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사키 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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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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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후쿠오카 2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2대
야마사키 타쿠


제43대
고가 준이치로[A]
-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후쿠오카 2구)
제43대
고가 준이치로[A]

제43~44대
야마사키 타쿠


제45대
이나토미 슈지
-








일본국 제47대 방위청장관
일본국 제33-44대 중의원 의원
야마사키 타쿠
山崎拓 | Yamasaki Taku

파일:야마사키 타쿠.jpg}}}
출생
1936년 11월 21일 (87세)
일본 제국 관동주 다롄시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시)
재임기간
제57대 건설대신
1991년 11월 5일 ~ 1992년 12월 12일
제47대 방위청 장관
1989년 6월 3일 ~ 1989년 8월 10일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1984년 11월 1일 ~ 1985년 12월 28일
학력
후쿠오카 교육 대학 부속 후쿠오카 중학교 (졸업)
후쿠오카 현립 슈우칸 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상학부 / 학사)
소속 정당


소속 파벌
근미래정치연구회
지역구
후쿠오카 2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현직
자유민주당 근미래정치연구회 최고 고문
약력
브리지스톤 직원
후쿠오카현의회 의원
내각관방부장관
자유민주당 부총재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자민당 헌법조사특별고문
총리 보좌관
자민당 외교조사 회장
일북 국교 정상화 추진 의원 연맹 회장
일본 소프트볼 협회 회장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대북 외교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전직 정치인.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의 일각을 담당했으며, 고이즈미 내각에서 간사장과 부총재를 역임하며 고이즈미의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한 때 자민당 총재 후보로 불렸으나, 가토의 난 실패와 본인의 정치스캔들로 인해 몰락하여 결국 총리가 되지 못하고 정계 은퇴의 길을 걷고 말았다. 다만 은퇴 이후 근미래정치연구회 최고 고문에 임명되며 정치 원로로서는 대우받고 있다.


2. 생애[편집]


1936년 관동주 다롄시에서 만철조사부원으로 훗날 사가미여자대학장을 맡게 되는 야마사키 스스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마사키가 태어나던 날 그의 외할아버지인 야마구치 케이하치가 후쿠오카현 미이케군에서 탄광 개발에 성공하여 사위에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으로 개척의 개 () 자 대신 넓힐 척 () 자를 붙여 탄광 개발과 만주 개척을 기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가족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왔고 후쿠오카시에 정착해 그곳에서 자랐다. 소학교 3학년 때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쳐 척안이 되었으며 후쿠오카 중학교, 슈유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에서 5년간 일하고 후쿠오카현의 헤이와다이 야구장 앞에서 사오마이를 판매하는 매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67년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고, 1969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추천으로 구 후쿠오카 1구에 보수계 무소속으로 입후보 하지만 낙선했고, 1972년에는 당선,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비세습 국회의원이었다.

당선이후 방위전문 분야 의원인 방위족 의원으로 두각을 보였고,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서독 에서 G8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을 때, 야마사키는 내각관방부장관 으로써 나카소네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개별적으로 정상회담을 진행했을 때 회담 내용을 모두 기록한 뒤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기자단에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외무성 관료의 도움없이 나카소네의 의향을 헤아려 국제 여론을 리드하는 내용으로 브리핑하도록 신경썼다.

이후 방위청장관, 건설대신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체급을 높였고, 1990년부터 타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세회 주도의 정치 운영을 비판하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 트리오를 결성해 당내 개혁을 이끌었다.

1995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 시대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취임했고, 1998년 와타나베 미치오 전 재무대신의 파벌이었던 정책과학연구소 로부터 독립해, 근미래정치연구회 (야마사키파)를 결성한다.

1999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에 총리자리를 노렸다. 비록 오부치 게이조에 밀려 낙선했으나 오부치 게이조, 가토 고이치에 이은 3위였고, 이 선거 이후 자민당 총재의 유력 후보로 주목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0년 자민당내 파벌을 둘러싸고 모리 요시로 총리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실패한 일명 가토의 난으로 인해 분란을 이끌었던 굉지회 회장 가토 고이치와 함께 정치생명에 큰 위기가 닥쳤지만, 많은 이반자가 발생하여 파벌 자체가 분열했던 가토와 달리 야마사키는 이탈자가 많지 않아 정치적 영향력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자민당 내에서도 야마사키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여 복권에 성공하게 된다.

2001년 YKK의 일원 중 하나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내각이 성립하면서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된다. 야마사키는 당내 기반이 약한 고이즈미를 반대파로 부터 지키는 역할과 외교 경험이 부족한 고이즈미의 보좌역으로 활약했다.

그가 자민당 간사장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장관,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며, 9.11테러 당시 여3당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 9.11 사건 긴급대책협의회의 좌장으로 자위대법 개정에 대해 협의하는 등 외교·안전보장 정책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야마사키는 고이즈미의 후임 총재 및 차기 총리 후보로 물망에 올랐고 2003년 9월 자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그해 11월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애인이 주간지에 야마사키의 성추문 사실을 폭로하자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선거에서 낙선하고 부총재 자리에서도 사임했다.[1]

낙선 이후 야마사키는 2004년 자민당 헌법조사특별고문 및 총리보좌관에 취임했다. 2005년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다시 의원직을 되찾았으며 우정민영화법안을 심의하는 특별위원회 간사가 되어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민영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우정 해산 이후 고이즈미와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다.

같은해 자민당 안보조사회장으로 취임하며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지한~친중파 의원인 가토 고이치, 후쿠다 야스오, 고가 마코토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2006년 고이즈미의 뒤를 이어 정권을 맡은 아베 신조와는 대북정책을 두고 자주 대립했다.

2007년 아베 내각이 퇴진하자 포스트 아베에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했고, 이후 자민당 외교조사 회장직에 취임하면서 외교와 안보정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후쿠다 내각에 이어 아소 내각에서도 재임되었지만,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 고이치와 함께 신당 창당을 준비하며 가메이 시즈카, 오자와 이치로 등과 회동을 가졌으나 신당 창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45회 중원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고 자민당이 대패하는 선거 상황 속에서 본인의 파벌인 근미래정치연구회 소속 의원들이 대거 낙선[2]하고 파벌 회장인 야마사키 본인도 낙선하는 등 당 내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지만[3] 파벌의 존속을 이유로 201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2010년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비례구 입후보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정년제도에 의한 나이제한으로 공인되지 않았다. 동년 3월에는 국민신당 대표인 가메이 시즈카로부터 입당 및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참여 조건을 요청 받았으나 야마사키 본인이 즉시 거절했고,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및 정계은퇴를 표명했다.

이후 근미래정치연구회 회장직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으며, 본인은 파벌 최고 고문직에 올랐다.

2016년 7월 YKK를 회고하는 자서전 YKK 비록을 출판했으며, 2개월 뒤 가토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가토의 난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던 내가 나빴다.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사카 10구 선거구에서 현역 의원이자 자민당 후보인 오쿠마 가즈히데가 입후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헌민주당 쓰지모토 기요미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야마사키는 유세현장에서 지역구는 쓰지모토, 비례구는 자민당에 투표해 달라며 오사카 지역민들의 일본유신회 견제를 호소했지만, 결과는 쓰지모토&오쿠마의 동반낙선(...) 이로 인해 당 규율 위반으로 당원권 정지 1년이라는 처분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4]

3. 대북 외교[편집]


야마사키는 한반도의 비핵화·납치 문제 해결에 의한 일북 국교 정상화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 과제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압력 일변도의 외교자세가 아닌 제재보다 대화를 중시하고 북한의 정부 관계자와도 자주 회담을 해왔다.

또한 2004년 4월 1일 히라사와 가쓰에이와 함께 중국을 극비로 방문해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해결 관련해 북한 고위층과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야마사키의 행동은 대북 외교 루트를 일본 - 북한 간 루트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정부의 외교 방침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시되었고 일본인 납치 피해단체 등에서는 야마사키가 납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2006년 고이즈미가 물러나고 아베가 후임 총리직에 유력시 되자 야마사키는 자민당 내 온건파인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며 아베를 견제했고 아베 내각의 대북 정책을 놓고 아베의 외교가 압력에 경도되어 있어 일본을 고립시키고 국익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아베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야마사키의 북일 정상화 추진을 비난하자 발언의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으나 아베는 "대화 노선에서 납치 문제가 진전하지 않았던 것을 학습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해 발언의 철회와 사과를 거부했다.

2009년 3월 18일, 북한이 일본을 향한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개시 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소 다로는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요격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이에 대해 야마사키는 미사일 발사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대화밖에 없고,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며 중국과 연계한 대화 노선을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67 - 1972
정계 입문


1972 -
입당
정계은퇴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7
제6회 통일지방선거
후쿠오카현의회 사라베정

[[무소속|
무소속
]]

? (?%)
당선 (?위)
초선[5]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1구
46,929 (7.91%)
낙선 (7위)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0,929 (11.64%)
당선 (4위)
초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4,298 (11.86%)
재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0,975 (14.62%)
당선 (3위)
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4,513 (16.65%)
당선 (1위)
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2,419 (16.51%)
당선 (3위)
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8,279 (20.05%)
당선 (1위)
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0,388 (15.51%)
당선 (3위)
7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0,585 (16.61%)
당선 (2위)
8선[6]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98,095 (49.24%)
당선 (1위)
9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3,234 (44.88%)
10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4,565 (44.02%)
낙선 (2위)

2005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
96,174 (50.22%)
당선 (1위)
11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6,702 (52.35%)
12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270 (36.94%)
낙선 (2위)


6. 여담[편집]


  • 취미는 유도, 야구, 바둑, 소프트볼 이며, 후쿠오카 현지 사무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소프트볼팀을 결성해 정기적으로 경기를 치루고 있다.

  • 존경하는 인물은 제32대 총리대신이자 A급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진 히로타 고키이다. 단, 그의 행보를 보았을때 극단 우파적 성향을 띄여서 존경하는 것이 아닌 야마사키의 모교인 슈우칸 고등학교의 대선배여서 존경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 위에서도 서술 했듯이 외교적으로는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를 비롯한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지만 안보적으로는 헌법9조 개정을 오랫동안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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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이 선거에서 야마사키를 꺾고 당선된 민주당 고가 준이치로 후보는 학력위조 의혹으로 민주당을 탈당했으며, 결국 의원직에 당선된지 1년도 안 돼서 사임하게 된다.[2] 선거 전 37명 -> 선거후 16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3] 이때 소속의원들의 격감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파벌 사무실을 야마사키의 개인 사무실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열약했다.[4] 사실 야마사키가 쓰지모토를 지지한 이유는 쓰지모토가 주최한 정치 자금 규정법에 근거하는 정치 파티인 정치 활동 20년에, 감사와 비약의 모임 in 도쿄라는 파티에 참가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 이를 봤을때 이념적 성향보다 개인적 인연으로 지지한것에 더 가까운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5] 1969.12.7 의원직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6]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