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롬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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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
1.1. 관련 텍스트의 접근성
1.2. 빠와 까
1.3. 롬멜 개인에 대한 비판
1.4. 롬멜의 전략적 능력에 대한 비판
1.5. 유대인에 대한 처우
1.6.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1.7. 롬멜 신화의 허구성과 재평가
1.8. 롬멜의 자기 과시와 영국의 의도적 고평가
1.9. 몇 가지 추가적인 비판
2. 반론
2.1. 롬멜은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했다?
2.2. 보급 곤란을 자초했다?
2.3. 엘 알라마인 전투의 보급 문제?
2.4. 영국군이 롬멜을 띄웠던 것은 단순한 체면 살리기였다?
2.5. 롬멜이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건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2.6. 롬멜과 다른 동료장군과의 관계
2.7.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3. 종합적인 평가



1. 비판[편집]


전쟁 당시 '사막의 여우'는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히틀러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과 열광에 의해 이루어졌고, 가능했다. 실제 에르빈 롬멜의 모습과 데스몬드 영이 1950년대에 만들어낸 모습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언 배킷 교수, <Rommel: A Reappraisal>



1.1. 관련 텍스트의 접근성[편집]


현재의 밀리터리 동호인계의 큰 형님 취급을 받는 이들이 활동을 시작하던 1980~1990년대 한국의 척박한 현실에서는 2차 대전 관련 서적을 입수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서적은 일문 중역판으로 입수되었다. 이웃나라이자 추축국인 일본은 극단적인 독빠 국가였고 특히 롬멜을 찬양했는데, 이는 서브컬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동전사 건담의 등장인물 람바 랄은 이름만 봐서는 귄터 랄에서 모티브를 받은 것 같지만 사막의 적장이라는 이미지를 롬멜에서 가져온 것이고, 후속작인 기동전사 건담 ZZ에 등장하는 데저트 롬멜우주전함 야마토의 도멜 장군은 아예 이름까지 가져왔다. 나아가 최신 리메이크 판에서는 풀네임 '엘크 도멜'에 아내까지 등장, 별명은 심지어 우주의 늑대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롬멜 미화 이미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일본 국민 애니메이션이며, 특히 도멜 장군은 나이가 지긋한 일본 정치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

21세기에 들어서도, 롬멜을 비판적으로 보는 원서들이 대개 일반인을 배려하지 않는 전문서적이고 국내에 정식 출간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롬멜 비판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2차 세계대전 서적 중 독소전쟁과 항공전까지 충실히 다루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사랑 받고 있는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의 저자 이대영이 중증 롬멜빠라 본서의 롬멜 묘사를 읽어보면 역사 왜곡, 좋게 말하면 소설에 가까운 미화를 보여준다. 네이버 검색하면 지식in 답변으로 자주 나오는 롬멜에 관한 극단적인 미화와 사실 오류는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문장 배치까지 똑같다. 해당 서적의 맨 뒷장 주석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판 책자들을 대량 인용한 탓에 눈에 거슬리는 일본식 외래어 발음 표기에 롬멜에 대해서는 '천재'라는 표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


1.2. 빠와 까[편집]


덕분에 생겨난, 밀리터리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롬멜빠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롬멜 이외에는 독일에 뛰어난 장군이 없다고 말하는 등 극단적인 롬멜 찬양의 모습을 보인다.

롬멜과 적대했던 모든 인물들, 롬멜과 사이가 나빴던 대다수의 장군들, 몇몇 상관들의 제지를 방해로 여기고 있었으므로[1] 상당수의 독일군 장성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진 롬멜빠들은 한국에서만의 문제점은 절대 아니고 범세계적이라, 서구권 서적에서도 롬멜 찬양 서적에 독일군 장성들은 상당히 희생당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귄터 폰 클루게 원수. 이러한 경향은 그나마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지역에 남아 있던 군사 문서들이 재발견되고 시간이 흘러 공개되면서 다소 상황이 나아졌다.

덕분에 국내에서는 독일 장군들 중에 빠가 까를 만든다가 적용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까들도 생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쟁사를 공부했던 이들 중에서도 클라이스트 원수 같은 이의 존재라도 아는 밀덕은 3자리 수도 안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국 밀리터리 계에서 롬멜에 대한 대대적인 격하 운동(?)이 있기 전에는, 까들은 그냥 자신들의 영웅인 조지 S. 패튼, 버나드 로 몽고메리 등등을 추앙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나… 2차 대전 밀덕질의 특성상 A의 찬란한 업적은 B의 치욕스런 실패가 된다. [2] 따라서 롬멜에 대한 비판은 독일의 다른 장군의 빠들보다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빠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빠가 까를 만든다는 건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발심에 의해 안티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롬멜이나 2차 대전의 독일을 까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근거할 아무런 텍스트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술했듯이 거의 유일하게 입수 가능하던 영미권이나 일본 서적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롬멜 까들은 주장을 하고 나서 21세기의 관련 서적의 대대적인 출판에 의해 근거를 얻은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냥 까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화가 치솟아서 단순한 인신 공격을 하려고 보니, 영미권에서 나치라는 인신 공격이 가능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국 밀덕계에서는 오히려 2차 대전기의 독일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을 모욕한다며 무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냥 쌍욕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롬멜 까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다.

한국 밀덕계와 이 문서에서의 롬멜을 둔 설왕설래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3. 롬멜 개인에 대한 비판[편집]


총통께서는 우리를 위한 올바른 길을 알고 계시오.

폴란드 침공 직후 롬멜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37년 2월, 그는 히틀러유켄트 단장인 발두르 폰 시라흐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었다. 비록 그가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나치당의 강령을 가르치는 2개의 9일간 교육과정에 참석했으며 두 과정 모두 '유대인 문제'에 대한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정서는 강력하게 히틀러를 지지하는 쪽이었으며, 그 연장선에서 나치당에도 동조했다.

위대한 3인의 전사들 3장 p97


주님께서 총통각하와 더불어 당신, 사랑하는 나의 에르빈을 보호해주시길. 내 모든 친구들이 총통께서 불필요한 위험에 나서지 못하게 당신이 보호해주길 간청하고 있어요. 그분을 잃는다면 우리는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1939년 9월 4일 폴란드 침공 중 국방군 총통경호대에서 근무하던 에르빈 롬멜에게 루시에 롬멜이 쓴 편지


만약 총통이 없었다면 과연 독일인 중에 군사와 정치 두 분야에서 그렇게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있을지 의문이오.

1940년 4월 제7기갑사단장 복무 중 롬멜이 루시에에게 보내 편지 중

먼저 그는 총통 경호실에서 근무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상당히 친분을 쌓았고, 그 경력이 이후 그의 출세가도에 많은 도움이 됐다.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했고 그가 제시한 비전에 찬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아닌 그를 굉장히 아꼈다. 원래 1차세계대전 참전해 일반 병(兵) 출신인 히틀러는 귀족 출신이 다수에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진급한 기존의 국방군 장성들에 대해 열등감과 경멸감을 함께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롬멜 같은 신흥 무관들이나 자신의 심복이랄 수 있는 SS 출신의 무관들을 특히 총애했으므로, 1차대전의 무훈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판단된 롬멜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3] 히틀러는 SS 무장친위대를 증강하고 롬멜 같은 신진 장교단을 키워서 기존 국방군을 장악하고 있는 프로이센 귀족 출신들이 중심이 된 군 상층부를 견제할려고 노력했다. 프로이센 장교단과 히틀러는 서로를 고깝게 여기는 사이였고 이들은 독일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문민통제가 먹히지 않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통제하거나 견제할 수단이 필요하기는 했다.

롬멜이 야전 지휘관으로 첫 경험이었던 제7기갑사단의 경우도 정상적인 인사명령이 아닌 롬멜이 히틀러에게 야전기갑사단으로 배치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7기갑사단 장교단은 보병교관이 효과적으로 기갑사단을 지휘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였다. 또한 롬멜이 제7기갑사단장이 되어 총통 사령부를 떠날 때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롬멜 장군에게- 우정을 기억하며. 13 Feb 1940'라는 친필 사인과 메시지를 적어서 선물했다.

프랑스 침공에서 세운 무훈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롬멜은 자신의 기갑사단이 군단의 주공이 되기 위해서 막스 폰 하르클리프가 지휘하는 제5기갑사단에게 갈 군단의 보급물자 및 도하장비를 자신의 제7기갑사단에 몽땅 몰아줄 것을 헤르만 호트 군단장에게 요구했다. 두 기갑사단이 뫼즈 강을 동시에 도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에 롬멜이 호트에게 '그럼 우리가 먼저 도강하겠으니 이왕 우리가 먼저 갈 꺼 5기갑에게 갈 물자까지 선봉인 우리한테 몰아달라' 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하르클리프는 당연히 펄펄 뛰었고 호트 또한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에 당황했지만, 히틀러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롬멜이 워낙 자신있게 나오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제7기갑사단이 뫼즈 강을 최초로 도하하자 나치당의 선전기관들은 롬멜을 전략의 천재로 묘사하면서 선전선동에 열을 올렸고 곧바로 히틀러 총통 각하께서 롬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최전방에 몸소 발탁하셨다는 찬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롬멜 신화의 시작이다. 반면에 졸지에 모든 물자와 장비를 뻇긴 제5기갑사단과 하르클리프는 그냥 손빨고 있어야 했고, 정작 롬멜을 밀어준 호트의 결정은 조용히 묻히게 된다.

이렇게 뫼즈강 최초 도하를 성공시키면서 전쟁영웅으로 급부상한 롬멜은 그 다음 아라스 전차전에선 맞서 싸운 영국군 전차의 수를 5배로 오판하여 보고를 하는 바람에 독일군 수뇌부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였다. [4] 롬멜의 보고를 접수한 히틀러와 국방군 최고사령부(OKH)는 기존의 연합군은 상당한 전력으로 방어를 준비하고 있다는 불안을 더더욱 증폭시키게 되었고, 이것이 국방군의 진격정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거기다 롬멜 자신이 보다시피 허영심이 매우 강했고 장군참모로 대표되는 독일군 참모본부를 비아냥대는 발언을 기자들 앞에서도 일삼았기에,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므로 결국 상관은 깔보고, 하급 지휘관은 무시하는 스타일의 장교로 알려졌으며, 이는 상하급제대간의 인화단결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부하들에게 '파파'라는 애칭을 받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조차 이 롬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트는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의 직속상관이었고 롬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문제 때문에 꽤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이를 최선을 다해 조율해냈다. 이들의 상관인 4군 사령관인 귄터 폰 클루게 또한 롬멜은 루프트바페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의 희생은 경시한 채 자신의 전공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다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전후 수많은 롬멜 서적에서는 이렇게 롬멜을 비판한 귄터 폰 클루게를 '전공을 질투한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게 대부분.

심지어 이런 평가는 유능한 명장 뿐 아니라 다른 장군들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무능한 장군으로 유명한 무장친위대의 요제프 디트리히 기갑상급대장도 롬멜은 자기가 '아프리카의 왕'인줄 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성격상의 결함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당시 노르망디 전선에서 복잡하게 얽힌 지휘계통과 함께 수습불능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부대의 배치는 전략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롬멜의 기본 전략은 일리가 있었기에 이는 확실한 전략을 정하지 못한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상륙 이후에도 독일군 지휘체계는 여전히 혼선 상태였다. 오히려 롬멜의 부상 이후 혼선이 정리가 된다.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 점에도 약간 의문이 있는데, 제1차 토브룩 공격이 과도한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한 이후 제5경사단장 요하네스 슈트라이히 소장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섰다는 질책을 받고 롬멜에 의해 면직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그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롬멜 왈,"자네는 자네 부대의 안녕에만 너무 치중했네!" 물론 그 말을 들은 슈트라이히 소장은 기막혀하면서 "사단장으로서 그 이상의 칭찬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꾸했다. 다만 앞서말한 토브룩의 패배에 대해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고 기록했던 점과 대비되게 1943년부터 집필한 전사록에서는 '군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군사적으로 합당치 않은 용기는 어리석다, 그들은 무책임할 뿐이다.'라고 기록하거나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후퇴한 점을 보면 계속된 패배에서 심경의 변화와 반성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롬멜이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괴벨스가 과장한 프로파간다로 멀리서 롬멜이 오는 걸보면 발걸음을 돌릴 정도로 부하들은 학을 뗐다는 증언이 있었다. 보고할 때면 꼬투리를 잡아 망신을 주거나 의견을 개무시해서 다들 보고를 미루기도 했다는듯. 이것은 2002년 작 독일 다큐 'Mythos Rommel'. 실제 부하의 증언들이다.

물론 군인의 입장에서 철저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상사를 대하는 것은 어렵기에 딱히 롬멜이 잘못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자상했으며 사랑을 받았다는 이미지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과장된 면이 있음은 사실로 보인다.

또한 롬멜은 자신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B집단군 참모장이었던 한스 슈파이델 장군이 롬멜에게 히틀러의 암살에 동조하자고 제의를 했는데, 미수사건이 일어난 후 게슈타포가 음모자들을 체포할 때 슈파이델도 역시 체포되었다. 그때 롬멜은 슈파이델의 체포소식을 듣고 히틀러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슈파이델이 좋은 사람이며 결백하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성격상, 히틀러는 그러한 편지내용에 롬멜을 반역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편지를 쓴 것까지 모자라서 어느 지역 나치 당직자에게 '총통은 머릿속이 이상하다'고 말을 했는데 그 당직자는 바로 자신의 상관인 그 악명높은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하필 보르만은 롬멜에게 무시받던 사람이었고 그때문에 롬멜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 히틀러에게 롬멜의 멘트를 알려줬고 유죄라고 설득했다. 그래도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롬멜에게 기회를 주고자 자신의 본부로 초청했다. 그에게서 직접 결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총통의 초청을 거절했다. 며칠 후 그는 자살 메세지를 받게되었고 자살하게 되었다.

최근 독일 내부에서도 롬멜을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것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일례로 아프리카 군단이 전쟁 기간 동안 심어둔 1700만 발의 지뢰로 인해 리비아와 튀니지의 민간인 3300여명이 사망하고 7500여명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렇기에 독일 당국은 롬멜 기념비 앞에 불구가 된 피해자를 상징하는 조각상을 설립했다.# 롬멜 그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살상한 것은 아니지만 무차별적으로 지뢰를 메설해 민간인의 피해를 다발적으로 유발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1.4. 롬멜의 전략적 능력에 대한 비판[편집]


제 경험으로 판단해보건데, 롬멜 장군은 지난 전쟁에서 싸운 다른 독일 장군들의 능력과 비교했을 때 대단한 점도 없었고, 어떤 점에선 그들보다 못난 점도 많았습니다.

- 독일 다큐 'Mythos Rommel (롬멜 신화)'에 나오는 옛 부하의 증언


당시 대령인가 중령이었던 롬멜이 그랬습니다. "계속 공격하도록 해." 장교는 대답했어요. "이미 절반이 사상자입니다!" 롬멜은 그랬죠. "그게 공격을 중단할 이유인가? 계속 공격해!" 그 장교는 거기 서서 대답했습니다. "제 병사들은 제 시체를 밟아야만 진격할 수 있을겁니다!"

멜히오르 본 슐리펜바흐(아프리카 군단 참전 군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와 사막의 여우> 中[5]


또한 그가 아프리카에서 세운 전공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애초에 사령부가 주문했던 리비아 국경선 유지를 무시한 것이다. 게다가 사령부의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미 아프리카에 롬멜이 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보급의 문제점을 파악한 뒤였고, 아프리카로 파견된 롬멜이 2개 군단만 더 있으면 영국군 바를 수 있다고 하자 동부전선을 준비하면서 전력을 계산하느라 노이로제 직전까지 있던 참모총장 할더 상급대장이 기겁을 했다고 한다. 2개 사단에 불과한 병력만을 파견한 것도 현지의 이탈리아군을 보조해서 리비아를 지키라는 것. 남은 트리폴리까지 빼앗겨 영국군이 리비아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 당시 독일이 준비하던 소련침공작전인 발바롯사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날때까지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하라는 게 아니었다.

본문중에도 나오지만 당시 독일은 소련침공준비에 전력을 다하는 시점이었기에 북아프리카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무솔리니가 사고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된 것이다. 롬멜이 설치자 영국은 북아프리카에 가용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쏟아부었고, 국가전략이고 뭐고 일단 승리하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은 부풀어 올라 종국엔 롬멜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더 내달아 중동을 석권하고 터키를 끌어들인 후 캅카스까지 진출할 거라는 원대한 망상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트리폴리에서 카이로까지는 약 2000km고, 이는 폴란드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의 두배가까이 된다. 만약 여기서 캅카스까지 진출하려면 3000km를 더 가야 한다. 거리가 짧은 동부전선에서도 보급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캅카스까지 보급을 할 수는 없다. 일례로 아프리카 군단보다 훠얼씬 사정이 나았던 영미 연합군 조차 노르망디에서 600km거리인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에서 보급에 한계가 와 전 병력이 멈춰서야 했다.

그리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전투 에서 파울루스와 롬멜이 깨지면서 망상임이 드러났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독일군의 공세가 아니라 영국군의 공세로 시작됐다. 다만 특이점이라면 우세한 전력을 확보한 상태의 공격이었다는 것. 1차 전투는 독일군의 공세였으나 실패했고 2차 전투가 영국군의 공세였다. 여기서 추축군은 전력열세 및 보급부족으로 결국 방어에 실패하고 패주해야 했다. 즉, 히틀러는 증원전력은 커녕 기본적인 보급조차 제대로 못받고 있는 롬멜이 영국군을 격파하면서 수천킬로미터를 진격할 수 있다는 망상을 진지하게 설파했다는 것이다. 두 전투의 결말은 좀 다른데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의 대부분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소련의 천왕성 작전의 결과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는 바람에 6군 전력이 고스란히 날려먹게 된다. 그에 비하면 롬멜은 피해가 크기는 했지만 영국군도 공격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기상 악화로 공군의 공격도 제한적이었던 덕분에 후퇴해서 어찌저찌 수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어전을 펼치면서 버텨도 모자른 판에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 연장을 오히려 부추겨 종국에는 아프리카 전선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이탈리아 사령부와의 노골적인 반목으로 전선 전체를 혼란시켰다. 이는 롬멜이 1차대전때 전공을 세운 곳은 이탈리아였다는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미 1차대전 후에는 이탈리아 여행 당시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어서 롬멜은 이탈리아를 도우러 가는 장군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후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승리한 유일한 장군"으로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장군들의 자존심을 시궁창에 박아버렸던 탓도 크다.

실제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리토리오 기갑사단, 트렌토 차량화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일부 기동부대는 장비의 후진성과 훈련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전쟁에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주력부대였으며 토브룩 공략 당시 적의 전면을 담당한 부대에도 아리에테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아리에테 사단은 1942년 11월 4일 결국 전멸당하고 만다. 게다가 항상 보급품의 곤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아프리카 군단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던건 포위나 후방 감시 등, 기동 전력을 할애할 수 없는 부분을 맡아준 이탈리아 군대 덕분이었다. 보급이나 진지 공사 같은 궂은 일은 병력이 많은 이탈리아군이 도맡다시피 했고, 비록 취약한 보병사단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때 그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 역시 수적 주력인 이탈리아군이 맡아 왔다.

롬멜은 전쟁 초기 이들 때문에 뒷목잡은 경험들 탓에 이들을 무시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을 아예 완전히 공기급으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평가를 내림으로서 이탈리아군의 운용 가치를 매우 낮게 쳤다.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이며, 그들의 전차와 야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을 이탈리아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전쟁의 양상을 보면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2차대전이 전차와 야포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전쟁임은 틀림없지만 모든 건 보병이 핵심[6]이므로 이 발언이 이탈리아군을 까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군과 그 동맹군인 자신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만을 토로한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보급문제로 인해 "독일군 병사들도 영국요리노획식량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판에, 이탈리아군 병사들이 독일군 병사들에게 구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이탈리아군 장교들은 전세에 관계없이 제대로 차려먹었으므로 이탈리아군 장교에 한해서는 대부분 기존 평가가 맞긴 하다.

결정적으로 그의 전공은 상당 부분이 철저한 전장파악과 체계적인 계획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직관에 기인한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에 따른 대부분이어서 상대의 의표를 훌륭하게 찔러 놀라운 전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직관이 빗나갈 경우엔 참담한 피해를 입곤 하였다. 특히 1차 토브룩 공방전 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강공을 요구,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르고 시간을 낭비한 것도 그의 이러한 직관과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전투 성향 때문이었다. 이는 1941년 말 크루세이더 작전에서도 그대로 노출, 영국 30군단이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다는 속단 하에 아프리카군단의 공격 방향을 돌려버린 상태에서 30군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현장의 보고를 무시한 탓에 결국 그해 겨울의 후퇴를 자초하기도 했다. 물론 롬멜이 30군단을 무시하지 않았다 해도 후퇴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30군단에 대한 속단은 확실히 지휘관으로서는 해선 안 될 오판이었다.

이후 1942년 하계공세 때도 지나치게 직관에 의존,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일컬어지는 가잘라 전투 역시 하마터면 아프리카 군단의 전멸로 끝날 뻔 했다. 가잘라 전투 당시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군을 얕잡아보고 공세로 들어갔다가 영국군의 반격으로 포위당했었다. 그러나 당시 8군 사령관 리치의 소극적인 지휘 덕분에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을 면했고, 롬멜은 포위망 바깥에 있던 이탈리아군과 소수 독일군 부대를 지휘해서 포위망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국 8군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이 패배로 리치는 8군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오킨렉이 직접 8군의 지휘봉을 잡는다. 결국 간신히 대역전승을 거두었지만 항상 이렇게 위태로운 승리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휘관의 감을 중시하는건 독일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던 독일군의 전통이고 교육과정에서도 이를 극대화하려고 했으므로 자신의 직관을 따라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군 장교단의 특성이지 롬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전장파악과 체계적인 계획을 중시하고 직관을 부정적으로 본것은 소련군 장교단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독일 장교단 전체와 그 교육체계의 한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가장 롬멜이 불평했던 보급문제도 솔직히 말하자면 롬멜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프리카 전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유사시 독일군이 파견될 경우 최대 2개 사단이 보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을 했다.

실제로도 적군의 방해가 없고 그냥 일직선으로 트럭을 몰고 가기만 하면 땡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엄청난 거리가 발목을 잡게 된다. 우선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의 거리가 소련의 국경선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의 거리를 추가할 경우, 독일의 베를린에서 청색 작전의 최종 목적지중 하나인 코카서스 산맥 근처의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바쿠와 비슷한 거리가 된다. 물론 중간에 벵가지나 토브룩 같은 항구가 있긴 하지만 지중해의 제해권을 어느쪽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라 영국 해군을 피해서 수송해야 되는 데다가 항만의 크기도 트리폴리보다 작은 것이 큰 문제였다.

의외로 지중해에서 영국과 추축국간의 세력도는 팽팽한 편이었다. 영국 해군의 총 전력이야 이탈리아군을 압도할 수 있지만 영국 해군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동시에 상대하는건 기본에 일부 전력은 인도양에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지중해에 전력을 집중하고 독일 공군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이탈리아 해군이 충분히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화물을 이들 작은 항구에 내려도 전선까지 1,000km이 넘는 거리를 오로지 트럭에만 의존해서 수송해야 하는 막장상황이 밥먹듯이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의 물자가 하역되는 트리폴리라면 전선까지의 거리는 2,000km은 껌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제대로 된 길은 심심하면 영국 해군과 공군에게 공격받는 해안도로 한개, 철도는 없다시피 하고, 지중해를 건널 때 몰타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동부전선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보급하기 정말 안좋은 지역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다. 이런 것을 해결하려고 U보트도 파견했지만 몰타, 수에즈, 어디서 계속 보급받는 영국함대. 몰타를 못 죽인 것도 있지만, 이탈리아 함대와 영국 함대가 서로 다른 의미로 짱박혀서.

따라서, 이런 악조건에서 보급을 유지하려면 롬멜이 언급한 것처럼 트럭만 따져도 최소한 8,000대 이상 필요한데, 그 당시 동부전선 전체의 보급을 담당하던 트럭은 고작 14,000대에 불과했으므로 사실상 독일은 롬멜의 요구를 들어줄래도 그럴 능력이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합동으로 지중해에서 영국의 불침 항공모함 역할을 하며 보급품 선단에 큰 피해를 주고 있던 몰타 섬 공략을 추진하고 있었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사실상 몰타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에도 성공했었다. 그러나 롬멜이 영국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위한 최종 공세를 실시하기 위해 몰타 섬 공략을 위해 할당된 자원을 중간에서 가로챘고 결국 몰타 섬 공략과 북아프리카 제압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몰타 섬 역시 크레타 섬 과 같이 대규모 공수작전이 필요했다. 그게 한번도 없어서 말아먹은 것.

게다가 적이 정신차리기 전에 빨리 전과를 올리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닥돌선호하는 전투 스타일 때문에 그의 부대는 만성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롬멜의 전투 기록을 보면 항상 기름이 모자라서 진격이 둔화되고, 이 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적군에게 낭패를 본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공군에게 그들의 능력 이상의 항공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공군 장교들을 만날 때마다 "왜 하늘에는 항상 영국 전투기들만 보이나!?"하고 불평했다고 한다. 알고 보면 이탈리아 공군 원수가 팀킬당한 시점에서 제공권이 아작났다

비록 그가 천재적인 현장 지휘관의 직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롬멜은 전간기에 상급제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전략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들로 주로 구성된 참모 장교들에 대한 컴플렉스와 편견으로 인해 스스로 그 기회를 거절했다. 이로인해 결국 끽해야 현장 지휘관 수준의 전략적 안목밖에 가지지 못한 상태로 2차대전에서 한 전역의 총사령관까지 맡으면서 큰 문제들을 야기했다. 독일 참모장교단의 작전계획 만드는 능력은 타 국가들보다 평균적으로 출중했고 이는 독일군에게 전장을 유리하게 만든 주요 자산 중 하나였다. 비록 최전선 현장에서는 언제나 작계와 현실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 오차를 현장 지휘관들의 개인 역량으로 메꾼다는걸 감안해도 폄하될 수 없는 영역이다. 헌데 롬멜은 그 참모장교단의 가치를 아예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잘 지내면서 협조해야할 동급자와 상급자들을 경쟁자로 보고 툭하면 불화를 일으키기나 하고, 보급에 대해서도 이제는 상급 지휘관이 된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짤때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도 이해 못하고 지 멋대로 진격하면서 애먼 사람들에게 보급 더 달라고 땡깡만 부렸다. 이런 자세로 전쟁에 임한 롬멜이 제대로 된 상급 지휘관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되는 수준이다.

여기에 앞에서 말했듯이 적국의 뛰어난 장군을 의도적으로 추켜세워 자신들의 실패를 좀 더 만회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적인 롬멜 띄우기로 인해 그의 명성은 실제 전과에 비해 과대포장되었다는 논란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영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체면을 세운 적이 한두번이 아닌지라… 그 덕에 롬멜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장군, 원수 네다섯명과 동급의 장군들을 다 제쳐 두고 독일 장군의 대표인 양 띄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상대한 영/미군이 당시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비교해 질은 더 좋았지만 그 숫자는 몹시 적었다는 생각해 보면 의외로 그의 전과가 대단치 않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당장 단 목숨이 사병 목숨일 정도로 전투의 스케일이 달랐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영미군이 소련군보다 질이 좋았다는 소리도 전쟁 초반에나 통하는 소리였다. 전차만 봐도 아프리카 군단에 그랜트/리, 크루세이더가 주력을 맡고 최신예 M4 셔먼이 슬슬 보일락 말락 하던 시기에 소련에서는 셔먼과 비슷한 성능의 T-34-76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소련군 보병도 화력 면에서 MG42 수준은 아니여도 꽤나 우수한 DP-28 기관총과 우수한 기관단총 시리즈가 대량 보급되어, 전군에 반자동 소총을 보급한 미군과도 견줄 법한 강력한 화력을 보여주었다. 소련 포병의 경우, 꽤나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유명한 카츄샤 다연장로켓ISU-152등의 자주포를 비롯한 화력투사수단으로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보병 개개인의 수준에서도 독일군은 영국군과 소련군을 뛰어나다고 평가했고 반면 미군 보병이 미숙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 때 정도면 미군의 숙련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통념과 다르게 소련군이 '물량빨로 낮은 질을 커버하는 군대'는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부에서 모두 교전한 경험이 있는 독일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는 자신이 못 본 미군 정예부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자신이 경험한 바로는 소련군 1명이 미군 5명보다도 강하다고 평가했다. 상황이 이러니 롬멜의 업적이 더욱 뻥튀기되었다는 비판이 더욱 일리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물론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연합군은 "영연방군 지상군 전체의 거의 절반"이었다. 초반에는 그리스 전역 등지 때문에 약화되었던 영국군이었지만 유럽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고 지상군을 투입할 전역이 북아프리카밖에 없었던 관계로 가용가능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북아프리카에 쏟아부었다. 당시 처칠이 얼마나 절박했냐 하면 당시 미국이 중국에 보내준 전투기와 각종 병기들까지 장제스에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 물자가 영국령을 경유하는 틈을 타서 죄다 도둑질해서 이집트로 보내버렸다. 이 때문에 장제스랑 정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지프 스틸웰조차 장제스 보길 미안해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몇만명이 허공으로 사라지던 동부전선(독소전쟁)에 비하면 아프리카 전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애초에 영국은 해군국으로 지상군은 소련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었었고, 식민지 부대들과 영연방군까지 함께 계산한다면 영국 입장에서는 판돈을 전부 거는셈이였다. 게다가 동부전선은 바로 2차대전의 승패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나치독일과 소련이 모두 국가의 운명을 걸고 덤벼들었다.

반면에 아프리카 전선은 히틀러와 롬멜만이 중동까지 진격해서 코카서스 남부로 돌격한다는 환상을 떠들고 있었지, 냉정하게 말해서 전쟁의 전체적인 향배에는 큰 영향을 못주는 지역이었다. 물론 무기대여법 물자 상당수가 영국령 이란을 통해서 소련으로 수송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선 중동 지역도 어떻게든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긴 했다. 하지만 당시 롬멜이 놀고 있는 리비아와 무기대여법 물자의 수송로인 이란은 40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보급의 한계 때문에 독일군은 그 리비아조차 못넘어서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다만 북아프리카가 완전히 연합군의 손에 떨어지면 그 다음은 이탈리아나 남프랑스 지역을 직접 공격할 수 있고 연합군이 남프랑스에 상륙하거나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이탈하면 독일 입장에서도 좋을게 전혀 없는것도 사실이긴 했다. 나치독일의 승승장구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전략적 고려없이 덤벼든 곳이기도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이 완전히 무의미한 전역은 아니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라면 독일군은 물자를 비축하면서 굳건한 방어태세를 유지했어야 한다. 실제로 독일군 수뇌부의 명령도 그러했고. 하지만 롬멜은 개인적인 전공에 눈이 멀어서 멋대로 전선을 무제한 확대해버렸다.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독일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동부전선에 배치된 병력의 일부를 이쪽으로 차출해야 했다.

롬멜이 아프리카로 파견된 이유 자체가 이탈리아의 지원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히틀러와 소련침공을 앞두고 병력과 물자를 낭비할 수 없는 국방군의 타협의 산물이다. 그냥 병력은 체면치레 할 정도로 조금만 보내면서 (선전기관의 과대포장으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롬멜의 이름값으로 땜빵할려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롬멜에게 내려진 명령도 영국군을 쫓아만 내고, 추격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는데 전공에 눈이 먼 롬멜이 이를 무시하고 전선을 무한정 확대해서 독일군의 전쟁수행능력에 구멍을 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1941년의 롬멜의 공세는 본래 이탈리아의 영토를 탈환하는것에 불과했고 이는 애초에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 합의된 사인아있다. 다만 합의된 사항과 실제로 그정도의 영역을 되찾는 행위 조차도 보급을 제대로 못했었던 그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롬멜 자신도 어느정도 타협은 해야했던게 맞았다.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전쟁 당시에 이미 자기 전공 선전에 열을 올린 롬멜에 비판적이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 마타주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수여된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엉뚱하게도 점령소식이 잘못 알려서 딴 사람에게 뺏겼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찾은 후부터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독일군 통수본부에까지 문제가 올라가기도 했으며 롬멜 본인이 마타주르 전투를 자랑스러워 한 만큼이나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런 점과 필요에 의해서 괴벨스가 롬멜의 전공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주기도 했다. 경호실 시절의 친분과 히틀러의 총애가 상당히 작용한 것. 괴벨스의 일기에 롬멜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긴 하나 원래 괴벨스의 일기에선 인물 평가가 일관적이지 않고 독일군의 전황에 맞추어 그때 그때 다르다.

독일 육군의 최고참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을 애송이 원수, 광대 원수라고 부하들 앞에서 얘기했다는데 이는 기존 항목에 서술된 대로 전쟁대학 운운한 것이라기 보다는 롬멜이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용하고 이에 출연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게 종전 후 군사 서류에 기록된 내용이다. 당시 서부전선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에 따르면 룬트슈테트 특유의 귀족적인 자존심 때문에 롬멜에게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 하고, 오히려 이러한 영상을 보며 (비)웃으며 즐기는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롬멜과의 대화 자체는 겉으로 보이는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견했다는 사실도 또한 논란이다. 무능한 독일군 수뇌부가 헛발질 하는 동안에 천재적인 롬멜만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상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완벽한 소설일뿐이다. 무엇보다 1944년 즈음 해서 연합군의 유럽본토 상륙은 독일군수뇌부에선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군사적으론 무능하기 그지 없었던 히틀러마저도! 이탈리아 전선이 고착화있는 상황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연합군이 영불해협을 건너서 북프랑스에 초대규모의 상륙작전을 벌일 것이라 예상하고, 상륙지점으로 예상한 파드 칼레와 노르망디 두 곳에 대규모 방어시설 공사를 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연합군이 영국본토에서 최단거리인 칼레 상륙을 포기한건 험준한 지형과 독일군이 구축한 거대한 방어장벽 때문이었다. 반면에 노르망디는 아직 방어시설 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롬멜은 원래 상륙지를 파드 칼레로 예상하였다. 오히려 노르망디를 상륙지점으로 예상한 사람은 히틀러였고 이는 순전히 감이었다. 파드 칼레에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기만작전이 행해지자 "연합군 놈들은 속임수를 많이 쓴단 말야!!"라며… 롬멜은 또한 그 이전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한 부대배치에 관해서 하급자인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과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서부전선의 최고지휘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히틀러가 중재에 나서면서 (연합군에 비하면) 얼마되지도 않는 병력이 이리저리 지휘계통이 쪼개져서 여기저기 분산배치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부분은 채승병이 올린 자료를 참조할 것. 2016년 현재 채승병의 페리스코프 블로그(http://www.periskop.info)는 닫혔으며, 링크는 아카이브(http://archive.is)에 남아있는 자료다.

해안으로 밀어내느냐, 아니면 끌어들여서 격퇴하느냐의 의견차이였다. 슈베펜부르크는 상륙지점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독일군을 상륙예상지점마다 분산배치하면 거대한 규모의 상륙군에 각개격파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특히 연합군의 함포 사격을 대단히 위협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방어진지를 축조하고 병력을 투입해도 해안가에서 상륙을 막는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해안가에는 소수의 경계부대만 두고, 주전력을 프랑스 내륙에 모아두었다가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확실해지면 급속기동해서 격멸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기갑부대 지휘관다운 발상이다. 반면에 롬멜은 연합군의 거대한 공군력을 크게 우려하였다. 슈베펜부르크의 제안대로 할 경우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 공군의 폭격 때문에 독일군 기갑부대의 이동은 계속 지체될 것이며, 그 사이에 독일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연합군 지상군이 계속 상륙할 것이란게 롬멜의 예상이었다. 따라서 상륙예상지점마다 부대를 배치해서 무조건 해안가에서 상륙군 선봉대를 전멸시키고 연합군의 상륙작전 자체를 무산시켜야 한다는게 롬멜의 제안이었다.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연합군의 물량을 감당할 수 없고, 콘크리트 진지와 토치카라면 함포사격은 큰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양쪽다 일리가 있는 주장인데, 히틀러가 제시한 해결책은 병력을 나눠서 일부는 롬멜 지휘하에 해안가에 두고, 일부는 슈베펜부르크 지휘하에 내륙에 둔는 애매한 절충안이었다. 결국 양측 의견의 단점만 극대화 되어서 모두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연합군에 녹아내렸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뭘 어떻게 해도 안될 정도로 연합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프랑스 전선에서의 옛 경험 등에 근거해서 노장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에 대해 사단장감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 영국 측에서도 '군단장 정도를 맡을 인물'이라고 평한걸 보면 당시 평판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전술적 능력을 탁월하였으나 전략적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기에 원수봉을 쥔 것은 솔직히 낙하산 인사라는 의견이 많다. 룬트슈테트는 롬멜의 장례에서 '롬멜을 만나본 후 그에 대한 편견이 바뀌었다'고 회고하였지만 B집단군을 대표하여 장례식에 참석한 빈리히 베어 소령은 룬트슈테트의 장례사에 대하여 매우 위선적이었다고 비판했다. 고인모욕하기 싫어서 그냥 말바꿨다는 얘기.[7] 장례식에서 직장 부하를 깔 순 없는 노릇이잖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패배는 유능한 장군인 롬멜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2차대전사를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 심각하게 그릇된 의견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당연히 사장된 상태. 동부전선에서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페도어 폰 보크 등 당대 그리고 전쟁의 역사에 남을 명장들이 있었고 롬멜이 이들에 비해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실력이 낫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노르망디 상륙 이후 서부전선에서 B집단군 사령관이 롬멜의 부상 이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로 교체되면서 오히려 독일군의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은 그동안 롬멜 찬양만을 일삼던 영어권 서적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참고로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전역 이후 노르망디 상륙까지 영미 연합군을 상대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동부전선 전문가들이었음에도 그동안 영미 연합군만 상대해온 롬멜보다 이들을 상대하는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5. 유대인에 대한 처우 [편집]


롬멜이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관련 범죄 논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고 있다.# 기존의 주장은 롬멜이 영국군 포로중 유대인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퇴각하면서 포로들을 수용소에 그냥 놔두고 퇴각해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이를 히틀러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고, 롬멜의 부관이었던 슈미트의 회고록에 의하면 프랑스 침공 당시 히틀러가 내린 유태인포로 학살명령서를 참모장이 무시하자고 건의했고 롬멜도 동의하여 명령서를 소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의 볼프강 프로스케 박사는 영국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롬멜이 유대인들을 '지뢰탐지'에 동원했고 강제로 끌려온 이들은 독일군에 앞서 지뢰밭을 통과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이 2009년, 독일 SWR 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롬멜의 유가족, 특히 당시 82세였던 만프레트 롬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만프레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이며 나치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라며 부정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13일, 미국의 역사학자 게르하르트 와인버그는 이집트에 주둔한 아인자츠그루펜은 고작 24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에게 롬멜이 군단 전체의 협력을 약속했다고 Journal of Military History에 기고했다. 아울러 이런 군인이 나치 범죄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신화적 명성을 얻는 것은 부당하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하인츠 구데리안루트비히 베크[8]

, 만슈타인롬멜, 되니츠케셀링, 밀히[9]우데트 같은 자들을 나치 이념과 통치로부터 귀를 막은 채 그들의 맡은 소임과 조국의 재무장화를 위해 묵묵히 일한 참된 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치로서의 해방구"라는 국방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히틀러와 신세대 독일 장군들간의 교류는 이렇듯 국방군이 나치 영향력 하로 들어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메르 바르토프(브라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2차대전 독일군 전문가), "Soldiers, Nazis, and War in the Third Reich".


1.6.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편집]


롬멜에겐 야망이 있었다. 1943~44년까지 그는 의식적으로 총통의 신뢰를 강조한 '총통의 원수(Führer's Marshal)'였다. 롬멜은 아프리카의 참패에 자존심이 매우 상했고 파리로 이동하는 몇 시간 동안 줄곧 나에게 OKW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총통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1944년 봄, 그는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로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롬멜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질 때만 룬트슈테트의 명령을 따랐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히틀러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롬멜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총통께서는 내게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셨네." 이 말은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대한 압력을 의미했다. 그는 결코 룬트슈테트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나와 참모들을 통해서 이를 전했다.

FMS B-308, <OB West, Command Relationships>에서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 귄터 블루멘트리트 보병대장의 기록


롬멜 옹호론자들과 롬멜 신화는 '정치적 야심과는 무관한 순수 군인'이라는 전제를 고집하기 때문에 롬멜이 얼마나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했고 히틀러의 권위를 이용했는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 롬멜이 1943년 북아프리카에서의 패전과 1944년 서부전선 패배를 겪으면서 히틀러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전까지 1934년 국방군 장교단의 충성 맹세 시점부터 1944년 서부전선 개전 이전까지 여전히 롬멜이 여느 독일인이 그렇듯이 히틀러를 추종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롬멜을 옹호하기 위해 '주코프와 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독선적이며 패튼은 아이젠하워가 뒤를 봐준 건데 왜 롬멜한테만 엄격하냐'며 전형적인 양비론을 편다. 그러나 몇 배 더 독선적인 기준이란 건 따로 없으며 위의 기록과 비교하여 주코프, 맥아더, 패튼이 '자국 최고 지도자의 권위를 빌려서 총사령관과 참모들을 압박한 적도 없다.주코프가 그랬으면 당장 숙청됐을 거다. 주코프는 스탈린의 권위를 빌린 적은 있으나 최소한 그것으로 자신의 상관을 압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코프는 스탈린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주코프는 명목상 총사령 대리, 즉 상관이 스탈린 뿐이었고 군 내에선 실질적인 소련군 총사령관이었다.

사적으로 불화가 있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 이를 가지고 히틀러의 권위까지 동원하며 수십만 장병의 목숨이 달린 총사령부의 지휘 체계를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위의 보고서의 제목을 보면, 얼마나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지휘관들 간에 알력이 심했는지 미군은 전후에 이를 따로 분석하는 기록까지 남겨둘 정도였다.

요아힘 루데비크 교수는 자신의 저서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에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고 분석했다. 롬멜이 히틀러를 방패 삼아 서부전선 총사령부에 간섭한 대가는 독일군 장병들의 사상자 수로 치러야 했다.[10]


1.7. 롬멜 신화의 허구성과 재평가[편집]


위의 롬멜을 옹호하는 반론 문단들은 냉전의 종식 후 공개된 자료를 반영한 최신 연구가 아닌, 영국의 데스몬드 영의 저서 이후 정립된 롬멜 신화의 기존 내용들로 1950년 대 말부터 냉전 무렵까지 주류가 되었던 내용에 불과하다. 특히 카를 슈트뢸린이 재직했던 슈투트가르트는 전후에 롬멜의 아들인 만프레트 롬멜이 시장으로 재직한 곳으로, 히틀러 암살 음모와 관련하여 롬멜의 죽음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롬멜의 고향 만큼이나 강한 곳이다.

만프레트는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 '아버지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이며 나치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라며 롬멜의 전범 행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대신, 아예 방영도 못하게 막은 인물이다. 정작 롬멜 신화가 재평가되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이어지는 최신 연구에서 게르하르트 와인버그, 오메르 바르토프, 이언 배킷 등에 의해 오히려 롬멜은 히틀러의 열혈 추종자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듯 아들인 만프레트가 아버지를 옹호하는 주장과 그 동안 공개되지 못했던 실제 사실은 큰 차이가 있다. 롬멜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이고, 사실과 달랐다.

롬멜의 아내는 '뷔르템부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하지 않는다'며 롬멜의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를 부인했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지만, 카를 슈트뢸린은 한스 슈파이델과 함께 '히틀러 암살 후 롬멜을 수반으로 추대'할 것을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등 슈파이델의 롬멜 신화 정립에 가장 동조한 인물이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슈파이델을 비롯한 이러한 암살자 그룹이 주장하는 내용은 상당수 틀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국군버나드 로 몽고메리조차 자신이 저술한 전쟁의 역사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해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비판한 뒤, 자신의 라이벌인 롬멜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 롬멜 신화 재평가 움직임에 나타난 21세기 초반의 롬멜을 옹호하고 이해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서적들에서조차 카를 슈트뢸린의 주장처럼 롬멜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암살 시도와 전혀 무관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정부 일원으로 정해 놓는 등 암살자 그룹이 일방적으로 끌어다 놓은 독일 고위 인사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한스 슈파이델과 카를 슈트뢸린의 주장만으로 롬멜이 반 히틀러 인물이라고 정의되었던 시대는 지난 것이다.


1.8. 롬멜의 자기 과시와 영국의 의도적 고평가[편집]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독일 연방군 전사연구소에서 근무 중인 군사학 박사 게르하르트 P. 그로스 대령은 롬멜이 유달리 영국과 미국에서 고평가되었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편으로는 롬멜이 인기를 중시한 완벽한 자기 과시,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국이 그를 극복한 인물인 버나드 L. 몽고메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능력을 과도하게 부각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롬멜은 독일의 작전적 사고에 내재된 군수문제를 경시했던 전형적인 장군이었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건 독일군 장교단의 전반적인 문제고 롬멜도 예외는 아니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고 전술적으로 전투의 승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짙은건 독일 장교들의 전체적인 경향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롬멜은 그런 독일 장교단들 중에서도 대장~원수까지 올라간 다른 고위 장군들에 비해서는 고차원적인 전략에 대한 이해 부족이 심각한 편이었다. 만슈타인이나 발터 모델 같은 다른 독일의 명장들은 자기 부대의 보급 관리도 철저히 할 뿐더러 적군의 보급이 끊기는 공세종말점을 파악해 적을 한계까지 유인하고 적의 보급이 한계를 보인 그 순간을 바로 포착해 반격-섬멸하는 고차원적인 전술을 썼지만, 롬멜은 자기 부대 보급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지조차 생각을 안 하고 진격해 보급 한계 상황을 스스로 만든 인간이다.

이렇듯 롬멜은 죽은 뒤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도 명성에 어느정도 거품이 끼어 있었고, 이 거품낀 명성을 나치당과 반나치 활동가들이 모두 이용하려 하는 와중에 중간에 끼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1.9. 몇 가지 추가적인 비판[편집]


'반론' 문단들 중 일부는 본문이 롬멜을 비판하고 있는 지점들 중 몇 가지를 잘못 이해한 채로 허수아비를 공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롬멜이 사령부의 명령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반박이 그러한데, 본문은 롬멜이 수년간 계속해서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작전을 폈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본문이 지적하는 바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진격이 독일군 전체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이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 전선 초기에 한해서 말하자면 분명히 롬멜은 주어진 명령을 넘어선 독단 행위를 했다. 물론 롬멜의 이러한 독단 행동이 독일군 전체에 도움이 되었다면 넘어갈순 있다. 구데리안도 롬멜도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최고사령부와 OKH 틀딱들 엿이나 까드쇼라며 내달렸고 결과론적으로는 프랑스를 모랄빵내며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독일에겐 이탈리아 땜에 어거지로 딸려온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롬멜의 이같은 화려한 승리와 자랑이 독일군 최고 결정권자를 오판하게 만들어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전략 구상을 역량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변경하게 만들었다.[11]

독일군 사령부가 롬멜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승인 및 지원해서 롬멜이 계속 진격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이처럼 롬멜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이었다고 봐야 하는데, 본문이 비판하는 것은 롬멜 스스로가 이같은 진격이 독일군 전체의 전략에 비추어 효과적인 것인지를 사고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사령부가 롬멜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으니까 롬멜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론하는 것은 요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탈리아군이 보급만 축낸다는 반론에서 간과되는 사실이 있는데 전쟁에서는 숫자 역시 중요하다. 전차는 맨몸의 보병으로는 상대하기 어렵지만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보병용 대전차화기가 없다고 해서 급한대로 전용할 야포나 대전차포까지 없는 것도 아니고, 보병의 총탄에 안뚫린다고 신나게 진격하다가 고립되면 끝이다. 이탈리아군 전차도 전차전에 부적합했다지만 막상 큰 차이 없는 영국군 구식 전차들이나 보병을 상대하는건 가능하니 롬멜 스스로도 해당 용도에 적절히 사용했다. 이러한 이탈리아군 병력, 특히 알보병이 과도하게 많은건 도움이 안된다는건 지극히 전술적인 관점이고, 전략 단위에선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군단이 전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측면을 봐주고 조공을 지원하고 때로는 버림패로 쓰이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탈리아 보병이 숫적인 물량이라도 확보해주지 못했다면 아프리카 군단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붕괴는 더 빨리 찾아왔을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이탈리아군이 무능했기 때문에 롬멜이 졌다는 반론은 타당하지 못하다.


2. 반론[편집]



2.1. 롬멜은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했다?[편집]


말이 안 되는 주장에 가깝다. 롬멜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취한 기간은 몇 년에 달한다. 롬멜이라고 해서 계속 공세를 가한 건 아니어서 중간중간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때마다 부대를 정지시키고 전력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본국에 보급품을 요청해 받아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부가 몇 년씩 전역 전체가 명령을 무시하는 걸 방기했다는 건 독일 사령부 전원이 직무태만이라는 주장이랑 동급이다. 특히 히틀러는 됭케르크 철수 때와 같이 일선 부대에 일일이 태클을 걸었는데, 그 사령부 전체가 롬멜이 몇 년동안 공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명령 무시를 모르고 있었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프리카 전선 초창기에 사령부가 방어전을 염두에 둔 건 사실이나, 이후에 롬멜이 기동전으로 영국군을 때려잡는 걸 보고는 입장을 바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심지어 롬멜은 엘 알라마인 이후 당장 퇴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고 사령부는 이를 묵살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령부에서도 롬멜의 진군 작전 자체를 완전히 파악 및 허가한 상태라는 것이다.[12] 사령부에서 진군을 하라고 했는데 독단적으로 진군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것이 더 비난받을 일이다.

롬멜의 진격 성공으로 인한 사령부와 히틀러의 오판에 대해서는 더더욱 롬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을 전쟁터의 일선 장군이 책임지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이런 논리라면 구데리안도 낫질작전의 성공으로 히틀러에게 망상을 심어주었으니 책임져야 한다. 즉 모든 장군의 작전 성공이나 대승은 사령부의 오판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장군은 절대로 성공하거나 대승을 거둬서는 아니된다는 논리나 다름없다. 롬멜은 사령부의 결정권자가 아니었으므로 이 공격은 부당하다. 사령부가 오판을 내렸다면 사령부를 비난해야지, 일선 장군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2.2. 보급 곤란을 자초했다?[편집]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전선을 바라보는 독일의 관점과 이탈리아의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 독일의 관점에서, 아프리카 전선은 제2 전선으로서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전선에 가까웠다. 반면 이탈리아 입장에서 아프리카 전선은 이탈리아의 이익과 본토 방어를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선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장비들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군 부대중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부대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건 일부 부대의 사례고, 일반적으로 아무리 군대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고 싶어도 부대 장비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 이걸 영웅적인 부대가 했으니 하라는건 전형적인 일본군식 정신력 드립일 뿐이다. 구식인 이탈리아군 전차로는 영국의 마틸다 II조차도 아예 상대할 수 없었다. 참고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이 주력으로 쓴 전차는 M13/40으로, 문제의 일본군 치하 전차에게도 스펙에서 밀리는 수준의 전차다. 전차전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전선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고, 이탈리아군을 박박 긁어다 롬멜에게 보내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차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일군조차 판저파우스트나 판저슈렉 같은 보병용 대전차 화기가 없던 상황에서, 이탈리아군 보병이 과도하게 많은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군과 다른 점은 일본군은 그런 상황에서 대전차 총검술을 내세워 보병으로 돌격을 강요했다는 것이고, 독일군 장교들은 그런 무의미한 생각을 안했다는데 있다.

문제는 그런 상태의 잉여전력이 독일군 전력의 3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1942년 11월 기준으로 독일군 4개 사단이 편제된 아프리카 전선에, 이탈리아군 12개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보병이라고 보급품 안 먹는 것도 아니고, 구형 전차면 기름 안 넣어도 굴러가는거도 아니다. 이탈리아군의 보급 수요는 독일군에 비해 휠씬 컸으며, 이는 영국보다 빈약한 전력을 가진 독일군이 보급난에 시달린 주 원인이다. 즉 북아프리카 전역을 열어버린 이탈리아가 사활을 걸고 북아프리카를 지켜내고자 이리저리 내달린 영국을 그것도 본토는 독일 U보트로 고생하고 있는 영국 하나 잡지 못할 정도로 국가와 군대의 전반적인 국력이 부족했으며 본토에 가두어 놓고서도 왕립 공군의 방공망을 뚫는데 실패한 독일의 입장에서도 영국군에 상응하는 한개 군 수준의 병력을 투사해야 했지만 독소 전쟁이라는 자충수 덕분에 그러할 역량조차 되지 않았다. 프랑스 침공 당시 비록 조공이긴 했지만 독일 B집단군이 잘 준비된 영국해외원정군 방어선을 뚫는데 고생했던 것을 고려하면 결국 롬멜의 보급 문제는 이탈리아가 지중해 영국군 세력을 공략하지도 못할 정도의 전력으로[13] 멋대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열어버린 이후 폭망해버린 시점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2.3. 엘 알라마인 전투의 보급 문제?[편집]


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끝장난 시기로 엘 알라마인 보급 문제를 들 수 있다. 롬멜 비판하는 사람은 엘 알라마인에까지 보급 문제를 근거로 롬멜을 비판한다. 문제는 이 보급난을 롬멜의 실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토브룩에서 충분한 물자를 손에 넣은 건 사실이므로 알렉산드리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까지 가면 영국 해군을 지중해에서 몰아낼 수 있으므로 보급 문제는 해결된다. 이게 엘 알라마인에서 영국의 방어에 눌려 고착화될 것인지는 이집트 국경을 넘는 시점에선 판단이 불가능한 예지의 영역이다. 이후 엘 알라마인에서 전선이 고착되자, 롬멜은 현재의 보급 체계로는 엘 알라마인에서 지속 전투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퇴각을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롬멜이 소련 남부까지 진격하는 망상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 퇴각을 거부한다.


2.4. 영국군이 롬멜을 띄웠던 것은 단순한 체면 살리기였다?[편집]


당시 영국군 전투서열을 보면 알겠지만 롬멜의 적수들은 절대 듣보잡이 아니었다. 롬멜과 맞붙었던 오킨렉, 리치, 웨이벌, 몽고메리 등은 영국 내에서 인정받는 장군들이었다. 그중에서 오킨렉의 경우는 롬멜의 대한 공포증으로 겁먹은 병사들에게 롬멜은 초인이 아니라는 공문까지 돌렸는데 이런 것도 체면살리기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처칠의 경우 토브룩이 함락되자마자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안까지 제출되는 등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한마디로 영국이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기위해 롬멜을 띄웠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육군이 혼자서 싸웠던 네임드 독일 장군은 롬멜이 유일하다. 시칠리아 상륙과 이어지는 이탈리아 전선, 노르망디 상륙 등의 경우는 미국과의 연합작전이었고 양쪽의 비율이 반반은 된다. 반면 북아프리카의 경우는 후반부를 제외하면 영국과 영연방군이 주력이었다. 더구나 롬멜과 싸웠던 전장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이집트가 있는 북아프리카였다. 2차대전 전 기간을 돌이켜보면 영국 육군 단독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건 롬멜과의 북아프리카 전역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북아프리카야말로 사활이 달린 지역이었고 특히 이집트를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독소전쟁에서 롬멜보다 뛰어난 독일 장군들이 많았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자국군과 일전을 겨룬 롬멜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소전은 비록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라도 외국끼리의 전쟁이었다. 외국간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국 장군보다 자국군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군 장군을 더 높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2.5. 롬멜이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건 프로파간다가 아니다[편집]


"그런 점에서는 허영심이 좀 있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헬무트 폰 라이프치히(롬멜의 운전병),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와 사막의 여우> 中

단도직입적으로 일부 부하들의 증언으로 롬멜이 자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것은 확증편향이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한 병사의 경우 롬멜의 계급조차 완전히 틀렸는데 롬멜은 7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북아프리카에 중장으로 갔다가 원수로 진급했다.

롬멜이 독선적이고 허영심이 많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부하 장교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불만이나 민원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최대한 조치해 주려고 했고, 질책을 퍼부었다가도 이후에 이것이 부당한 질책임이 판명되면 반드시 그에 대해서 해명을 했다. 이런 철저한 성격 덕분에 병사들에게는 인기가 많았고, 참모장교 등 중간간부들에게는 비호감이었다. 모든 부하들, 즉 병사들까지 롬멜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고, 어디까지나 참모 등의 중간간부들이다.

사실 조직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철저하게 명령을 하는 자리와 그 명령을 "직접" 받는 자리는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한스 폰 루크의 경우 대대장이 부재했던 당시 중대장 중 제일 어렸지만 능력을 높이 평가해 롬멜이 등용한 경우로 훗날 그가 21기갑사단 소속 기갑수색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벌인 활약, 굿우드 작전에서 캉 방면으로 공세하는 영국군을 저지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롬멜의 최측근으로 구데리안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롬멜과 매우 원만하게 지냈다는 점에서 분명 롬멜이 무조건 자상했다는 것이 프로파간다라고 치부하기에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롬멜은 후방에 전선 사령부에 틀어박히는 걸 싫어하고 직접 적진 위를 비행하며 상황을 보던 장군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휘하 부대 지휘관의 사정을 복합적으로 고려 안하고 공격에 매진시킨 것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문제지 이걸 가지고 학을 뗐다는 일부 지휘관의 증언을 전체로 확대하기엔 논리가 비약하다. 분명 롬멜은 프로파간다의 도움을 받았지만 군필자라면 알듯이 일선 병사들의 의견은 오히려 프로파간다의 영향이 적다는 것이다. 분명 프랑스 침공과 북아프리카에서 앞장서는 모습은 일선 지휘관에게는 갈굼만 받으니 싫었겠지만 병사들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2.6. 롬멜과 다른 동료장군과의 관계[편집]


분명히 롬멜은 독선적인 면모를 보여 동료장군과 어느정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롬멜을 비판하는 책에서는 정작 롬멜이 구데리안과 같은 유능한 장군과는 친분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구데리안은 롬멜과 2차대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는 구데리안이 고슬라르 출신이고 롬멜은 고슬라르 예거대대 지휘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던 것이었다.[14] 그렇기 때문에 구데리안은 자신의 자서전인 『한 군인의 회상』에서 롬멜과 자신의 친분과 롬멜에 대한 칭찬을 기록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롬멜이 병으로 잠깐 지휘봉을 놓으려고 할 때 히틀러와 구데리안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데리안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던 것은 이러한 친분 때문이었다. 물론 히틀러에게 거부당했지만. 따로 사석에서 만난 기록도 남아있는데 한스 폰 루크 중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구데리안의 요청으로 롬멜과 구데리안의 만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독선적인 성격으로만 따지자면 연합국의 주코프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심했으며, 패튼은 그의 상관인 아이젠하워가 대인배였기 망정이지 보통의 상황이었으면 이미 불화로 문제가 커졌을 텐데 유독 롬멜에게만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게 문제.[15]


2.7.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다"[편집]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학살 행위에 관해 알게 된 것은 1943년 말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듬해 6월 롬멜과 대화한 그의 절친인 해군중장 프리드리히 루게 제독은 롬멜이 한 말을 일기장에 기록해놓았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 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이런 말을 한 롬멜이 유대인을 지뢰탐지에 동원하고 유대인 학살에 가담할리가 없다 슈투트가르트 시장 카를 슈트뢸린은 롬멜의 1차대전 전우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했는데, 자신의 회고록에서. “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롬멜)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종료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도 했다. 그래도 히틀러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했다.”라고 기록했다.


3. 종합적인 평가[편집]


어쨌든 그의 번뜩이는 군사적 직관이나 부하 장병들을 다루는 면모,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된 야전에서의 상황 장악 능력 등을 보면 롬멜이 훌륭한 전술 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즉, 1개 전선을 담당하는 최고 지휘관이 아닌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사실상 최고 수준이며 그를 휘어잡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이 존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기동으로 맹활약할 수있던 것도 주변 부대와의 갈등을 통제해준 사령부 덕분이었다. 만약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난 후에 서부전선 집단군 사령관이 아닌 동부전선으로 가 야전군 급 전략예비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했다면, 이런 롬멜의 역량에 대한 비판이 상당수 줄어들 수도 있었다.

위의 전술 지휘관 내용에 덧붙여서, 롬멜이 전선을 확장시킨 이유는 명성 확보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를 거쳐 오는 독일의 보급선들은 커닝엄이 이끄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었고, 추가로 물자를 보충해도 이미 동부전선이 개막해 동부전선에 줄 물자도 부족해진 독일이었기에 케셀링은 전략적 가치가 유럽보다 적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물자들을 소모하는 롬멜의 추가 물자지원을 빈번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케셀링은 크레타와 몰타 섬을 점령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활동 범위를 좁히고 싶어했다.

분명히 현재시점에서 결과만 보면 북아프리카 전선은 보급문제로 한계에 봉착해서 탄약과 연료문제로 많은 차량과 인력이 낭비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독일군이 리비아에만 남아있다고 해서 보급문제나 궁극적으로 전쟁의 해결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북아프리카에는 많은 이탈리아군이 있었고 이들을 활용하는 것은 독일군 입장에서 분명히 필요한 일이었다.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게 밀려 리비아를 빼앗기고 나면 바다 건너 유럽으로 상륙해 들어올 거라는 건 당시에도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즉, 북아프리카가 날아가면 에티오피아 점령에 막대한 인력을 갈아넣고 선전하며 신화하한 무솔리니의 정치적 위상이 무너질 것이니 이탈리아는 결사적인 방어를 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쉽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실 롬멜은 북아프리카에 막 왔을 때까지만 해도 무리하게 전선을 확대할 생각이 없었다.[16] 하지만 싸워보니 생각보다 영국군이 무능하고 이탈리아군이 쓸만하니 수에즈 운하를 틀어막을 수만 있다면 중동권에는 친독정서가 팽배한 국가들 투성이였던지라 지중해를 추축군의 내해로 만들 수 있으니 충분히 노려볼 만한 수 였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틀어막으면 영국과 영국의 지속지원을 수행하는 거대한 아시아 식민지들의 연결로를 틀어막는 셈이니, 전후에 만슈타인을 비롯해 수에즈 운하 한타를 노려 영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한 인물들도 많았다. 이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70%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그저 망상으로 롬멜을 밀어준 것이 아니라는 뜻. 현대 시점에서 봐서 애초에 전략적 상황에서 추축군은 지는게 예정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전에 전황을 확실히 뒤엎는 기적이 필요했는데 롬멜의 군단은 그 기적을 써내려가는 시도를 하다가 이런저런 제반사항의 불리함으로 인해 실패한 것이지 의미없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못 이길 전선을 애초에 열지 말았어야했다는 비판을 달리보면 독일군 전체 사단 수의 네배가 넘는 수를 보유한 영미동맹국들을 상대로 히틀러가 폴란드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에 따른 순간 모든 독일군이 실패했다는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그랬기 때문에 독일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소모전으로 고착되지않는 도박적이고 빠른 전격전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롬멜은 전선을 넓히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애초에 알고있었음에도 그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카이로에 입성하여 카이로에 쌓인 영국군 물자를 탈취하고, 유전지대인 중동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히틀러의 계획대로 중동에서 독일 남부집단군과 접선하여 지중해 함대를 격리해 격멸하고 중동의 패권을 가져가려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은 전쟁 기간동안 중동의 이라크, 이란과 터키를 추축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라크는 독일쪽으로 기울자 영국과 소련이 선제 공격했으며 터키는 독일군의 물자가 흑해로 들어갈수 있도록 협조는 했지만 중립을 그대로 유지했다. 거기에 롬멜의 기대만큼 독일의 기갑 병력들의 우위가 오래 유지되지 못했으며 졸전을 거듭하던 영국군도 지면서 경험을 쌓아 클로드 오킨렉과 버나드 몽고메리가 풍부한 보급이라는 강점을 활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 소모전을 강요하며 충분히 교환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17] 그리고 영국 항공기와 같은 지원 전력에 갈아먹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제 1차 엘 엘라마인 전투에선 약 2배 넘는 차이를 보인 연합국 전차에도 승리했다는 점에선 전장 통솔력은 가히 뛰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롬멜은 전선 내의 전장에선 누구보다 빠른 판단력과 통솔력을 보였지만, 전선을 총괄하고 물자를 담당하는 점에선 미숙한 점을 보였기에 전술 지휘관으로서 적합하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정리하자면, 명령을 받고 주어진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최고였으나 야전군~집단군 단위의 전역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 집단군 사령관[18]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러한 단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패전의 책임을 사이가 나쁜 다른 장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비판을 받아온 것.

또한 자신의 작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업무에서, 롬멜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전술적 역량에 걸맞는 수준이기를 항상 요구하였다. 일견 타당할 요구로 보이겠지만 모든 인재를 맘에 쏙 드는 천재로 채울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최상위 지휘관에 걸맞지 않는 판단이다. 손자병법에도 유능한 장수는 현명한 자 뿐 아니라 어리석은 자와 게으른 자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써 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이런 수준의 참모부, 지휘서열을 갖춘 장군은 한 명도 없었다. 가령 롬멜의 이상에 한없이 가까운 여건에 있었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본인에게 그럴 만한 역량과 해군본부 인사참모 경험이 있고, 어니스트 킹 제독으로부터 무제한의 인사권까지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선을 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고, 겉으로 자신이 총애하는지 여부에 대해 티를 내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정작 유능한 지휘관들이 롬멜의 막하에만 오면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못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실력 이상의 장성들을 자신의 고집 때문에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점은 지휘력의 부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장군의 경우 그 동안 영미권 서적과 위키에서 '프로이센 귀족의 오만함으로 롬멜에 비협조적이어서 아프리카 군단의 패배를 초래했다.'는 식으로 악역을 떠맡아 왔지만, 동부전선에서 그는 소련군 최고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를 정면으로 맞붙어서 대승리를 거둔 화성작전의 주역이었으며, 당시 서부전선에서 롬멜의 휘하에 있었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 역시 역전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 내에는 여러 성향을 가진 장교들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그들이 그에 걸맞는 역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도 상급 지휘관의 역할이자 능력인데 빌헬름 리터 폰 토마,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의 대립도 그렇고 롬멜은 이런 면에서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본인은 임무형지휘체계에서 제일 빛날수 있는 인물이지만 휘하 장교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게 해주는 임무형 지휘체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발터 모델처럼 통제형 지휘전술을 선호하면서도 통제형 지휘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 야전군을 지휘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인물로 정리할 수 있다.
[1] 서적 '전격전의 전설'에 따르자면, 사실 이 점은 구데리안도 마찬가지긴 했다.[2] 더글러스 맥아더어니스트 킹, 독일군 육해군과 헤르만 괴링 영도하의 공군 및 하인리히 힘러 영도하의 슈츠슈타펠, 조지 S. 패튼버나드 몽고메리 등 2차 대전의 주역들서부터가 적군은 고사하고 아군 타 장성 및 타 병종의 승리를 자신들의 실패로 생각했으니, 밀덕들의 이런 병림픽은 태생적인 고질병이었는지도 모른다...[3] 물론 1차 대전당시 이탈리아군을 향한 과감한 작전은 독일군 내부에서도 매우 높게 평가했다.[4] 훗날 이 숫자는 공군의 슈투카 폭격기가 아라스 전투에서 파괴한 전차 수를 더한 것임이 밝혀졌다.[5] 다만 계급에 대한 회고가 굉장히 엉터리인데 에르빈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할 적 계급은 중장-> 원수였다. 심지어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소장이었다.[6] 정확히 말하면 현대전도 마찬가지다.[7] 위에서 상술했듯 룬트슈테트와 롬멜은 정반대 성향의 군인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부터 기갑부대 배치 문제로 미친듯이 충돌했다.[8] 개전당시 육군 총참모장[9] 독일 공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10] 물론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고전이 순수히 롬멜의 잘못은 아니었다. 롬멜이 주역이었던 국방군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갈등,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이 시너지를 내었고 이후 팔레즈에서 히틀러가 후퇴를 해야할때 공격을 명하면서 7만명의 정예병이 통째로 날라갔던 것이었다.[11] 그 결과가 바로 청색작전이다. 히틀러는 토브룩을 포위한 롬멜에 흥분해 정말로 독일군이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넘어 소련 남부 바쿠 방면으로 진출해 올 것이라고 망상했고 그 결과 독일군에게 그저 지도의 한 도시에 지나지 않던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이 전멸했고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간신히 탈출했을 정도의 참패였다.[12] 물론 제지를 한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3인의 전사들을 보면 전역 초기 사령부는 롬멜이 완편되지도 않은 사단으로 공세를 펼치자 저놈이 쳐돌았나!!!라며 난리가 났고 사막에 의해 진격이 돈좌되자 롬멜의 콧대를 사막이 막아줬다라며 통쾌해한 기록이 남아있다.[13] 아예 크레타 섬은 독일군 공수부대가 투입돼서 엄청난 피를 보고나서야 점령할 수 있었으며 몰타 섬의 경우 이탈리아 공군은 딱히 의미있는 피해를 주지도 못했다. 그나마 2차 공방전부터 독일 공군이 들어가고 나서야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가 싶었는데.... 비슷한 시기 롬멜이 공세종말점의 영국군을 밀어붙이면서 루프트바페가 몰타섬에서 이집트쪽으로 옮겨갔고 그 사이 영국군은 그 동안 입은 피해를 복구해버렸다.[14] 참고로 롬멜은 본래 전간기 항공전력이 미래 전장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총통경호대로 근무할 적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 시연을 참관하고 이에 감탄, 구데리안의 '전차를 주목하라'를 탐독하였으며 이에 따라 우리가 아는 기갑론자로 바뀌었다.[15] 물론 맥아더와 주코프의 군사적 식견과 전술 구사력은 롬멜을 뛰어넘었다.[16] 롬멜의 성향과는 별개로 어쩔 수가 없었던 게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은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군도 물론 있었지만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리비아에 왜 왔는지를 생각하면 롬멜 입장에서 이탈리아군은 그닥 신뢰가 가는 집단이 아니었다.[17] 롬멜뿐만 아니라 독소전쟁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독일군이 고전한 이유가 소련군이 요새화한 도시나 방어선에 틀어박혀 소모전으로 이끌면서였다.[18] 실제 병력 규모는 분견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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