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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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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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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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의 왕자
대령후 | 大寧侯

출생
1130년(인종 8년)
사망
미상

경(暻)
본관
개성 왕씨
부왕
인종
모후
공예태후
배우자
왕온의 딸 김씨
자녀
슬하 1녀(추정)
딸 - 계성후의 처?
봉작
대령후(大寧侯)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고려 제15대 국왕 인종과 왕후 공예태후의 차남.

고려사》에 의하면 도량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샀다고 한다.

2. 생애[편집]


인종공예태후 임씨의 둘째 아들로 모후인 공예태후는 형제들 중 유독 그를 편애하여 태자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뤄지지 않았고 형 의종이 즉위하자 갈등을 빚는다. 의종 2년(1148년) 형에 의해 대령후로 책봉된다.

의종 초에는 의종이 밀어주는 환관 정함김존중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둘은 공예태후와 연결된 외척 장흥 임씨를 비롯해 태후의 누이들과 결혼한 문벌귀족의 견제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대령후는 둘의 무고에 말려든다. 먼저 정함과 김존중이 공예태후의 매부 내시낭중 정서 등 외척 조신이 대령후의 집에 드나든다고 무고한다. 그러자 최유청, 문공원, 유필을 비롯한 재상부터 여러 대간들이 한목소리로 정서를 비난하고, 어사대에서는 정서 등 5명을 가둔다. 의종은 대령부를 폐지해버리고 대령후와 가까이 지낸 이들을 유배보낸다. 재상 최유청도 정서가 대령후를 대접할 때 그릇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남경유수사로 좌천되는 등 정서의 매부들도 연좌됐으며, 결국 의종 11년(1157년) 대령후 본인도 천안부로 유배보내졌다.

훗날 갑자기 의종 앞으로 주인 없는 화살이 날아와 꽂히자 의종은 대령후의 가동을 의심한다. 이들이 국문을 못 이기고 거짓 자복함으로 가동 셋과 그 처는 참수되고 호위를 성실히 하지 못한 14명이 유배된다.

이후 형인 의종이 폐위되지만, 차남 대령후가 아닌 3남 명종이 즉위하는 것을 보면 의종보다 먼저 사망한 듯하다. 처남인 공화후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가 사망할 당시(1186년) 대령후의 아내는 과부였기 때문.

둘 사이에서 계성후에게 시집간 딸이 한 명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계성후의 다른 명칭인 수춘후라는 이름은 종실에게 봉작되던 지역명보다는 일반적인 미칭에 가까운데 “수춘궁주의 궁호를 받은 여인의 남편”이라는 뜻의 별칭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고려의 태자궁이었던 수춘궁에 대령후의 딸이 잠시나마 기거한 것이 된다. 즉위했을때 이미 홀아비였던 명종이 후처를 들이지 않고 그냥 왕후가 없는 채로 재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 왕비의 거처로 쓰였던 흥덕궁은 과부였던 대령후의 아내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인종 시기 수춘궁은 여정궁으로 개칭되므로, 이름만 같은 다른 궁궐일 가능성도 열려 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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