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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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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의 신(神)으로 학문을 관장한다고 한다. 도교에선 업적과 명성, 녹봉과 작위를 관장하는 신으로 추앙한다. 장육(張育)[1] , 문창제군(文昌帝君), 재동(梓潼), 제순왕(濟順王)[2] , 괴성(魁星), 재동제군(梓潼帝君), 문창제(文昌帝), 영현왕(英顯王), 온조(瘟祖), 뇌응제군(雷應帝君) 등 여러 이명이 있다.
원인종 시기 굉인제군(宏仁帝君)으로 추존되어 황제(帝)와 신(神, God)을 겸하는 신황(神皇)이 되었고, 명말청초 시기 서나라를 세운 장헌충이 그의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2. 존호[편집]
3. 역사[편집]
북두칠성 중 첫 번째 별. 뛰어난 문장가는 이 별과 응하고 있다 하며 문창성에 소원을 빌면 과거 시험에 급제한다는 전설이 있다. 명나라, 청나라 시기 학문의 신 문창제군(文昌帝君)은 이 별을 신격화(의인화)한 것이며 일설에는 삼황오제의 황제의 아들 공손휘(公孫揮)가 문창제군이라고 한다.
명사에선 촉(蜀) 칠곡산(七曲山)[3] 에 거주한 장아자(張亞子)와 동일시되며 동진의 벼슬아치로 비수대전에서 전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촉왕(蜀王)을 자칭하고 흑룡(黑龍)으로 개원하여 싸우다 전사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용맹함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장아자는 당현종 시기엔 안사의 난을 피해 칠곡산에 머무른 현종의 꿈에 나타나 태상황이 될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 당숙종이 즉위하자 현종은 장아자를 좌승상(左丞相)으로 추존하였다.
881년 당희종이 황소의 난을 피하는 과정에서 칠곡산을 지나갈 때 그를 제순왕(濟順王)으로 한차례 추봉했으며, 희종의 추존 사례를 계기로 장아자는 전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시기엔 영현왕(英顯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원인종은 1316년, 그를 보원개화문창사록굉인제군(輔元開化文昌司祿宏仁帝君), 약칭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추존하였다. 이후에도 문창제군은 후에 장헌충이 대서(大西)를 세운 후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로 추존[4] 되었다.
4. 참고 항목[편집]
[1] ? ~ 374년. 비수대전 당시 전진을 막다 전사한 인물로 장아자=문창제군과 동일시되었다.[2] 당희종 추존.[3] 現 쓰촨성.[4] 《蜀碧》: 贼所过处,公廨、民居、园林、亭馆、寺观、楼阁,悉为瓦砾,所存者惟文昌、关帝二祠。盖关帝,秦人所尊,而文昌则彼推尊为太祖高皇帝者也。故重修七曲山(在梓潼)大庙,又建关帝祠於东,皆极钜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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