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차흐 공화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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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소련 치하
3. 소련 붕괴 직후
3.2.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5. 소멸


1. 개요[편집]


아르차흐 공화국의 역사를 다룬 문서.


2. 소련 치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3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결정으로 이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되고 그 행정 경계는 1924년 3월 확정된다. 이 때에 들어서야 나흐츠반, 카라바흐 산악지대, 그리고 장게주르의 관할이 오늘날의 기준대로 결정되는데, 이 결정은 한 쪽에의 편향을 따지기 전에 레닌과 소련이 만든 규칙에 몇 가지 예외를 만들면서 양국 모두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나흐츠반과 카라바흐 산악지대를 모두 가져가고 장게주르를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면서 이전부터 바쿠 코뮌으로 소련에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아제르바이잔의 2:1 판정승이 되었으나, 양국은 여기에 모두 불만을 가졌다.

물론 양쪽 모두 세 개 다 자기 것이라고 우겼긴 하지만 스탈린의 중재가 괴상했던 것은 사실인데, 레닌의 기준에서는 모국이 존재하는 민족에게 자치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공화국 이하의 저등급 자치체들은 민족 이름이 붙은 자치체를 가지는 것이 규범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원칙이 캅카스에서는 무너진다. 더불어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나흐츠반보다 한 단계 열등한 자치주 지위를 얻은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아제르바이잔은 민족 구분도 없이 완전히 동일체인 나흐츠반이 단지 소련이 아르메니아에게 장게주르를 넘겨주고 싶다는 의중만으로 월경지가 된 것도 억울한데 굳이 인위적인 자치공화국 지위를 강제당했다고 불만을 품었다.[1] 다소 비인도적이지만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과 같은 강제 이주밖에 없었고 숙청과 강제 이주의 아이콘인 스탈린이야말로 이런 조치를 취할 적격의 인물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지아인인 스탈린은 이 지역에 쿠르드인을 강제이주로 몰아넣었다가 도로 빼서 중앙아시아에 처박는 강제이주를 서슴지 않았음에도 정작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상대로는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1920년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둘 다 소련에 복속되고 1930년대까지의 대숙청을 거치면서 양국 모두 민족주의 정치인들이 사망, 추방, 망명 등 여러 박해를 당하면서 자국에서 사라진다. 양쪽에는 스탈린주의자만 남아 197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다 같은 사회주의 동무들이라 여기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은 처음부터 곪아 있었는데, 스탈린 사후인 1960년대 초부터 아르메니아는 계속 나고르노카라바흐 클레임을 이어간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중앙에서는 이 항의를 계속 거부한다.

1970년대 말부터 소련의 잇따른 농업정책 실정과 경제실패, 유가 충격이 겹치면서 모스크바의 지방 장악력이 감소하고 1986년에 이르면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지방자치와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방임하면서 아르메니아에 민족주의의 광풍이 몰아친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연일 프로파간다가 뿌려지고 확장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시위대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반환 데모가 정국을 지배하게 된다.

1987년 아제르바이잔의 유력 정치인인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 최고 권력을 다투다 끝내 제7대 서기장직에 오르지 못하고 중앙 정계에서 퇴장하면서 아르메니아의 시위와 공산당 중앙에 대한 항의는 더욱 거세지고, 1988년 2월 고르바초프는 양국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화국 경계는 수정하지 않겠다고 발언하였다가 거센 시위와 파업을 마주하고 이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 것이라 발언하였다가 거꾸로 아제르바이잔의 정국을 격랑 속으로 몰고 간다.

1988년 2월 27일 카라바흐 귀속권 문제에 관하여 아제르바이잔인 2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바쿠 라디오를 통해 퍼지자 아제르바이잔의 숨가이으트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인 32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최종적으로 양쪽 모두 십만 단위의 인구가 서로 국경을 넘어 민족국가로 향하는 피난민이 되었다. 그 뒤로 두 민족은 섞여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관계로 되돌아간다.

1989년부터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자체정부와 반군이 준동해 아제르바이잔 중앙 정부의 통제를 실질적으로 벗어나 버린다. 아직 소련이 망하지도 않았지만 분쟁의 강도는 이미 절정을 향해 계속 높아져만 갔다. 아제르바이잔은 소련군의 협조로 무력 진압을 추진하였으나 인민군이 인민을 탱크로 깔아 뭉개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무기고를 확보하고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의 저항 또한 거셌던 탓에 진압군은 어정쩡한 포위 시도와 포격으로 애꿎은 사상자만 발생시키고 만다.

1991년 8월 쿠데타로 공산당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지방 장악력의 진공상태를 노린 1991년 12월 10일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통해 99.98%의 찬성표를 얻는다. 이것은 소련의 연방탈퇴법에 승인되지 않은 절차로서 국제사회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으며 아제르바이잔 정부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미 실질적으로 전쟁 중인 상태에서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행정력과 군 병력을 온전히 투사하지 못하였고, 사건은 다음 문단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3. 소련 붕괴 직후[편집]



3.1.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편집]


전쟁 이후 OSCE 민스크 그룹#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중재를 위해 지속적인 평화 협정 제안을 해 왔다. 의장국은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이다.

중재 시도는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97년부터 시도된 거의 모든 중재[2]가 결렬되었고 평화 협상안은 모두 양쪽이 사인하지 않았다.

이 기간 특기할 사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2006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측이 마침내 민스크 그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제헌 국민투표를 감행한 사건이 있었다. 민스크 그룹은 공동 발표를 통해 자칭 "헌법"과 자칭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모두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평화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그 다음으로 2008년 8월 발발한 조지아 전쟁의 결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유사하게 독립한 압하지야남오세티야, 그리고 서방국가들의 지원으로 2008년 10월 독립 선언을 한 코소보 공화국 등의 사례에 고무된 나고르노카라바흐가 10년 만에 화두에 오르기도 하였다. 2009년 6월 마드리드 협정으로 이 문제에 대해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쪽 대표가 합의하기는 하였는데, 추후 합의 없이 또 시간만 흐르면서 이 협정 또한 없던 셈이 되었다.

2016년 4월 전면전쟁이 발발하였고, 러시아의 중재로 4일만에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국은 정전에 합의한다. 결과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이 공세를 시도하여 제한적 성과를 거둔 셈이 되었다. 양국은 모두 승리를 선언하였다. 아르메니아는 이 사건을 4월 전쟁, 4일 전쟁 등으로 부른다. 전면전이 시도된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아제르바이잔은 언젠가 전면전을 확신하고 오랫동안 무기를 비축해 왔던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2015~2016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국내 경제난을 원인으로 짚기도 하였다.위키피디아 2016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문서 참고.

이 사건으로부터 1년 뒤인 2017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국명을 공식 변경하고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골자의 신헌법 국민투표를 진행한다.# 민스크 그룹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법적 지위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의 실질적 독립과 주권 행사를 방관하는 민스크 그룹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논조의 비판을 이어갔다.

특기한 몇 가지 사건들 사이사이에 무수한 도발과 교전이 계속되었고, 양측 누계 수천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이 산발적, 전면적 교전으로 죽거나 다쳤다. 이 시기를 평화라고 부르기도 하나 실질적으로 고강도 적대행위는 2020년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아그담, 퓌줄리 등 아르메니아군이 인종청소를 집행한 폐허 마을을 포함해 아르차흐의 동부를 관통하는 마르타케르트-마르투니 도로 동쪽의 외곽 권역은 아제르바이잔 저격수들의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4. 21세기[편집]



4.1.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결국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아르메니아의 패배로 끝나면서 아르차흐 공화국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이미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를 이어주던 땅도 5km 폭 정도의 도로(라츤 회랑)만 남기고 모조리 아제르바이잔이 차지한 상태이고, 거기에 나고르노카르바흐 지역 땅도 굉장히 많이 빼앗겨 영토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특히 제2도시 슈샤마저 아제르바이잔령으로 넘어갔다. 전쟁 전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아제르바이잔 산하 자치공화국이 되든가, 현상유지를 하더라도 본래 소련시절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이외의 구 아제르바이잔 SSR에 속했던 7개구를 넘겨주는 것 등의 선택지를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시해왔으나 아르메니아가 이것을 모두 거부했고,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이전과 같은 제시는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이 본인 입으로 공개연설을 했다. 때문에 평화유지군이 철수한 이후의 아르차흐의 운명은 전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달리게 되었다.


4.2. 2022년[편집]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차흐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르차흐 민간인들이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2022년 3월 27일,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아르메니아군이 평화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철군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 같은 날 아르차흐 공화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022년 2월 22일에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는 동맹 선언을 했고[3] 이 선언서 내에는 "양국은 각자의 고유영토 내에서 조직 및 개인이 상대방 국가의 주권, 독립, 영토보전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막는다."[원문1]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는데, 이것은 국제법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권회복에 대해 러시아는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인정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는 2021년 공동으로 슈샤 선언을 발표하고 슈샤에 주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 총영사관을 설치할 것을 합의했는데 이 슈샤 선언문에도 "양 당사자 중 하나의 의견에 따라 해당국의 독립, 주권, 영토보전,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경의 불침해 혹은 안보에 있어 하나 혹은 여럿의 제3국에 의한 위협 및 공격이 벌어질 시, 양국은 공동으로 협의하고 해당 위협 혹은 공격의 예방을 목적으로 국제연합 헌장 및 원칙에 따르며, 상호에게 국제연합헌장에 적합한 도움을 제공한다. 해당 도움의 범위 및 형태는 긴급협의를 통해 결정하며 공동조치에 대해서는 안보요구에 따라 결정하고 군의 권한 및 관리부서간 협력활동을 담보할 것이다."[원문2]*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이 또한 튀르키예는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회복조치를 인정하고, 아르메니아에 이에 반발해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개입할 수 있음을 조건으로 걸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측이 해당 지역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러시아와 튀르키예 양측에 대해 이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르차흐 공화국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한편 휴전 협정으로 아르메니아가 아르차흐 공화국 전지역에서 병력을 철수시킨다는 것 까지만 관철시켰지 아르차흐 공화국 자체의 존립, 지위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은 승전국이기에 스스로 편한 쪽으로 해석을 하여 군대가 나갔으면 다 끝난 거라고 보았으나,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는 가능하면 휴전 협정에 명시되지 않은 것들을 최대한 이용해 현상유지를 하며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그 결과 장게주르 회랑 문제가 무한정 미루어졌고,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못참고 아예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분쟁으로 아르메니아 본토 남부 전체의 영유권에 물음표를 찍고[4] 국지전을 건다. 기본적인 명분은 소련 시절 이전부터 양국간에 국경 획정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이미 2020년 전쟁으로 군 병력이 붕괴한 아르메니아는 10여일 간의 무력 충돌이 확대될 경우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아래 다시 무릎을 꿇는다.

결국 2022년 10월 7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EU의 중재로 프라하에서 만나 합의#를 했는데, 이 합의내용에는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UN 안보리에 의해 인정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전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5]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 정부당국은 아르차흐를 주체로 하는 모든 공식적인 대외창구를 닫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부지역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아르차흐 공화국은 외부의 터치 없이 오롯이 아제르바이잔의 내정 문제가 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하지만 아르차흐 당국은 자신들의 자유와 주권을 스스로 지킬 것이라 주장하며 해산하지 않고 독자행동을 지속하기로 하였다.

2022년 12월 10일 아제르바이잔측이 아르메니아의 아르차흐 포기 협상을 믿고 아르차흐의 잔여 본토에 해당하는 드름본 광산 일대를 환경조사 명목으로 육안시찰을 시도하였다.# 시찰단은 러시아 평화유지군측에 해당 사실을 통보하고 광산지대에 진입하였으나 아르차흐측 경비 인력들과 광업회사 직원들에게 제지당하였고, 아르차흐 당국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일방적 침범으로 규정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해당 광산과 채석장이 인근의 저수지를 오염시키고 강 하류에 사는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20년간 클레임을 한 바 있다. 특히 저수지에 수력발전기를 대량으로 증설하면서 유량 변동과 오염물질로 인해 하류의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매우 싫어하는 시설들이기도 하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 정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승전과 평협을 빌미로 진입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여러 군사 충돌을 추가적인 이유로 들어 라츤 회랑 봉쇄 결정을 내리고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관할하는 회랑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러시아군은 관할지역을 그냥 내주고 공동경비를 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고, 아르차흐와 아르메니아는 이를 거세게 비난했다. 이어서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로 들어가는 모든 물산을 통제하기 위해 송유관을 접수하는 등 아르차흐에 대한 압박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4.3. 2023년[편집]


2023년 4월부로 아제르바이잔이 라츤 회랑을 완전히 통제#함에 따라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2023년 5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보전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야당의 격한 반발과 이어지는 가두시위로 후속조치를 하지 않아 발언에 그치고 말았다.

2023년 6월 국지 교전이 있었다. 아르차흐 국방부에 따르면 아르차흐 방위군 병사 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2023년 7월 28일, 아르차흐 국회의장인 아르투르 토브마샨이 사임하며 아르차흐 리더십 문제가 불거진다.# 2020년 '44일 전쟁'의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라츤 회랑 관할 문제를 두고 다시금 패전한 아르차흐의 리더십에 균열이 일어나는 모양새로 볼 수 있다. 사임 사유는 패전 책임자인 아라이크 하루튜냔 현직 대통령의 거취에 대한 불만으로 보도되었다.

2023년 9월 1일, 아라이크 하루튜냔 대통령이 사임하였다. #

9월 19일 아제르바이잔이 라츤 봉쇄를 해제한 이후 지뢰를 밟고 병사들과 시민들이 사망하자 이른바 반테러작전을 시행하여 아르차흐 공화국을 맹공하고 있다. #

9월 20일. 아르차흐 공화국이 가지고 있었던 아라마스 수도원을 아제르바이잔이 차지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충돌 중단을 촉구했다. # 평화유지군을 주둔 중인 러시아 측 중재에 따라 아르차흐 공화국군 무장해제에 동의했다. #

9월 25일, 아르차흐 정부 대변인 롤을 맡은 다비트 바바얀(Դավիթ Բաբայան, David Babayan) 고문은 '국민들은 아제르바이잔에 속하기를 원히지 않고 인종청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로 떠날 것'이라 발표한다. # 이로써 자국민 보호를 포기하였기에 이 미승인국은 실질적인 멸망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애초에 정부요인과 군인, 전역자 일부 등은 반란 및 전쟁범죄 혐의로 아제르바이잔측에 수배되어 있기 때문에 국경 검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며, 바바얀은 체포되는 것 보다 자수를 선택하여 9월 28일 슈샤에서 자수후 바쿠로 압송되었고 4개월의 구속 기간중 20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9월 26일, 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의 귀환 행렬이 이어진다. # 이들은 고리스에서 난민수속을 거쳐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여러 지역에 분리수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월 27일, 아르차흐 공화국의 전직 국무장관 루벤 바르다냔(Ռուբեն Վարդանյա, Ruben Vardanyan)이 변복을 하고 피난 행렬에 섞여 러시아 시민권 서류를 들고 아르차흐 공화국을 탈출하려다 아제르바이잔 검문에 걸려 구금되었다.# 100억 달러 자산가이자 유력 정치인으로, 그는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종전 이후 푸틴의 돈세탁 창구로서 서방 국가들의 제제를 피해 2021년 6월 아르메니아 시민권을 획득하고 러시아 여권을 찢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입국해 정치 활동에 참여,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들어가 제재를 피하고 러시안 커넥션을 위시하여 그 세력을 떨쳤다.


5. 소멸[편집]


2023년 9월 28일, 아르차흐 공화국의 대통령 삼벨 샤흐라마냔(Սամվել Շահրամանյան, Samvel Shahramanyan)은 국가 해산 법안에 서명하였다.

이에 따라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은 2023년까지만 존재하며, 2024년 1월 1일부로 공식적으로 소멸하고 아제르바이잔에 흡수된다. #

9월 29일, 아제르바이잔 경찰이 수도 한캔디(스테파나케르트) 시가지에 입성하였다.

10월 1일, 아르차흐 대통령궁, 아르차흐 의회에서 아르차흐 공화국의 국기가 철거되었고, 한캔디 시내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수도 한캔디에서 잔류를 희망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아제르바이잔 국적 획득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예정된 소멸 날짜인 1월 1일보다 사실상 일찍 소멸하였다.#

멸망 후에 밝혀진 것으로 미국·유럽연합(EU)과 러시아 측이 아제르바이잔 내 영토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월에 비밀 회담을 했다.#

전임 대통령 아라이크 하루튜냔과 각료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10월 15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한캔디에 도착해 아르차흐 대통령궁에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게양하고 아르차흐 의회, 정부청사 등을 살펴보면서 아르차흐는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1] Cornell, Svante E, <Azerbaijan since independence>, p.37[2] 관련 문서(CCL 3.0으로 직접 인용 불가!) 참조. 아르메니아인들이 작성한 위키이므로 부연설명에는 편향이 있을 수 있다.[3] 날짜를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바로 직전에 선언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하기 전 캅카스 지역에 주둔한 러시아 병력을 염두에 두고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개개선에 나섰을 가능성도 있다.[원문1] Onlar öz ərazilərində təşkilatların və şəxslərin digər tərəfin dövlət suverenliyinə, müstəqilliyinə və ərazi bütövlüyünə qarşı yönəlmiş fəaliyyətinin qarşısını qətiyyətli surətdə alırlar.[원문2] Taraflardan herhangi birinin kanaatine göre onun bağımsızlığına, egemenliğine, toprak bütünlüğüne, uluslararası düzeyde tanınmış sınırlarının dokunulmazlığına veya güvenliğine karşı üçüncü bir devlet veya devletler tarafından tehdit ve saldırı gerçekleştirildiğinde taraflar ortak istişareler yapacak ve bu tehdit veya saldırının önlenmesi amacıyla BM Şartı’nın amaç ve ilkelerine uygun girişimlerde bulunacak, birbirine BM Şartı’na uygun şekilde gerekli yardımı yapacaklardır. Bu yardımın kapsam ve biçimi ivedi yapılan görüşmeler yoluyla belirlenerek ortak tedbirler alınması için savunma ihtiyaçlarının karşılanmasına karar verilecek ve Silahlı Kuvvetlerin güç ve yönetim birimlerinin koordineli faaliyeti sağlanacaktır.[4] 이 당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슈니크 주 권역을 서 장게주르, 서 카라바흐, 서 아제르바이잔으로 불렀다.[5] 정확히는 유엔 헌장 존중과 1991년 구소련 공화국들의 영토를 확정하는 알마 아타 선언에 대한 동의. 어차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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