녀였던 아내와 상의 후 자신의 주인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고 로마 교외에 머물던 네로에게 달려갔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던 네로는 두 번째 올림픽 성과에도 불구하고, 맨앞에 앉아서 형식적으로 환호한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불만은 있어어도 모두가 자신을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증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네로는 암살 음모라면서 날카로운 단검을 증거로 가지고 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경호가 잘 되는 팔라티노 황궁이 불에 탄 까닭에 교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당시, 정국의 여론 변화도 피소 음모를 권좌 찬탈 음모로 확대시켰는데, 그 중 네로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 건 원로원과 기사계급,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전 임페라토르들보다 혐오스럽게 독재를 한다”, “지나치게 그리스, 근동 출신 인사와 피해방인들에게 권력과 영향력 있는 자리를 내리고, 본국이나 다른 속주 출신을 차별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로는 2명의 근위대장 중 자신에게 헌신하는 악질 중의 악질 티겔리누스에게 총수사권을 부여하면서, 증거가 명백하게 되어버린 스카이비누스를 즉시 체포해 심문케했다.

증거는 나름 명확했고, 총수사는 악랄하고 유명인사와 부자들이라면 사람을 붙여 어떤 꼬투리라도 잡던 티겔리누스가 담당한 만큼, 사건은 이전 네 명의 황제 시절이나 과거 로마의 사건들보다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티겔리누스 밑에 있던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대대장 수브리우스 플라부스가 심문 보고 및 체포를,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베테랑 백인대장 술피키우스 아페르가 황제 네로와 상관 티겔리누스, 수브리우스 플라부스에 입맛에 따라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를 관리하고 증거조작을 담당했다.

의심만을 이유로 끌려온 스카이비누스는 고문실로 끌려온 뒤 생전 처음 보는 온갖 고문기구까지 심문에 동원되자 견디지 못하고 심문자가 원하는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티겔리누스의 의도대로 명문귀족으로 인품과 능력 모두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중년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네로의 스승 세네카를 비롯해 젊고 유명한 시인 루카누스, 풍자작가 페트로니우스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명사들의 이름이 계속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 첫 조사 후 가담자 중에는 이듬해 집정관에 선출된 라테라누스 등 원로원 지도급 의원들과 티겔리누스와 함께 근위대장으로 있던 루푸스까지 심문하던 중 연루됐다고 이름이 나와 그 자리에서 심문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더 우습게 된 것은 피소 사건이 종반으로 치닫게 될 시기에, 희생자 명부를 관리하고 증거조작을 책임진 실무자 술피키우스 아페르와 그 부하들이 느닷없이 반역죄에 엮어 제거된 일이다. 아마도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비밀을 알고 있던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벌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피소 음모를 의심스럽게 보는 이들이 이 사건을 삐딱하게 보고 의심한 이유가 됐다.

이렇게 로마에서 이름 있는 명사나 유력자들이 죄다 피소 음모라는 대형 국가반역죄에 이름을 올렸다.

스카이비누스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다음 심문 대상으로 선정한 인사는 '심정적 공화주의자'로 의심받고 있던 시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루카누스였다. 세네카의 조카인 그는, 숙부 세네카처럼 히스파니아 코르두바 태생으로 로마로 온 이래 수사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루카누스는 총 열 권으로 된 서사시 <내전기>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원수정 체제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드러냈는데, 친척 세네카의 영향을 받아 수사학과 스토아 철학적 요소를 미완의 문제작에 지속적으로 넣었다. 그리고 결국 그 작품을 비롯해 그의 행보 등은 고스란히 네로 암살 미수 계획의 또 다른 증거가 되었다.

세네카의 조카 루카누스는 젊고 건강했지만, 본인의 작품에서 보인 당돌함과 달리 그 역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슷한 이름을 댔다. 그는 세네카의 이름 등을 언급했고, 자신의 모친 이름까지 심문 중 불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한 심문보고서가 나왔을 때, 증거와 증언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진 네로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다행히 네로를 죽이고 황제로 내정되었다고 의심받은 피소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근위대가 자신을 체포하기 전 자결해 조롱받고 비참하게 죽지 않았지만, 다른 인사들은 변호나 명예의 기회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그래서 라테라누스, 세네카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자택에 있던 중 느닷없이 체포돼, 변론조차 못하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맥을 끊고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방식으로 죽었다.[53] 하지만 이때 확실히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스토아 철학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 같이 억울하게 희생된 유명인사들도 있어서, 네로의 행동은 로마 귀족들의 최고 덕목인 위엄(디그니타스)와 자유(리베르타스)까지 손상시켰다고 비난받았다.

“이렇게 수많은 명사들을 참살한 뒤에, 마침내 네로는 미덕 그 자체도 근절시키려고 했다.”

타키투스, <연대기>


아울러 네로는 이 무렵, 상술한대로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하려고 했다가 차이게 되자, 마지막 남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클라우디우스의 장녀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또 그는 피소 음모 사건을 대규모 모반사건으로 확대해 근위대 장교, 원로원 의원 등을 ‘정적 제거’라는 목적으로 19명을 사형, 13명을 추방한 뒤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거둬들였다.

특히 62년, 갈리아에서 추방생활 중인 파우스투스 술라를 잔인하게 처형한 이후, 불과 4년 뒤 피소 음모 사건과 엮여 처형당한 마지막 남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직계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억울한 죽음은 네로에게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완전히 멸문당한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원로원 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세력과 네로의 끈은 이때 끊어지게 됐다. 이에 따르면 당시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장녀로 엄청난 미인이었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파우스투스 술라의 아내)[54]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싶어해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가 죽자마자 결혼하자고 고백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네로보다 7살이나 많은데다 네로와는 법적으로는 남매, 혈연상으로는 5촌 이모였고 남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터였다. 그래서 고백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를 희화화하고 남편 파우스투스 술라와 여동생 옥타비아, 남동생 브리타니쿠스, 심지어 사촌언니인 네로의 친모 소 아그리피나까지 잔인하게 죽인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장같은 프로포즈를 단칼에 거절했다. 따라서 마지막 황실 직계였던 그녀는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피소 음모 사건 직후 남편 파우스투스 술라처럼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반란 시도 유죄 선고 후 처형당했다.

이 결과, 타키투스에 따르면 피소 음모로 불린 이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 다음과 같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됐다고 한다.

* 처형/ 강제 자살 : 피소,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 세네카, 루카누스[55]

, 아프라니우스 퀸티아누스,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 클라우디우스 세네키오, 불카티우스 아라리쿠스, 율리우스 아우구리누스, 무나티우스 그라투스, 마르키우스 페스투스, 파이니우스 루푸스, 술피키우스 아페르[56], 막시무스 스카루스, 베네투스 파울루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

* 추방형/모욕형 : 노비우스 프리쿠스, 안니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길리티우스 갈루스, 루프리우스 크리스푸스, 베르키니우스 플라부스, 무소니우스 루푸스, 칼비디이누스 퀴에투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블리티우스 카풀리누스, 페트로니우스 프리쿠스, 율리우스 알티네세, 막시무스, 카이디키아[57]

-

* 임시사면/무죄 : 안토니우스 나탈리스, 케르바리우스 프로쿨루스, 스타티우스 프로시무스[58]

, 갈비우스 실바누스[59], 아킬리아 루카나[60]


위에 언급된 이들은 그나마 이름 있는 41명의 희생자로 전현직 원로원 의원은 19명, 기사계급은 7명, 군인은 11명, 여성은 4명이며, 이중 황족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1명이다. 그런데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이 말했듯이 피소 사건은 마무리됐다고 선포됐음에도 이후 베네벤툼의 음모, 코르불로 강제 자결 사건 등이 이어지며 게속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실제 이 명단 외에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조상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발표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상당히 많았고, 추방형, 모욕형, 임시사면,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네로와 그 추종자들의 압박, 협박으로 거진 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전까지 사면을 받지 못해 후손들이 몰락귀족이 되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피소 음모 사건 연장선에서 네로가 터트린,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처형 사건은 근친상간이었던 이유 외에도 황제가 피소 음모라고 불린 대형 숙청 사건에 어거지로 사적 감정까지 뒤집어 씌운 탓에 여론을 더 악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네로는 피소 음모 사건을 빌미로 계속해서 음모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숙청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이전의 파우스투스 술라,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부부 처형건이나 피소 음모 사건으로 네로는 폭군 이미지를 제대로 굳히게 됐다.


1.9.2. 그리스 순회 공연과 코르불로 숙청 사건[편집]


대화재와 제위 찬탈 음모 사건을 경험한 네로는 이런 상황에서 66년 가을 또 다시 말 많던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다. 네로는 첫 순회 공연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 등을 여행하며 가수이자 배우이며 전차경기 기수[61]로 활동했다. 이때 네로는 1,808개의 상과 우승 트로피를 독식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환영회와 호평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67년 그리스인들의 염원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부터의 그리스 해방 조치를 선물로 하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유대인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환한다. 그 이유는 소위 '베네벤툼의 음모'로 알려진 네로 암살 시도 때문이었는데, 이 사건은 코르불로의 맏사위 비니키아누스가 피소 음모 사건으로 억울하게 살해당한 동생 안니우스 폴리오의 원수를 갚고자 일으킨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베네벤툼의 음모로 불린 이 사건은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장교들도 연루됐는데, 67년 발각됐고 비니키아누스는 자결해 조사도 완료되지 못했다. 아울러 조사 과정에서도 그 실체도 뚜렷하게 없어 피소 음모 사건처럼 흘러갔다고 한다. 하지만 네로는 코르불로와 게르마니아 사령관 2명을 의심했고, 이들을 모두 자살케했다. 이때 그가 의심하고 경계한 장군은 코르불로였는데, 이는 비니키아누스가 딸만 둘 뿐인 코르불로의 실질적 아들과 같았던 점과 코르불로가 황실의 인척인 것이 있었다고 한다.[62]

이 당시 코르불로는 비니키아누스가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도 못했고, 확실히 사위의 행동과 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코린트 항을 통해 최대한 빨리 달려왔는데, 아마 그는 유대 전쟁에 관한 보고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코린트 항에 내린 직후 코르불로에게 내려진 명령은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하라며 칼을 보낸 조치였고, 코르불로는 육지에 내린 직후, 울분에 찬 나머지 "악시오스!"[63]라고 그 결백함과 충성심을 밝힌 유언을 남긴 뒤 자결했다. 이 명령은 코르불로와 함께 의심받은 다른 두 장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그들 역시 영문도 모르고 네로에게 달려갔다가 똑같이 칼을 받아들고 자결했다.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코르불로[64]와 게르마니아 사령관 2명의 억울한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떨어져 나가는 네로의 인기를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특히, 코르불로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경악하고 분개하는 장병들은 진짜 많았다. 그래서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대 일부 장교와 병사들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후 네로에게 반기를 든 빈덱스를 제압한 게르마니아 일대 병사들은 아예 네로에게 불신임을 선언해버린다.

그럼에도 네로는 세 장군을 의심해 자살케 한 행동을 심각하지 않게 여겼고, 예정대로 그리스 바로 동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일대를 여행한 다음 이집트를 유람하기로 결정내렸다. 하지만 그의 여행 계획은 즉각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코르불로 사후 1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네로에 대한 불만은 과거 그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혼낼 때 항상 하던 말인 “로마인답지 않은 행동과 태도”에 대한 로마 상류층과 군인들의 불만, 그동안 전임자를 비방하고 황족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한 부도덕함, 사치를 위해 이탈리아 내 사유지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대규모 농장들을 탈취 및 몰수한 조치, 군단병들의 급여 체불, 속주세 인상 등이 복합적으로 터져서 발생한 반란이었다.


1.9.3. 고립과 최후[편집]


“우리는 황제에게 반항해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오.네로는 로마 국을 약탈했소. 원로원의 꽃이라는 꽃은 죄다 뽑아 버렸소. 그는 방탕으로 신세를 망쳤고, 어머니를 죽인데다 군주같지도 않소! (중략) 대체 누가 이런 네로를 황제라 부르겠소?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저항하며 일어설 때요! 여러분 스스로를 구하시오! 로마인을 구하시오! 세계를 해방시키시오!”

타키투스, <연대기> 중 휘하에 10만 명 이상을 모은 “빈덱스의 네로 탄핵 발언” 중 일부


67년 말, 네로가 서둘러 로마에 돌아왔을 때, 그와 원로원의 관계는 이미 티베리우스 말년이나 칼리굴라 암살 직전 이상으로 냉랭했다. 원로원은 더 이상 네로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네로는 쾌활함과 별개로 직계친족을 죽이거나 방계황족을 연이은 숙청할 때도 율리우스 가의 두 황제처럼 죄인을 법정에 세워 원로원을 통해 판결 후 사형이나 추방형을 명하지 않아, 원로원과 국정운영 헤게모니를 놓고 대립한 다른 황제들과 그 결이 다르다고 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로원은 피소 음모 직전에 이미 네로를 과거 티베리우스나 가이우스(칼리굴라)보다 최악으로 여겼고, 이 문제를 그의 지나친 그리스 애호 행보보다 더 지탄했다. 여기에 더해 네로는 헬레니즘 왕국 군주들도 사용하지 않은 비열한 암살이나 독살 등을 저질러 로마인답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따라서 재산몰수, 연좌죄 시행 등은 그의 그리스 문화애호와 엮여 원로원과 황실 관리들에게 네로는 혐오 그 자체였다.

반면 네로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네로는 자신이 로마로 돌아온다면 평민들에게 시혜를 제공하고 근위대가 자신을 철저히 지켜준다는 점, 자신이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남성친족이라는 이유 등에서 인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일찌감치 제 손으로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직계혈육을 살해한 탓에 원로원 내 친황제 세력에게조차 보호받기 힘든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 군단병들은 네로 재위 말년부터 임금 체불 문제 등으로 불만이 상당했는데, 코르불로를 비롯한 존경받는 장군들이 연이어 숙청되자 네로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성이 아니며 군사적 영예조차 다른 황제들과 달리 없다는 부분을 심각한 결점 이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원로원 내부는 빈덱스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오랫동안 클리엔테스로 있던 갈리아에서 반 네로 봉기가 일으키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빈덱스의 반란은 그가 강력한 군을 거느리거나 다른 군을 포섭하려고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네로 탄핵 연설로 호소했던 탓에 네로는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네로에게 반기를 든 빈덱스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총독 갈바와 루시타니아(오늘날 포르투갈)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선황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친구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루푸스는 빈덱스와 결전을 벌여 반란군을 격파했고, 루푸스에게 패배한 빈덱스는 패전 후 자결했다. 하지만 빈덱스 자살 후에도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더 이상 충성을 하지 않았고, 네로에게 불신임권을 행사한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지지의 핵심세력인 서방 속주 군단병들, 그것도 대 드루수스와 그 직계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유명한 게르마니아 일대의 로마군의 네로 불신임권 행사는 큰 충격이었는데, 이때 병사들은 그동안 라인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루푸스에게 네로를 탄핵하고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했다.[65] 루푸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게르마니아 전선 일대의 진압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다.

네로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에게 불신임을 받게 되자,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에게 어떤 선택을 할건지 압박했다. 그리고 황제를 칭한 갈바는 자신의 대리인들을 로마 근위대 병영으로 보내 자신을 지지하면 병사 1인당 8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울게 됐다. 그러자 이를 본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공적으로 만든 뒤 갈바를 황제로 추대한다. 그리고 이 무렵, 네로의 근위대장 중 한명인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휘하 근위대와 함께 공적이 된 네로를 버리고 갈바 쪽으로 붙었는데, 네로가 믿고 있던 티켈리누스는 네로와 휘하 근위대를 내팽개치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쳐버렸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배를 타고 오스티아로 도망쳐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포로 로마노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민중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 파온의[66]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67][68]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측근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69]

Qualis Artifex Pereo(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


그래도 네로가 종종 시혜자이자 즐거움을 주는 황제로 기억되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시민들과 하층민들의 원한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70] 따라서 그가 죽은 뒤 '그 시체를 테베레 강으로 던져라' 등의 별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하지만 황제 자리에서 불신임당한 뒤 자살했기 때문에 그를 죄인으로 대우하는데 시민들도 반대하지 않아 화장 이후 영묘에 묻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 밝혀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1]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출생의 영향 때문에, 네로의 탄생은 친부의 행적이 매우 불량하다고 하더라도, 축복을 받는 출산으로 평가받았다.[2] 칼리굴라처럼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역시 칼리굴라의 방침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아그리피나와의 재혼 이후에도(심지어 급사하기 직전까지도) 사위이자 양자였던 네로를 아헤노바르부스로 불렀다. 이런 배경은 네로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그 정통성이 흔들린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됐다.[3] 로마사에서도 출신 가문 남성들의 독특한 이름 대물림으로도 유명한 집안이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루키우스만 연이어 대물림해 사용하다 이후에는 루키우스, 그나이우스를 무한반복으로 번갈아 사용했기 때문이다.[4] 평민에서 시작된 씨족 가문으로, 시조 이래 여러 지파들이 공통된 프라이노멘을 사용하면서 지파에 따라 특정 프라이노멘을 지파 남성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이 씨족 가문들의 분파들이 '그나이우스'를 공통된 프라이노멘으로 모두 사용했지만, 지파에 따라 다른 프라이노멘을 자녀에게 지어주면서 각 지파를 구분했다고 한다. 그 예로 네로의 본가는 그나이우스와 함께 '루키우스'를 채택해 번갈아 사용했다.[5] 네로와 동명이인이다. 서양에서는 꽤나 흔한 일.[6] 로마의 유명한 학자 대 카토(Cato the elder)의 증손녀이자 소 카토(Cato the younger)의 누이이다.[7] 해군 제독이었으며, 악티움 해전 당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는데, 연이은 패전과 전쟁은 뒷전이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그를 배신하여 진영을 이탈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향했으나 곧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8]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꽤 중요한 황족 중 한명으로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평화의 제단에 부조로 그 초상화가 실려있다.[9]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이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인데 유아기때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동맹시 전쟁때 이탈리아 자유민들에게 로마시민권 부여를 입안했다가 암살당한 양부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달리 양할아버지, 본가 남성들처럼 상당히 완고한 원로원파 의원으로도 유명했다.[10] 가계를 보면 할머니는 소 카토의 누나 포르키아, 외가쪽 친척은 삼두파 중 한명인 레피두스이다.[11] 그나이우스가 변덕이 심하고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치열한 전쟁 상황에 적진에서 장교, 그것도 제독이 귀순한다는데 옥타비아누스 진영의 시선에서는 그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나이우스의 귀순이 부정적이고 의심스럽게 보였다면 그의 아들 루키우스는 대 안토니아와의 결혼은커녕 관직에 기용조차도 못 되었을 것이다.[12] 물론 이것만으로는 약혼을 깨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정략결혼이 대부분이고 정치적 관계가 틀어지면 이혼하는 일도 적지 않았던 당대 로마에서 결혼도 아닌 약혼을 깨는 일은 매우 흔했으며, 관습상 크게 비난받는 일도 아니었다. 특히 약속 당사자 둘이 모두 죽고 가문이 풍비박산난 상태였으니 이 약혼은 오히려 깨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13] 황제의 친척과 결혼한다는 것은 곧 황제 가문의 일원으로 대접받는다는 의미였으므로 이전에 비하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지위는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이었다. 루키우스는 비록 옥타비아의 사위였지만 자식복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사위에 견주는 지위에 있었고 이는 오히려 옥타비아누스와는 직접적인 혈연적 관계가 없는(양자) 티베리우스보다도 훨씬 옥타비아누스와 가까운 관계가 되므로 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이용한 듯, 루키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는 이러한 집안 배경과 (자기 어머니가 무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다!!!) 그의 형이 어린 시절에 죽어 사실상 외아들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엄청난 권위를 누렸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성격과 행실이 좋지 않아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여 온갖 악행을 저질러 매우 평가가 나빴다.[14]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생,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생,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년생이다. 네로의 아버지가 기원전 17년생이라는 말도 있는데, 학자들은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동명이인이 많은 특성상 기록에서도 혼동이 많아 기원전 2년생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 기원전 17년생이었던 사람은 네로의 백부로 일찍 요절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출생일이라고 말하고 있다.[15] 어머니 대 안토니아의 외모를 닮은 탓에 미녀였다고 한다. 총 세 번 결혼해 세 명의 남편에게 메살리나,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낳았다.[16] 사실 안토니우스의 두 딸을 통해서 네로와 칼리굴라는 6촌 형제가 된다. 왜냐하면 칼리굴라의 할머니가 소 안토니아이고, 네로의 할머니는 대 안토니아이기 때문.[17] 네로 사후 갈바,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제위를 놓고 다툰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이다.[18]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를 낳았고, 소 아그리피나는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낳은 3남 3녀 중 넷째이자 장녀이다.[19] 브리타니쿠스의 동복 누이로 엄밀히 말하면 친어머니를 기준으로 네로와는 5촌 사이이다.[20] 네로는 이에 불만을 품고 클라우디우스 면전에서 “브리타니쿠스는 뒤바뀐 아들이잖아요”라고 대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21] 독재관 술라의 후손으로 어머니(네로의 작은고모)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이자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었다.[22] 그리스 출신 해방노예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이들 부부의 가족, 특히 게르마니쿠스의 자녀들과 클라우디우스에게 헌신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이 사람은 칼리굴라가 세야누스에게 제거대상이 될 당시 소 안토니아의 자필편지를 품고 카프레아이 별궁까지 가서 티베리우스에게 안토니아의 간곡한 뜻을 전해 해방노예 신분을 얻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소 아그리피나가 잊혀진 존재였던 시절에도 그녀를 지지했다고 하며, 클라우디우스와 소 아그리피나의 결혼을 추천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당시 아그리피나의 복심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최측근이기도 했다.[23] 그리스 출신 해방노예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이 가문에 헌신했던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3인방 중 한명이다. 이 사람은 팔라스와 라이벌 관계였고,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브리타니쿠스 지지세력이자 브리타니쿠스를 보호하려고 한 황실 관료이기도 했다.[24]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티베리우스만큼 시민들에게 재미를 챙겨주지 않은 황제는 아니었지만 공무위주의 삶과 아내와 비서들에게 휘둘리는 황제였던 탓에 유약하다며 시민들의 경멸을 샀다. 그러니 젊고 에너지 넘치는 네로의 즉위는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충분했다.[25] 해방노예를 고위관료직에 기용한 결정[26] 의외일지 몰라도 클라우디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라는 타이틀, 온화한 인품으로 이탈리아 내 평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더해서 즉위 후 본인이 직접 주재하는 재판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억울한 판결들을 여러 번 검토 후 되돌려주는 경우도 많아서 원로원보다 평민들에게 그의 인기는 훨씬 높았다.[27] 이런 까닭에 티투스는 훗날 네로에게 살해당한 친구를 위해 브리타니쿠스 동상을 금으로 만들어 세우고 그를 기렸다.[28] 사실 칼리굴라와의 대립은 세네카 본인이 지나치게 자신의 웅변실력을 뽐내고, 신참임에도 정치계략질을 하면서 황제 심기를 건든 것도 컸다. 모난 성격에 과격하고 정적에겐 자비따윈 없는 칼리굴라가 세네카를 손보려고 한 건 당연했다. 물론 세네카는 개인기록에 "내 실력을 괄시하고 부러워하는 인간" 등으로 씹으며, 본인은 어떤 잘못 없이 그저 잘난건데 황제 속이 좁아서 미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주장했다.[29] 기소 후 빼박 유죄 증거가 나온 뒤 법정에서 본인의 뼈밖에 없는 몸매를 내보이면서 "심한 천식으로 얼마 살 지 못하니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호소해 간신히 사형집행까진 안 되었는데, 얼마 안 가 황제가 암살되면서 목숨을 부지했다.[30] 클라우디우스 시대와 네로 시대동안 가장 가난하기로 유명한 브리타니아 속주에 강제로 돈을 빌려준 뒤, 몇 배의 이자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당시 로마제국 한 해 예산 수준으로 개인 재산(그것도 이자를 빼고 원금만 이렇게 불렸다!!)을 크게 불렸다. 또 세네카는 총독까지 국고에서 속주에 투자한 돈을 횡령할 때 이를 봐주고, 본인도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북부 기근 문제로 투자된 물자까지 횡령하고 인신매매와 고리대를 자행하면서, 전임자 칼리굴라, 현황제 클라우디우스 탓이라고 그 책임까지 회피했다. 따라서 생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제 아무리 보살이라고 해도, 이를 갈았던 건 당연했다.[31] 이미 세네카는 칼리굴라에게 한번, 클라우디우스에게 한번씩 반역과 부정부패, 간통 등으로 기소돼 증거 있는 유죄로 각각 사형, 추방형에 처해져 곤욕을 치룬 뒤 재기해 기어이 권력을 쥔 인물이었다 상. 이런 이유로 그는 소 아그리피나 도움으로 복귀 후, 오랜 친구 부루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케 한 다음 자신을 견제할 인물들을 견제하거나 제거했다. [32]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나온다. 서양사에서는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 판본에 따라서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간단하게 페트로니우스라고 잘 알려져 있다.[33] 우아함을 관장하는 장관 혹은 우아함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진다.[34] 즉 취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페트로니우스의 결정이 바로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다.[35] 생선 도매상과 말 사육사로 일했던 사람으로 부루스 생전부터 네로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부루스 사후 근위대장, 소방대장, 경찰대장에 임명돼 네로 재위 후반기 동안 밀고, 고발과 무고, 납치와 고문 등을 통해 세야누스 못지 않은 공포정치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티겔리누스는 세야누스와 달리 제위를 노리지 않고, 말 그대로 네로의 통제 속에서 권력 찬탈 음모를 발본색원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36]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37] 시민들은 매우 끔찍한 시를 들으면서 강제로 환호와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싫은 티라도 냈다간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다만 어느 재치 있는 시민 3명은 훌륭하게 시 낭송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 명이 갑작스레 쓰러진 척을 하자 다른 두 명은 쓰러진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잡고 들어올려 시 낭송회를 빠져 나갔다.[38] 콤모두스의 경우 네로와 달리 진짜 검투사로서 실력이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는데 뛰어난 쇼를 많이 보여줬는데도 놀고만 있다고 욕을 먹었다(물론 콤모두스는 네로보다 더한 막장 군주다). 애초에 이들은 검투사나 예술가가 아닌 황제다. 아무리 예술이니 스포츠니 신경 써도 정치를 못하면 군주로서 실격이다.[39] 물론 이 당시, 네로의 공연과 자작시 낭송 행사에 홀딱 빠진 사람도 극소수나마 있었다. 그중 가장 이름 있는 열혈팬은 네로 몰락 후 황제가 됐는데, 그 열혈팬 존함이 그 유명한 혼군 비텔리우스다. 비텔리우스는 '네로=폭군'으로 공인된 상황에서 본인 스스로 "나는 진심으로 네로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했다. 따라서 동시대 로마인 타키투스는 이런 비텔리우스를 '존재 자체가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비이냥댔다[40] 5현제라고 칭해지고 동시대의 사람들도 황금시대 라고 말하던 트라야누스도 미소년 동성애에 대한 스캔들 논란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무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대놓고 안티노우스를 사랑하기도 했다.[41]대 카토는 네로 시대 기준으로 대략 200년쯤 전에 활동한지라, 이 사람의 가치관과 AD 1세기 로마의 가치관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그냥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42]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43] 트라야누스는 네로의 정책뿐 아니라 도미티아누스가 멋대로 맺었던 협정도 깨버리고 다키아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능력은 훨씬 출중해서 꿇릴 게 없을 정도로 선방했지만.[44] 네로의 고모가 낳은 아들이므로 네로와는 혈연적으로 사촌형이기도 했다.[45] 클라우디우스의 맏사위인데다, 혈연상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었다.[46] 처음엔 로마 대화재 이후 1500년은 지나서야 발명되는 바이올린을 켰다는 버전 역시 굉장히 유명한데 솔직히 로마 시대에 바이올린 없다는 건 웬만한 사람은 다 알면서 얘기가 안먹히자 리라 버전이 흥하게 되었다. 그래도 바이올린 버전도 아직 죽진 않아서 버니 샌더스가 2020년에 네로는 로마가 불탈 때 바이올린을 켰고 트럼프는 골프를 쳤다고 트럼프를 비난했다.[47] 네로 황제 연구, 안희돈, 다락방. 2004.[48] 이때의 화재진압과 시민들을 위한 여러 대처는 네로에 대해 혹평을 했던 역사가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49]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50] 실제로는 이름만 이렇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될 수 있는 공원과 같은 구조로 지으려 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대체 왜 도무스 라는 이름을 썼냐는 비난을 한다. 도무스가 사저를 뜻하는 단어였다고 한다.[51]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 시도 계획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20대 시절 새내기 원로원 의원 시절부터 정국의 흐름을 읽거나, 자신의 주도 아래 계략을 만들 줄 아는 인사였고, 사건 담당자 티켈리누스에겐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받고 있던 터라 결국 피소 음모 가담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52] 로마인들은 네로가 자신의 망나니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사실상 신격화하고 그 전신상과 흉상을 공공건물과 황궁 등에 황제의 아버지로 전시했을 때부터 이런 의심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대화재, 피소 음모 전까지 의심만 하다가 피소 음모 사건이 터지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그 친구들의 후손들이 거진 박살나자, 네로가 자신의 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먹고자 불쌍한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제거하고 이들의 보호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핍박하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를 성희롱한다고 수근거렸다.[53] 세네카의 경우, 그의 아내 폼페이아가 “남편을 죽이려고 한다면, 나도 죽여달라”고 용감하게 주장하면서 결백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세네카는 자신의 정맥을 스스로 끊은 뒤 서서히 고통 속에 죽는 방식으로 살해당했다.[54] 네로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법적으로 남매 사이였고, 혈연상으로는 고모뻘이 됐다.[55] 세네카의 제수씨가 되는 루카누스의 어머니 역시 자살 방식으로 처형됨.[56] 심문 조사 실무자였으나,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 후 죽임당함.[57]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의 부인[58] 사면 직후 자살[59] 사면 직후 자살[60] 아들 루카누스 처형 뒤 임시사면됐음에도 자살 방식으로 죽음.[61] 고대 로마 시대에 검투사 못지 않게 전차 기수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고, 네로의 할아버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처럼 명문귀족임에도 유명 전차기수로 활약했던 상류층들도 꽤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검투사들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권투 선수, 격투기 선수나 보디빌더 이미지에 가까운 운동선수였다면, 전차 기수는 오늘날 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같은 인기 스포츠 선수와 이미지가 더 비슷했으며 이들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62] 코르불로의 여동생은 칼리굴라의 마지막 아내였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였고, 코르불로의 가문은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오랜 친구집단 멤버였다.[63] ἄξιος, 그리스어로 '합당하다', '적합하다'라는 뜻, 당시에는 경기 우승자가 상을 받을 때 관중들이 외치는 함성이었고, 동방정교회 사제 서품식에서도 서품을 선포할 때 주교가 외치는 선언문으로 쓰인다.[64]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65] 라인 강 방어선에 주둔 중인 게르마니아 일대의 로마군 병사들과 군사기지 및 퇴역도시에서의 대 드루수스 일가에 대한 인기는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고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손자이자 아들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즉위 전부터 이 일대를 방문하고 싶어했고 군사행동 후 별다른 군공이 없는 애매한 승리였음에도 이곳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로 찬사를 받았다. 대 드루수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 황제 역시 그 인기가 대단해 즉위 직후 이곳에서 발생한 반란은 호응조차 못 얻고 자체진압됐다고 하며, 브리타니쿠스의 탄생 당시에도 이곳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 환호는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인기만큼 대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를 기리는 제사도 아우구스투스가 입법화하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열렸는데, 최소 서기 3세기 말까지 각 도시와 군단기지에서 두 사람을 기리는 제사는 전통이었고, 자발적인 축제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일대기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멸문한 이후에도 이 곳 병사들이 좋아한 위인전이자 영웅담으로 사랑받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마인츠 일대에는 드루수스 탑이 유적으로 거의 온전히 남아있다.[66] 노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네로가 해방시켜 신분이 평민이었다. 파온은 네로가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으로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67] 당시 로마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기분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으며,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맞게 된다면 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런 채찍질은 단순히 몇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하게,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렇게 얻어 맞으면 사형수는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되었다. 3세기의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뼈,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68] 참고로 예수도 십자가형을 받기 전, 군인들로부터 형벌을 받을 때 이런 방식으로 채찍질을 당했지만 본티오 빌라도가 죽지 않을 만큼만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던 것 때문에 채찍질 형벌로 인해 죽지는 않았다. 다만 이 채찍질로 인한 출혈이 누적되고, 십자가형을 받게 되면서 사망하게 되긴 하지만.[69] 이때 도착한 전령은 이를 보고 놀라서 치료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뒤였다. 그래서 네로의 자살을 도와준 측근 에바프로디토스는 자살을 도운 죄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처형된다.[70] 특히 네로를 끝까지 따르던 측근 4명이 모두 귀족이 아닌 해방된 노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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