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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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피칭 스타일
2.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
2.2. 투구폼



1. 개요[편집]


전 야구선수 박찬호의 플레이 스타일을 정리한 문서.


2. 피칭 스타일[편집]



1996년 데뷔시즌 99mph(159.3km/h) 패스트볼[1]







92mph(148.1km/h) 슬라이더

놀란 라이언을 연상시키는[2]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3]이다. 한국 야구 역대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 순수 스터프는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확실히 상위권이었고[4] 이에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 역사상 메이저리그 평균 대비 가장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했던 투수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힌다.[5][6] 주무기는 평속 94마일[7], 최고 99마일[8]를 기록했던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포심 패스트볼과[9][10]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였다.[11] 메이저리그 말년에 주로 던진 투심 역시 뛰어난 구종으로 평가받는다.[12]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그리고 내야수(3루수) 출신답게 수비 실력도 훌륭했는데, 번트 대처 능력에 강점이 있었다.

박찬호가 세운 기록들은 역대급 타고투저였던 스테로이드 시대[13]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 고평가받는다. 당장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임팩트가 고평가받는 이유가 극단적인 타고투저 시대였던 스테로이드 시대에 약쟁이들을 평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당시에는 평균만 해도 대단했다고 봐야 하는데, 박찬호는 구위로 약물 타자들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가진 투수였다.

한때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한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14][15] 뿐이었고 그나마 구원투수 쪽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우에하라 고지가 있었으며 현역 동양인 선발투수 중에서 다르빗슈 유의 패스트볼 구위가 박찬호에 가장 근접해 있지만 다르빗슈가 쓰는 구종의 개수를 생각하면 그는 스터프 위주보다는 다구종으로 상대하는 스타일이 더 맞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인 투수는 힘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고 그 편견이 어느정도는 사실이며 특히나 올드스쿨 파워피처는 더더욱 드물다는 걸 감안하면, 박찬호의 플레이스타일은 동양인 투수 중 굉장히 이례적인 편이다. 하지만 오타니 쇼헤이의 등장으로 박찬호가 스터프로 MLB를 압도한 유일한 동양 투수는 아니게 됐다.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전성기 때는 리그에서도 1~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이다. 박찬호가 1선발급이었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이는 결국 기준을 어디 두느냐에 달린 문제다.

메이저리그 팀이 30개이니 전체 30등 안에 들면 1선발급이라는 조금 유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박찬호의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8, 2000-2001 세 시즌은 클래식 스탯은 물론이고 세이버로도 당연히 1선발급이 맞다. 반면 최소 올스타 수준, 리그 5위 안에 드는 선발이어야 1선발급이라는 조금 빡빡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클래식 스탯으로는 아슬아슬하고 세이버로는 어렵다.[16][17][18]

강력한 패스트볼과 커브볼을 기반으로 랜디 존슨에 이은 탈삼진 2위[19]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을 정도로 삼진머신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로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한편, 박찬호는 전성기 시절 97~98 마일을 최소 5번 이상은 나왔고 이러한 강속구에 80마일 중반의 파워커브 레퍼토리는 분명 기교파 투수와는 거리가 있다. 아니 사실 기교파는 말도 안되는 얘기고, 전성기 시절이었던 98시즌 전후 보다 오히려 패스트볼의 구속과 구위가 더 압도적이었던 96~97시즌 연간의 박찬호는 경기 내내 평균 95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뿌리며 경기 후반까지도 97~98마일의 패스트볼을 뿌리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었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파이어볼러 중 한명이었다. 당시 박찬호의 투구를 두고 USA 투데이의 저 유명한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인 밥 나이팅게일은 '80년대 중후반을 장식했던 강속구 투수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클래식한 강속구 투수라고 평한 바가 있을 정도였다.

'박찬호 악포심 던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이를 악물고 괴성을 질러가며 포심을 던진 적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필라델피아 필리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에서 이런 일이 좀 잦았는데 해설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습관 때문에 어금니가 망가져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남아있는 치아의 보호를 위해 대책으로 마우스가드(피스)를 착용하고 던진다.[20][21] 여담으로 이 때문인지 동양제과에서 박찬호를 모델로 '익사이팅'이란 이름의 껌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일반 껌보다 두께가 두 배 정도 굵어 씹는 느낌이 헤비하다. 실제로 많은 야구선수들이 치아보호를 위해 껌을 씹기도 한다.

류현진미국 진출 후 은근히 류현진과 비교가 되거나 재평가되고 있는데 박찬호는 전형적인 구속, 무브먼트로 윽박지르는 파워피처이고, 류현진[22]은 다재다능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박찬호처럼 우격다짐형 파워 피처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스타일이 완전 달라서 두 명의 다져스 한국선수의 경기를 모두 본 사람들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다. 젊을 적에는 사실상 패스트볼과 커브 투피치[23]로 A급 투수로 등극할 만큼 스터프로 먹고사는 스타일이었다. 90마일 초중반대에 무브먼트도 심해서 제구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삼진의 산을 쌓는 원동력이었다. 이후 여러 구질을 배우고 보완하면서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고 또 몇몇 구질은 부활의 원동력이 되긴 했으나 항상 박찬호를 상징하고 박찬호가 있게 한 것은 강력한 속구였다. KBO에서 류현진은 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었지만 MLB에서는 힘으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어서 박찬호보다는 압도적인 면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이다. 그래도 힘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구속이 빠른 파이어볼러 투수가 인기도 높고 많은 야구팬의 로망이라 전형적인 정통파 우완투수로 리그를 호령하는 한국 투수인 박찬호는 선구자 타이틀이 없어도 매력적인 투수였고, 박찬호 이후 정통파 한국인 메이져리거를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성기때는 흔히 기억되는 박찬호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투수였다. 특히 '퀄리티스타트'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정착시켰으며 박찬호의 투구를 보고 퀄리티 스타트가 쉬운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번 나오면 6이닝 3실점은 당연한거였다. 다만 삼진 아니면 볼넷일 정도로 제구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기복이 좀 있었고 볼넷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경력이 쌓일 수록 위기관리능력이 늘어 삼진과 병살로 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치고는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고는 했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1호 홈런 2호 홈런. 가장 마지막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24] 더 대단한건 3개의 홈런 모두 밀어서 넘긴 홈런이다.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박찬호는 원래 3루수로 야구를 시작했고, 소속팀 감독으로 부터 타격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2학년때 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도[25] 공주고등학교에서도 클린업을 쳤었다.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

박찬호를 비롯한 당시 92학번은 '전설의 학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들이 많은 학번이었다. 특히 투수쪽에는 조성민, 임선동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이 세 명의 투수 중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고 한다.[26] 공은 빠르지만 세세함이 부족하고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다 부상도 많았다는게 이유. 그래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의 단점을 고치는 한국 스타일보다 선수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훈련 스타일인데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선수의 몸관리를 해서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27]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그래서 중계를 하던 iTV에서도 날이 더워질 즈음엔 여름의 사나이 라던가 뜨거운 이미지와 관련된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전담포수를 둘 정도로 포수와의 호흡은 상당히 민감했다. 방망이는 좋지만 수비와 리드가 시망인 마이크 피아자, 토드 헌들리, 폴 로두카[28] 대신에 찰스 존슨이나 채드 크루터, 국가대표팀에서는 조인성같은 수비형 포수를 선호했다. [29] 그러다 점점 연차가 찬 이후에는 그다지 까탈스럽지 않은 투수로 변했다.[30]

강했던 팀과 선수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필라델피아 필리스, 제프 켄트, 에드가르도 알폰소.[31] 약했던 팀과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클리프 플로이드, 에릭 차베스, 미네소타 트윈스의 자크 존스, 그리고 박찬호 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브래드 풀머를 빼먹으면 섭하다.

2006년 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곧게 가다 살짝 떨어지는 구종. 주로 땅볼을 유도할 때 쓴다.)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 뿐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 히데키에게 강하다. 통산 9타수 1안타. (그런데 그 1안타가 홈런이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다만 가장 많이 상대한 아시아 타자인 스즈키 이치로를 상대로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상대전적은 35타석 .387/.457/.484이다.[32]

구질 욕심이 보통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투피치 피처로 구분되긴 하나, 2000년부터 재미를 보던 슬러브를 비롯, 속도가 40km/h가 차이 나는 커브를 실전에 쓰기도 했다. 또한 상술된 바 투심도 수준급이며, 너클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질을 실전에 사용하였다. 알고보면 팔색조 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당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33] 오릭스 버팔로즈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오릭스 버팔로즈의 동료 선발투수이자 포크볼러인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기도 했다.

타격도 투수 치고는 상당하여 통산 3홈런을 기록하였고, 번트가 특히 정교한 편이었다.[34] 2006년엔 시즌 중반까지 3할 초반대의 정교한 타율을 기록하면서 내셔널 리그 실버슬러거 투수부문 컨텐더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었다.[35] 이 해에 박찬호는 선발투수로 풀시즌을 보냈음에도 대타로 2번 등장하여 한 번은 무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기록했고, 나머지 한 번은 연장전에서 2사 주자 없을 때 펜스 앞에서 잡힐 정도로 큰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을 정도다. 그외 A.J 버넷의 99마일 직구를 깨끗하게 받아쳐서 안타를 만들었다거나, 브랜든 웹을 상대로 3타수 3안타 2타점을 올렸다거나 한 일이 모두 2005~2006년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2.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편집]


박찬호에 대한 논란 중 하나가 그의 최고 구속이다. 박찬호가 한창 짱짱하던 96년도 무렵에 비공식적(infomally)으로 100마일을 던질 수 있다는 의견이 미국의 잡지에도 실린적이 있지만 실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박찬호의 100마일에 대한 도시전설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패스트볼 구속이 다소 빠르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진 쿠어스 필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 쿠어스 필드의 경우 타 구장에 비해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 밀도가 약간 더 희박하고 따라서 공이 받는 공기 저항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쿠어스 필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 알려져 있는데, 공기 저항이 적은 만큼 타구의 비거리가 증가하여 타 구장에 비해 장타를 맞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쿠어스 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팀컬러가 장타를 펑펑 쳐대는 대포군단인 것도 이러한 특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타구의 비거리를 늘릴 정도로 공기 저항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 쿠어스 필드에서 평균 구속이 타 구장보다 높게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 100마일을 넘어 101(약 163km/h)마일을 던진적이 있으며 이는 당시 국내 스포츠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되었다. 이것이 실제 신문지면이었는지 TV광고에 나오는 그래픽이었는지 불확실하나 쿠어스 필드 160km라는 문자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이 100마일 또는 101마일을 던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 영상을 업로드하거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을 보도한 스포츠 신문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구체적으로 일간스포츠스포츠서울이네라고까지 말한다) 그 신문 기사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1997년에 쓰인 것인데, 이 시기까지 100mph를 기록한 투수는 놀란 라이언랜디 존슨 둘 뿐이라고 못박고 있다. 박찬호는 최대 구속이 99mph라고 적혀 있다.

흥미롭게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는 기사들이 등장하는데, 시점도 1996년과 1997년으로 제각각이다가 나중에서야 1996년으로 통일되고 있다.

주로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고 주장되는 쿠어스 필드 기록은 1996년 6월 27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이다. 그런데 다음의 두 링크를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카고 컵스전 중앙일보 기사
콜로라도 로키스전 중앙일보 기사

위 기사는 최고구속 156.8km의 강속구를 뿌렸다고 나와 있으나 아래 기사는 구속 내용이 전혀 없다. 두 글을 송고한 기자가 LA지사 허종호 특파원으로 같은 사람임을 고려할 때, 156.8km의 강속구를 기사에 적시하는 사람이 100마일이라는 희대의 대기록을 적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 상식적 추론일 것이다.

100마일이 아니라 160km를 던졌느냐에 하는 논쟁도 있다. 박찬호 본인은 스스로의 최고 구속을 160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160km를 마일로 환산하면 약 99.4마일로 100마일은 거짓이라 할지라도 160은 사실일 수도 있다. 구속에 있어 160km라는 상징성이 무슨 자로 잰 것마냥 딱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 99마일 ->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0km -> 160km와 100마일의 상징성으로 인해 100마일로 둔갑한 것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공식 사이트에서는 최고구속을 161km/h로, 1996년 5월 28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 161km/h라면 100.04마일이다. 다만 이 공식사이트 기록은 완전히 틀린 것이, 1996년 5월 28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상대팀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아닌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1996년 박찬호의 콜로라도 로키스전 등판은 총 5경기인데 6월 말과 7월 초에 5경기 모두가 몰려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져보면 1996년~97년 즈음부터 ‘박찬호 최고구속은 161km/h’라는 말이 등장한다.


2.2. 투구폼[편집]



박찬호의 투구폼

박찬호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장거리 달리기, 토끼뜀, 오리걸음, 줄넘기를 거의 매일 해서 하체가 튼실했고, 팔굽혀펴기, 턱걸이, 고무줄 튜빙 같은 다양한 운동으로 어깨, 팔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금기시한[36] 하이 키킹 동작을 했다는 점이다. 다만 하이 키킹의 경우 선수생활 후기에는 그 크기가 전성기보다는 꽤 낮았었다.

  • 장거리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를 다룬 책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에서 나오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시절 차가 없었을 때는 경기장에서 집까지 뛰어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 일부 선수들처럼 기구 웨이트 트레이닝, 롱토스, 피칭만으로 상체를 훈련하는 게 아니라, 팔굽혀펴기, 턱걸이, 튜빙 등 다양한 운동까지 추가해서 어깨, 팔을 강화한 덕분에 선수 시절 어깨, 팔꿈치를 다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비슷한 운동 동작이어도 맨몸, 도구, 각도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조금씩 다른 근육, 인대 부위를 강화한다.

  • 국내 지도자들이 금기시했던 하이 키킹을 시도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의 영원한 우상인 놀란 라이언 투구 동작 사진을 구해 부분부분 연습해 구속이 빨라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한가지 사연이 있다.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를 마치고 귀국 후 도착하니 밤이어서 바로 공주로 버스 타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날 밤만 이태일 기자(前 NC 다이노스 사장)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태일 기자의 집에는 연구를 위해 보던 야구서적들이 가득했고, 그 중 박찬호의 우상이던 놀란 라이언의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은 영어 원서이긴 했지만, 놀란 라이언이 구속을 높이는 트레이닝법이 그림으로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그래서 박찬호가 이 책에 관심을 보이자 이태일 기자가 그 책을 박찬호에게 선뜻 선물을 했다. 그리고 박찬호는 공주에 돌아와서 그 책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하이키킹 투구폼을 완성했다.[37] 물론 마이너리그 서비스 타임시절에 이 극단적인 투구폼은 손을 보면서도 강속구를 살리는 방법으로 코칭을 받았다고 한다.



루키 시절에는 폼이 저렇게 극단적이었다. 이후 저 투구폼에서 든 다리의 무릎을 접은 형태로 폼을 바꾸고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데뷔하게 된다.

[1] 960714 vs SF[2] 다만 구위 및 실력, 성적이 라이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에 MLB 진출에 성공해서 LA 다저스라는 명문 구단의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전적이 있는 박찬호가 갖는 위상은 MLB에서 놀란 라이언이 받는 위상과 비슷하다.[3] 특히나 뛰어난 구위의 패스트볼과 커브를 주무기로 했고 맞춰잡기보다는 탈삼진 위주의 피칭을 하는 전형적인 올드스쿨 파워피처였다.[4] 동양인의 경우엔 체구의 영향으로 인해 구속으로 MLB에서 승부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류현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류현진은 KBO 시절엔 역대 손에 꼽는 좌완 파이어볼러이자 완성형 투수였지만 정작 MLB에서는 더 빠른 구속으로 공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이 느린 편에 속했다. 물론 구속이 느려도 다른 부분을 살려서 MLB 최고의 기교파 투수가 되며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가 되긴 했다.[5] 팀메이트 노모 히데오도 파워 피쳐였지만 노모는 MLB 전체 역사에 남을 포크볼이 더 유명했으며, 단순 스터프의 평가는 박찬호가 우위였다. 하지만, 이후 박찬호 이상의 구속을 기록한 오타니 쇼헤이가 등장하며 이 타이틀은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6] 물론 MLB 기준으로는 다른 부분은 특출히 뛰어나지는 않았으며, 스터프만 우수했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1선발을 했던 적은 극히 드물었다.[7] 151km/h[8] 159km/h[9] 이는 대한민국 출신 투수들 중에선 압도적으로 빠른 구속이다. 또한, 박찬호의 전성기 이후 20년이 지나서 구속 상승 인플레가 심각해진 현재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손에 꼽는 구속이다. 불펜 투수로 한정해도 박찬호의 포심 평속에 준하는 투수들은 조상우, 고우석 등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박찬호는 무려 선발 투수로 저런 미친 수준의 스터프를 보유했는데, 단순 스터프 및 패스트볼의 구속과 구위 기준으로는 대한민국 출신의 선발 투수는 박찬호 전세대, 동세대, 후세대를 모두 따져도 비교 대상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가 안우진이 2020년대에 구속을 끌어올리며 겨우 따라잡았다. 다만 안우진이 2020년대 선수인 데 비해 박찬호는 투수들의 평속이 비교적 매우 느렸던 199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선수였던 만큼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박찬호보다 평균 구속이 확실히 빠른 한국인 선발투수는 지금도 안우진 딱 한 명뿐이다.[10] 2020년대 현재 야구계에서 투수들의 구속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MLB에서도 이 정도 구속과 구위는 불펜 투수 포함해도 평균 이상은 족히 들어가며, 선발 투수 기준으로는 확실한 상위권이다. 하지만 박찬호는 1990년대에 저런 구속을 기록했으므로 당시 메이저에서도 파이어볼러로 정평이 난 선수가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저 당시 선발투수 중 박찬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스터프를 지닌 투수로는 로저 클레멘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랜디 존슨 등 극소수밖에 없었는데 앞서 말한 이들은 모두 야구 역사에 남은 전설적인 투수들이다. 박찬호의 전성기인 1990년대 기준으로 20-80 스케일에서 박찬호는 패스트볼의 경우 최소 70 이상을 받을 것으로 평가된다.[11] 여기에 슬라이더체인지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마이너리그 시절 통타 당하던 구질이라 이후에는 구사를 자제하다 2008 시즌부터야 적극 활용했고, 체인지업은 그가 던질 수 있는 구질 중에서 민감하고도 완성된 시간도 꽤 오래 필요했던 구질이다.[12]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 2에서나 볼 수 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13] 사실 MLB에서 약물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베이브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복용했다는 기록이나 미키 맨틀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종기가 나서 결장한 사건, 행크 애런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밝힌 것 등 약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는채로 약물 복용이 성행했으며, 미첼 리포트가 터지며 선수들의 금지약물 사용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이후에도 약쟁이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통상적으로 스테로이드 시대를 일컫는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를 일컫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금지약물을 대놓고 복용하는 선수들이 존재하던 시기 자체는 이 때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전 시기는 약물 규제 자체가 미비해서 무슨 약을 빨건 그게 불법은 아니었고(일례로 가장 대표적인 경기력 향상 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1991년에야 금지약물로 지정됐다. 다시 말해 1991년 이전에는 스테로이드를 빠는 것이 커피나 술을 마시는 것과 똑같이 취급됐다는 소리다.) 이후 시기에는 약을 빨다 걸리면 그대로 철퇴를 맞기 때문이다.[14] 다만 구속만 보면 박찬호가 우위이다.[15] 물론 두 선수 모두 각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슬러브와 포크볼로 재미를 보기는 했다.[16] 박찬호는 2000년 NL bWAR 7위, 2001년 10위를 기록했다. fWAR로는 1998, 2000년은 양 리그 통합 20위대, 2001년은 19위다.[17] 혹자는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실력을 올리지 못했고, 다저스 시절은 케빈 브라운에 이은 2선발이었으므로 2선발급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딱히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커트 실링랜디 존슨 다음, 잭 그레인키클레이튼 커쇼 다음 2선발로 나왔다고 해서 이들이 1선발급 투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분석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수가 1선발급인지 아닌지는 팀에서 1선발로 나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성적을 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18]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시절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빅리그 선발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확실한 유망주', '미래의 메이저리그 프런트라인 급 투수'로 평한 부분은 새삼 박찬호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해준다. #[19] 물론 큰 차이가 있긴 하다. 2000 시즌 217K를 잡아내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분은 347K. 다만 이 시즌에 볼넷도 124개로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삼진/볼넷이 1.75였다.[20] 이미 어금니는 심하게 마모되었다고 한다.[21] 200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1박 2일에서 밥을 먹기 위해 치아 보조기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2] 류현진이 KBO 리그 에 있을 때에는 최고의 파워 피처에 컨트롤도 최고의 피네스 피처라 부를 수 있는 완전체였다. 메이저리그로 와서는 양쪽 모두가 정점인 완전체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정교한 제구력과 섬세한 운영이 장점으로 평가받는다.[23] 사실 패스트볼을 포심투심으로 나눈다면 3피치. 그런데 주무기를 패스트볼과 커브로 단순화했을 뿐이지, 다른 구종을 못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24]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세 홈런 다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장(1호 다저 스타디움, 2호 퀄컴 스타디움, 3호 돌핀 스타디움(댄 매리노의 집))에서 쳐낸 것도 대단한 기록이다.[25]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 시킨 감독은 당시 학교 내에서 수많은 반대 의견, 특히 다른 투수들의 학부모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찬호를 기어이 투수로 전향 시켰는데, 후에 졸업 이후 이로 인한 말썽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 당하고, 이후 교편을 잡게 된다. 이 감독은 박찬호 본인이 가장 존경했던 은인이자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참고로 박찬호가 투수로 전향하자, 원래 투수였다가 박찬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로 전향한 선수가 바로 홍원기다.[26] 사실 92학번 전체를 이야기해보면 더 많은데 손경수, 정민철, 염종석, 차명주, 전병호, 안병원 그리고 타자로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김종국 등이 있다.[27] 전설의 그 기록도 1999년 4월의 일이다.[28] 다만, 토드 헌들리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주전 포수를 보던 1999 시즌에는 채드 크루터 영입 전까지 일시적으로 박찬호의 전담포수를 맡기도 했다.[29] 조인성이 까였던건 투수진과의 불화가 주된 요인이고 그 외에 리드 때문이지 수비 능력 자체는 좋다.[30] 짬이 차면 포수 리드를 따르기보단 포수와 조율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던지는 경향이 많아지기 때문. 이런 점 때문에 신인급 포수는 그 팀의 최고 베테랑 선발의 경기에 주로 투입되곤 한다. 아예 그냥 투수가 리드까지 전담하게 되어 있다.[31] 뉴욕 메츠에서 2루수로 뛰다 나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던 그 선수 맞다.[32] 류현진또한 이치로를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상대전적은 .667/.667/1.667이다.)[33] 포크볼이 몸에 무리가 크고 부상 위험이 굉장히 높은 구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34] 경기의 절반 가량을 책임져야 하는 선발 투수가 출루를 했다가 괜히 부상을 당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공수교대를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괜히 병살타 치지 말고 빠르게 아웃을 당하거나 희생 번트를 잘 대는 것을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잭 그레인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35] 최종 0.268/0.268/0.268 하지만 볼넷 0개에 장타가 없어서 출루율,장타율이 낮았기 때문인지 결국 그해 실버슬러거는 타율은 0.151에 그쳤지만 그해에만 80타석에서 6개의 홈런을 쳐낸 카를로스 잠브라노가 가져갔다.(0.151/0.160/0.397)[36] 다만 금기시라고 하기에는 당대에도 쓰는 선수들은 꽤 있던 편. 최동원이라거나, 박철순이라거나, 조계현이라거나.[37] 이 책은 2015년에서야 <놀란 라이언의 피처스 바이블>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원서에 있는 플립 북 형태의 놀란 라이언의 투구 폼 영상도 그대로 함께 따라왔다. 아쉽게도 2021년 현재는 절판 상태라 중고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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