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 천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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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 천하의 시작 (2002)
英雄 | Hero

파일:영웅 천하의 시작 포스터.jpg

장르
액션, 무협
감독
장이머우
제작
빌 콩
장이머우
각본
장이머우
리펑
출연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음악
탄둔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
조명
기건민
왕립홍
편집
임안아
적여
미술
쩐조우 이
곽정소
의상/분장
와다 에미
양효해
관리나
양수동
구소매
담영군
무술
정소동
동위
제작사


배급사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이앤시네마
개봉일
파일:중국 국기.svg 2002년 10월 24일
파일:홍콩 국기.svg 2002년 12월 19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년 1월 16일
파일:미국 국기.svg 2004년 8월 27일
상영 시간
97분
109분 (재개봉)
제작비

북미 박스오피스
$53,710,019
월드 박스오피스

총 관객수
12,225명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12세이상_2021.svg 12세 이상 관람가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재개봉)

1. 개요
2. 예고편
3. 시놉시스
4. 등장인물
5. 줄거리
6. 평가
6.1. 역사적 맥락과 영화적 논의
7. OST
8. 흥행
9. 수상 및 후보
10. 기타



1. 개요[편집]


장이머우의 2002년 사극 영화. 2014년에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자, 개봉 당시 삭제됐던 10여분이 추가된 감독판으로 재개봉했다. 협객 4인방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견자단에 조연으로 장쯔이, 진도명까지 출연한 초호화 캐스팅.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형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2. 예고편[편집]








3. 시놉시스[편집]


피와 살육의 춘추전국시대,

난세의 소용돌이 속 영웅들이 움직인다!

전국 7웅이라 불렸던 막강한 일곱 국가들이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대륙. 각각의 왕국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무자비한 전쟁을 일삼고, 그 중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는 진나라 왕 영정(진도명)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여 첫 번째 황제가 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영정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으니, 전설적인 무예를 보유하고 호시탐탐 자신의 목을 노리는 세 명의 자객 은모장천(견자단)과 파검(양조위) 그리고 비설(장만옥)이 바로 그들이다. 이에 영정은 자신의 백보 안에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백보 금지령을 내리고 현상금을 내걸어 그들을 사냥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지방에서 백부장으로 녹을 받고 있는 미천한 장수 무명(이연걸)이 정체 모를 세 개의 칠기상자를 가지고 영정을 찾아와 왕궁이 술렁이기 시작하는데

-

다음영화



4. 등장인물[편집]


  • 무명(無名) - 이연걸
  • 잔검(殘劍)(고산) - 양조위[1]
  • 비설(飛雪)(유수) - 장만옥
  • 장공(長空) - 견자단[2]
  • 여월(如月) - 장쯔이
  • 영정(진시황) - 진도명


5. 줄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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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전국시대 말기.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위해 강력한 군사력으로 끊임없이 주변국들을 병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한을 산 주변국의 자객들에게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 암살을 경계한 그는 조정 대신들 외에는 자신의 100보 이내로 아무도 접근을 못하는 법을 만들었다.[3]

진왕 정을 위협할만큼 뛰어난 자객으로 은모(銀矛)[4] 장공, 잔검, 비설[5] 세 사람이 있었다. 진왕은 장공을 죽인 자는 수많은 황금과 땅, 그리고 20보 앞에서 자신을 알현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보상을, 비설이나 잔검을 죽인 자는 수많은 황금과 땅, 그리고 10보까지 다가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보상을 건다.

그러던 어느날, 백부장(원어로는 亭長) 무명이라는 자가 장공, 잔검, 비설을 처단했다며, 증거로 그들의 무기를 상자에 담아 왕에게 헌상한다. 그는 왕궁에 입궐해 왕의 열 걸음 앞까지 오게 된다. 무명 검객과 마주앉아 술 한잔을 하게 된 진왕 정은, 세 협객을 처단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무명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장공은 혈투를 벌인 끝에 실력으로 꺾었고, 연인인 비설과 잔검은 장공과의 삼각관계를 이용한 이간질로 죽였다고 말한다. 무명은 장공을 죽인 후 장공의 창을 들고 비설과 잔검을 찾아갔다. 그리고 장공이 죽기 전 '사랑하는 비설이 자기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에 비설과 장공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한 잔검은 시종 여월과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일부러 비설에게 보여준다. 이에 분노한 비설은 잔검을 살해하고, 냉정을 잃고 무명에게 덤볐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왕은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과거 잔검과 비설을 봤는데, 둘은 이간질에 속아 서로 의심하고 배신할만큼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객들이지만 진왕은 그들의 실력이나 인품은 높이 샀고, 본인도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남을 함부로 평하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무명 사이에 놓인 촛불들이 전부 자신을 향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무명이 자기를 죽이러 온 자객임을 깨닫는다. 그는 잔검과도 실력을 견줄 만한 자객인데, 원래 조나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에 진나라군에게 모든 가족을 잃고, 진나라 사람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그러나 진나라를 향한 원한을 잊지 않고 진왕을 죽이기 위해 10보 안에서 상대를 확실히 죽이는 검술, '십보일살(十步一殺)'[6]을 10년 이상 익혔다.[7] 하지만 진왕의 백보 안에 접근할 수가 없어서, 10보 밖까지 접근할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야했다. 이 때문에 자객들과 공모했다. 그들은 무기를 넘겨주고 싸우다 죽은 척을 했을 뿐 실제로는 멀쩡하게 살아있다.[8] 아무튼 여기까지는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무명이 유일하게 실수한 부분은 그가 진왕의 뛰어난 사람보는 안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

무명도 자신이 암살자인 것을 인정한다. 정체가 탄로났고 곧바로 진왕을 암살할 수도 있지만, 무명은 진왕을 죽이는 것을 주저한다. 진왕은 이유를 묻고, 그는 궁궐로 오기 전 잔검과 나눈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진실은 이렇다. 무명은 장공과 짜고 진나라의 7대 고수 앞에서 싸웠다. 그리고 십보일살로 그의 급소를 미세하게 비껴 찔렀고, 장공은 죽은 척을 했다.

쓰러뜨렸다는 증거로 장공의 창을 챙긴 무명은 비설과 잔검에게 찾아가, 십보일살을 선보이며 암살 계획을 밝혔다. 장공과의 연극을 마쳤으며, 이제 왕의 10보 앞으로 갈 수 있도록 두 사람 중 한 명이 연기를 해달라고. 비설이 무명의 제안에 응하지만, 잔검은 거절은 물론이고 오히려 무명의 암살계획을 저지하겠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비설과 잔검은 검투를 벌이고, 무명이 비설을 도와 잔검에게 부상을 입혀 자신을 막지 못하게 만든다. 잔검의 시종 여월이 분노해 무명에게 달려들지만 쉽게 제압당한다.

다음날, 진나라군 진영 앞에서 비설을 쓰러뜨리는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진왕을 알현하러 가는 무명에게 잔검은 진왕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육국이 계속 전쟁을 하면 죽어나가는 건 백성들뿐이고, 난세를 끝내려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이를 완수할 수 있는 인물은 진왕 영정 뿐이라는 것. 그 와중에 발생하는 '주변국 멸망'이라는 작은 희생은 큰 것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9] 이 때문에 3년 전 비설과 진나라 왕궁에 쳐들어갔을 때 진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포기했고[10] 조나라 장군인 아버지를 잃어 진나라에 원한이 깊은 비설은 잔검을 원망해 사이가 나빠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잔검은 자기 검을 넘겨주어 무명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렇게 진왕 영정의 10보 앞으로 오게 된 것이다.

진왕은 가장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잔검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대의를 가장 잘 이해해 줬다는 데 놀라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대의를 이해해준 이가 하나라도 있었으니 여한이 없다며, 아무런 무기도 없이 어찌 자신을 죽일 것이냐 묻는다. 이에 무명은 당신의 검을 뺏어서 죽일 것이라 답한다. 진왕은 자신의 애검을 친히 내주며 자신을 죽여도 좋다고 허락하고 뒤돌아선다. 그리고 파검이 쓴 검(劍)이라는 글자에서 최고의 경지는 다툼이 없는 평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무명은 그대로 도약하여 진왕의 목을 날리는 대신 마지막 순간 칼을 거꾸로 잡고 칼자루로 옆구리를 치기만 한다. 무명 역시 마지막에 잔검의 천하일통 태평만민 사상에 동의한 것이다.

한편 암살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비설과 잔검에게 전달된다.[11] 비설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잔검에게 당신이 무명이 진왕을 죽이지 않도록 유도했다고 따진다. 그리고 당신 마음 속에는 그 빌어먹을 천하뿐이라고 비난한다. 잔검은 비설 당신도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항변하지만 그녀는 검을 던져 결투를 청한다. 잔검은 일부러 비설의 칼을 몸으로 받아 죽는다. 비설이 왜 막지 않았냐고 묻자, 이래야 당신이 내 말을 믿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절명한 잔검. 비설은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연인을 따라간다.

다시 시점은 진나라. 진왕은 자신의 대의를 두 번째로 완전히 이해해준 무명을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어하나 신하들은 왕을 습격한 자객은 법으로 처형해야 하고, 법이 지켜져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고 간언한다. 진왕은 괴로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처형 명령을 내린다. 무명은 충분히 금군을 피해 도망칠 능력이 있었지만, 화살비를 맞고 죽는 쪽을 택한다. 진왕은 그의 시신을 거둔 후 국장을 치러주어 무명은 영웅으로서 묻힌다. 장공은 친우들을 생각해 다시는 창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진왕은 천하통일을 이룩하니,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6. 평가[편집]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답게 영상미는 정말 감탄할 정도로 탁월하다. 각각의 인물과 상황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색채의 활용이라든지 이연걸과 양조위가 정자가 있는 호수가에서 검으로 싸우는 장면은(사실 진짜 싸운 게 아니라 죽은 비설을 추모하는 2인극 검무 같은 거지만) 한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영화에 옮긴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액션의 경우는 이연걸견자단, 두 걸출한 액션 스타의 대결장면이 나왔다는 점에서 무협 매니아들의 지지를 받았다. 맹인 악사의 반주에 맞춰 무명의 검과 장공의 창이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이 장면의 액션이 너무나 훌륭해서 영상에서도 둘의 액션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도 하고 오히려 카메라워크 등으로 때운 후반의 결투신들은 맥이 빠지는 느낌마저 든다. 말이 필요없으니 직접 보자.

와호장룡과 더불어서 2000년대 초반에 대작 무협 영화의 유행을 이끌었다. 그 이전에도 해외에 영화가 자주 소개되어 유명 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비평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던 장이머우 감독이지만, 이 작품에 이르러 처음으로 대작 영화를 만들었고[12] 좋은 반응을 얻어 일련의 대작 무협 시리즈라 할 수 있는 연인, 황후화 등을 만들었다.[13] 대작만 만드는 것에 질렸는지 틈틈이 작은 영화도 만들었다. 천리주단기, 산사나무 아래서 등이 좋은 예.

아시아 영화 중 극강의 미장센과 영상미를 보여준 명화라는 평도 있고, 중국 공산당 프로파간다 영화라는 평도 있어서, 장이머우의 영화들 중에서는 유난히 호불호가 극강으로 갈리는 편이다.

현란한 영상미와 액션 및 구성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결국 진왕 정의 암살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무명의 결말은 다분히 천하의 안정을 위해 독재지만 공산당이 필요하다는 프로파간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사실 장이머우도 이 영화가 논란에 쉽싸일 것을 예상했던 듯 개봉당시 인터뷰에서 "<영웅>은 전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한 영화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14]

일단 서방의 평점 사이트인 IMDB(7.9) 로튼토마토(94%), 메타크리틱(85/100) 등등도 매우 높다. 유명평론가인 로저 이버트도 이 영화를 두고 "액션을 시적 경지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사실을 따져보면, 이 영화를 중국이 직접 나서 제작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15] 일단 이 영화가 만들어진 장쩌민 정부 (1989~2003) 시대에는 중국의 일관된 영상 정책이 없었으며, 영화인에 대한 통제도 느슨했다. 장이머우, 천카이거를 비롯한 많은 영화인들이 반체제적인 작품을 만들다가 개봉불가, 활동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16] 시진핑 시대가 되면서부터 중국에 멀티플렉스가 도입되면서 영화관객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중국 영화판도 대형 영화사 중심으로 상업영화가 대세가 되자, 중국정부는 영화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17] 블록버스터 체제홍보작[18]을 만들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영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3000만불[19][20]의 제작비 때문에 장이머우는 홍콩을 돌며 투자를 받았으며, 홍콩자본이 들어오면서 흥행보증용으로 주연에 홍콩에서 활동하던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이 캐스팅되었다. 또한 홍콩인이나 홍콩에서 활동하던 서방 스탭들이 대거 참여했다.[21] [22]

마지막으로 이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중국 이념은 중국공산당이 내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 부터 시작해서 중국 역사 내내 이어져 온 것이며, 중국식 민주주의 (삼민주의)의 창시자였던 쑨원,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원수였던 장제스도 내세우던 유서 깊은 것이다. 무명이 암살을 포기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이 현재의 중국 공산당의 입장인 것은 분명하다.


6.1. 역사적 맥락과 영화적 논의[편집]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침략과 통일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전국시대 통일 과정과 전국시대 통일 이후의 진의 통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처사에서 오는 평가라는 견해가 있다. 전국시대부터 이미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통일론이 형성되어 왔고 각 나라의 백성들이 평화에 대해 염원했으며, 통치 영역을 초월한 경제적 상호의존관계가 긴밀해 지면서 통일욕구는 더 증폭됐다. 또 전국시대 각국은 문자와 언어와 공동조상을 바탕으로 화하(華夏)라는 의식이 있었으며 변방을 만이융적으로 보는 중화의식이 이미 전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23] 즉 전국시대 사람들은 계속 서로 싸워대는 것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자신들이 같은 민족이며 통일을 해서 평화 속에서 잘 살고 싶다는 의식이 만연했기에,[24] 관점에서 본다면 나라가 진에게 통일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쟁은 더 없을 것이므로 백성 개개인 입장에서는 통일된 왕조 속에서 사는 안정된 삶을 바랄 수 있었다.[25] 따라서 진이 전국을 통일할 때 각국의 대다수 백성들이 진을 외세라고 적대하기만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위 주장에서 언급한 진의 융통성없는 법치에 대한 각국 백성들의 반발은 통일 이후 2세 황제 호해 때 극대화되어 나오는 것이므로 영화상의 통일 시기와 안 맞다. 결국 영화의 내용은 통일 당시의 역사적 의식과 내용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영화상의 전국시대 당시의 중화의식과 통일 필요성에 비해 20~21세기 최근의 중화의식은 중국 내 소수민족들을 더 포괄적으로 '한족을 위해' 통일하려 든다는 것이며, 그걸 위해 중국 정부가 이 영화의 '통일' 이라는 주제를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장이머우 감독은 <황후화>(2006)에서도 유사한 방식을 선택한다.[26]

백보 양보해서 영화가 표방하는 통일 중국이라는 주제를 긍정한다 해도 중국사를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다 본 후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유는 이렇게 거창하게 대의를 내걸고 통일한 진나라가 겨우 3대 15년 만에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정말로 하나된 중국을 만든 것은 진이 아니라 한이었으며, 나라 한번 세우면 기본값이 4-500년이었던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뒤져도 15년짜리 왕조는 절대로 성공케이스로 쳐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명(이연걸)이고 파검(양조위)이고 간에, 무익한 전쟁을 없애고 무력에 의해서라도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며 진시황을 띄워줬는데 지가 만든 나라를 겨우 3대 유지할 능력조차 없는 놈[27][28]을 과대평가해서 헛지랄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영화가 테러와의 전쟁에 열중하는 미국을 비판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평론가들은 오히려 중국이 통합, 진보라는 명분 아래에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관점도 꽤 설득력은 있는데, 그 중국 공산당이 중국 통일을 완수한 위대한 군주라며 띄워주는 진시황이 이 영화에서는 영화상에서는 비록 암살의 위협 때문에 그랬다고는 하나, 포상의 등급에 따라 자기를 몇 보 앞에서 알현할 수 있는지를 일일이 정해놓은 강박증이 심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거나, 조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문자가 서로 다르다는 점[29]을 두고 자기가 이들을 모두 정복한 다음에 이를 하나로 통일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무명이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30], 결국 진시황 자신을 죽일 뻔했으나 죽이지 않은 무명을 죽이라 명하면서도 그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 주고는 깊은 생각에 빠지는 장면들을 보면, 도저히 공산당에 대한 찬양이라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도 보면, 무명이 파검에게서 받아온 서예 작품[31]에 숨어있던 메시지가 진정한 검술의 경지는 검이 아닌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임을 알고 감탄하는 진시황에게 무명이 암살하려는 척하면서 칼자루로 그의 허리를 찌르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은 전하가 최고의 경지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도 중국 통일이라는 미명 하에 각종 잔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애초에 주인공의 이름이 '이름이 없다'는 뜻의 무명인 것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이를 그가 진시황에게 한 대사와 엮어보면, 하나의 중국이라는 담론에 매몰되어 수많은 문화와 국민들을 짓밟으려는 행위는, 거꾸로 이름모를 이들로부터 통치자의 목이 옥죄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앞 단락에서 제기한 기껏 천하를 통일해놓고 단명 왕조로 끝난 진이라는 '허무개그'가 바로 감독의 본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가령 파검이 '천하' 두 글자를 써서 무명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파검이 쓴 글자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다. 무명의 증언을 통해 들을 뿐이다. 그 이전까지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온갖 화려한 시각적 연출을 연속으로 발휘해 온 감독이, 정작 서사상 가장 중요한, 가장 관객에게 설득력을 불러일으켜야 할 이 대목에서 애매하고 허술한 '들려주기' 방식으로 넘어가 버린 것인데, 이는 즉 파검의 설득에 동요된 무명과 달리 관객은 파검에게 설득되지 않도록 고의적으로 거대한 미장센의 화폭에다 뚫어놓은 구멍이 아니냐는 이야기. 심지어 이때 파검이 글자를 쓴 곳은 모래바닥인데, 즉 그가 쓴 천하는 바람이 불면 곧 다른 모래에 덮여 사라질 버릴 허망한 것이라는 메세지로 읽을 수 있다.[32] 실제로 파검이 무명에게 써줄 글자를 습자하는 장면에서 劍자를 모래 위에 쓰고, 다시 모래를 밀어버려서 지우는 장면이 여러 차례, 화면을 꽉 채워 관객에게 보여진다. 좀더 나아가 해석하면 진시황의 천하는 '칼로 쓴 습작'에 불과하다는 의미로까지 해석 가능하다.[33]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논란이 이는 경우는 한두 번도 아니다. 일례로 위에서 언급한 황후화에 나오는 대왕은 중국 통일이라는 야심에 찬 인물이지만, 동시에 멀쩡히 살아서 재혼한 전처를 죽었다고 거짓말하거나, 이를 잘 아는 왕후를 그 아들에게 직접 독약을 먹여서 죽이라고 하고[34], 그 와중에 자기만 무시당한다고 생각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던 막내아들은 직접 허리띠로 패죽여버리는 인간 쓰레기로 묘사된다. 이는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해봐야 중국 공산당의 통일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각종 잔악한 행위를 비판했다고밖에 볼 수 있어서[35], 영화를 본 평론가들은 최소한 황후화에 대해서만큼은 친정부적인 프로파간다는 들어있지 않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사실 장이머우 감독은 의외로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의 총감독을 맡은 것 말고는 중국 공산당의 의뢰를 받고 작품을 만든 적이 없다. 올림픽이야 워낙 국제적인 대행사니,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크나큰 영광이 되니까 그냥 참여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되려, 영웅의 개봉 후에도 은근슬쩍 공산당의 실책을 까는 내용을 영화에 간간이 집어넣어서, 중국 내에서는 해외에서의 인식과는 반대로 장이머우 감독을 반정부 인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36]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보면, 단순히 친정부적인 메시지를 담았다고만 해석할 경우, 오히려 영화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짐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은 백부장 무명이 진왕을 암살하기에 앞서 진왕에게 3명의 협객을 처단한 거짓된 이야기를 고하고, 진왕이 그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거짓된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추측하며 추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무명은 진왕의 추측도 잘못된 것이라 밝히며, 마침내 진실된 이야기를 고한다. 그리고, 암살시도를 포기[37]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 가지 인상 깊은 점은 진왕 자신이 만든 법[38] 때문에 원치 않으면서도 무명에게 암살할 기회를 주고, 또 그 법[39] 때문에 자신을 이해해 준 무명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명을 죽이라고 간언하는 장면은 마치 신하들이 진왕을 협박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그 신하들은 진의 군사들이 무명의 시신을 정중히 거두며 '영웅!'이라며 외치는 장면 뒤 멀리 조명하는 장면에서 전부 사라지고 없다. 그의 말처럼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신하가 주위에 없는 외로운 진왕의 심리를 표현한 장면.


7. OST[편집]








담순(譚盾)이 작곡한 OST는 웅장하면서도 애잔하며 긴장감과 박진감이 살아 있다는 평이 많다. 영상과 보면 더 좋지만 음악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담순은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음악가이다.


8. 흥행[편집]




북미에서 박스오피스 1위까지 찍었는데 순수 외국 영화에 더빙 개봉도 아니었던 영화가 1위까지 찍은 건 영웅이 유일하다. 기사[40]


9. 수상 및 후보[편집]




10. 기타[편집]


  • 이연걸은 이 영화 전에도 영웅이라는 1995년작 영화에 나온 적 있는데, 사실 영웅이란 제목은 국내에 수입하면서 바꾼 거고 원제는 給芭芭的信(급파파적신)이다. 그러니까 원제는 영웅이 아닌 영화인데 씨네21에서 이연걸과 인터뷰하면서 영웅이란 제목의 영화는 두 번째 출연이라는 드립을 쳤다.#[41]

  • 무명은 진왕의 10보 안까지 오기 위해 그를 암살하려 한 자객 3명의 무기를 증거로 가져왔는데, 이는 형가가 진왕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명분으로 진나라에서 도망쳐 온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 독항 지방의 지도를 가져온 것을 모티브로 했다.

  • 사실과는 다른 추측을 재연하는 씬에선 파란색이나 빨간색 옷 등을 입지만 진실된 회상을 하는 씬에선 흰색 옷을 입고 있다. 이는 형가가 진나라로 떠날 때 흰색 옷을 입고 배웅을 한 데서 모티브를 받은 것.

  • 한국 자막은 영어판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 영화의 중국어 대사에서는 영정이 자신을 가리킬 때 1인칭 대명사로 과인(寡人)을 쓰는데, 한국 자막에서는 (朕)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통일 전이기 때문에 영정이 황제가 된 후 쓰는 "짐"을 쓰면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실 중국어 원어 대사는 한문투의 문장이 많아서 보통 번역자가 번역하기도 어렵기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인이 영어로 번역한 것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뜻은 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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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는 파검이라고 번역.[2] 한국에서는 장천이라고 번역.[3] 실제로 형가가 전각 위에서 진시황을 습격했을 때, 왕이 부르지 않으면 전각 위로 올라갈 수가 없어서 신하들이 발만 동동 굴렀다. 이를 모티브로 삼은 설정.[4] 은으로 된 창이라는 뜻.[5]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 당시 중역 때문에 오역을 했는지, 어감을 좋게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름을 조금씩 바꿨다. 장공을 장천, 잔검을 파검으로.[6] 모티브는 이백협객행에서 나오는 문구인 '십보살일인'으로 추정된다.[7] 순식간에 10보 안에 있는 죽간 무더기들의 실을 다 끊어 버릴 정도로 가공할 위력과 정밀도를 자랑한다.[8] 십보일살은 더 정확히 말하면 10보 안에서 원하는 위치에 '완벽하게' 검을 꽂을 수 있는 검술이다. 세 협객을 상대할 때도 급소를 미세하게 피했기 때문에 경미한 부상에 그친 것이다.[9] 잔검은 자기 검으로 모래 위에 두글자를 쓴 뒤 무명에게 이것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한다. 바로 천하(天下)[10] 참고로 이때 회상을 보면 몰래 숨어든 것도 아니고 대낮에 왕궁의 정면으로 둘이 쳐들어가 근위대를 방패랑 창째로 죄다 검으로 베어제끼면서 진왕한테까지 갔다. 그리고 잔검이 진왕과 1대1로 검투를 벌여 제압한 후, 죽이기 직전 포기하고 물러났다.[11] 비설이 자기 수하인 노인을 무명의 마부 겸 수행원으로 위장해 진나라 왕궁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암살이 실패하면 노란 천을, 성공하면 붉은 천을 휘날려 달라고 했다. 노인은 무명이 암살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비설에게 돌아와 노란 천을 휘날렸다.[12] 사실 본작도 대작이라기에는 미묘한 게 비록 대규모 군중씬이 있긴 하지만 핵심 내용은 그냥 두 명의 등장인물이 둘이 다 아는 다른 인물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 뿐이다.[13] 둘다 큰 규모의 영화고, 황후화는 무려 450억 원 이상을 쏟아붓기도 했다. 그런 만큼 의상과 색채가 뛰어난데, 그와는 별개로 작품성에 대해서는 호평보다는 악평이 훨씬 많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인생>, <홍등> 등 예전 작품에서 보여줬던 세세함이 공산당의 지원 아래 큰 규모의 영화를 찍으면서 잃어버리고 있다는 평이 대세. 2011년 작인 <진링의 13소녀>, 2016년작 그레이트 월도 그의 영상미는 여전하지만, 작품성과 작품 속 사상에 많은 악평이 쏟아졌다.[14] 일부 영화팬이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프로파간다 영화이다"라는 주장은 논리가 희박하다. 애당초 제작진은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밝힌 적도 없거니와, 영화적 각색이 곧 프로파간다라는 이야기는 견강부회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영화 플롯을 실제와는 영 다르게 각색한 글래디에이터도 프로파간다 영화여야 한다.[15] 사실 아주 정부 지원을 안받은건 아니고, 엑스트라 지원은 받았다. 이 영화의 진나라 병사들은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분장하여 동원된 것이다. 이건 중국 군인의 인건비가 워낙 싸서 중국 사극 제작 현장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사극 지원은 꼭 정치성이 없더라도 돈만 주면 해준 것이며, 1994년에 제작된 84부작 삼국지도 이런 싼 인건비로 수만명의 인민해방군 소속 엑스트라를 동원할 수 있었다.[16] 장이머우는 <인생> 때문에 주연 공리갈우와 함께 5년 활동금지에 처해질 뻔했다. 서방에서 상을 타자 국제여론을 의식한 중국가 이런 조치를 해제해주지만, 서방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배우나 감독들은 가차없이 활동금지령에 처해져 몇 년간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다.[17] 여기서 말하는 통제란 코렁탕을 먹이는게 아니라 영화 제작에 관련되어 여러 규제로 압박을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영화는 아예 투자를 막아서 제작 못하게 하고, 제작되어도 개봉 허가를 내주지 않거나 혹은 몇년 후에 개봉허가를 내줘서 영화인들에게 무형의 압박을 넣는다. 이에 반해 체제홍보적인 영화에 참여하면 대출이나 자금지원등 여러가지로 편의를 봐준다. 이렇게 되면, 영화인들은 알아서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장이머우는 2017년 체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원 세컨드> 를 제작했는데, 해외영화제 출품 취소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2년간 개봉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9년 "나와 나의 고향"이라는 정부 홍보 옴니버스 영화에 장이머우가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자 2년만에 개봉을 허가해주었다. (당연히 이런 영화의 제작이나 프로듀싱은 공산당이 직접한 개입한 것이기 때문에 장이머우가 직접 제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이머우는 <원 세컨드>가 창고영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름을 빌려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 공산당은 예전에 비해서는 덜 폭력적이지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중국영화계를 통제하고 있다.[18] 예를 들어 나와 나의 조국, 마이 워, 금강천(영화) 등등[19] 그중 1/3인 천만불이 이연걸의 개런티였다.[20] 당시 한국영화에서 가장 제작비를 많이 투입했다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약 110억원이었는데, 이것의 약 4배 제작비를 들인 것이다.[21] 대표적으로 첨밀밀,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의 유명 홍콩영화에 참여한 유명 촬영 감독인 호주인 크리스토퍼 도일이 있다.[22]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장이머우가 2000년 제작된 와호장룡의 미국 대흥행에 영감을 받고 제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와호장룡은 사실 중국에서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다) 바꿔 말하면 이 영화는 중국공산당의 기획이 아니라 장이머우가 해외흥행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그리하여 제작된지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개봉된 중국영화로는 가장 큰 흥행기록을 가지고 있다.[23] 출처: 신채식. 동양사개론 개정판. 삼영사. 2017년 3판 125~6쪽 참고[24] 가령 《맹자》 에서 맹자양양왕의 대화를 보면, 왕이 "천하가 어떻게 정해지겠소(天下惡呼定)?"이라고 묻자, 맹자가 "하나로 정해지겠지요(定于一)"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 맹자가 살았던 시대부터 이미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에 있다는 의식은 당시 지식인들의 상식이었다. 춘추 말기를 살았던 공자는 주 천자를 중추로 하는 춘추전국 이전의 봉건제로 회귀를 소망했지만, 전국시대 한복판을 산 맹자에 이르면 봉건제도를 이상적 천하체제로 보는 유가 철학자조차도 기존 질서의 복귀나 열국의 공존 같은 건 가망이 없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25] 참고로 이미 당시 진은 당시 중국 영토의 3분의 1, 국부의 2분의 1을 장악하고 갈수록 나머지 6국과 국력 차를 벌이고 있었다.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17년 18쇄 70쪽 참고) 이런 상황에서 각 6국의 백성들이 진을 이기고 각국이 번영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26] <영웅>의 진왕과 <황후화>의 당 황제 캐릭터는 <삼국지 : 명장 관우>(맥조휘, 2011), <조조: 황제의 반란>(조림산,2012)의 조조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유사하다.[27] 하지만, 진시황이 후대에도 호평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고평가를 받은 것을 보면, 그가 과대평가받았다는 주장 확실히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진시황은 내치를 다지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긴 했고, 실제로 성과도 꽤 있었다. 일례로 그를 까는 데 자주 인용되는 만리장성의 축조 건에 대해서는 후대의 왕조들도 수시로 성벽을 보수해서 사용했다는 점과, 이 성벽 자체의 존재로 인해 흉노나, 고구려, 거란 등의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막거나 지연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진시황 본인이 후대의 재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다기엔 그 아들 호해가 다 말아먹은게 문제고, 진시황 사후에 나타난 한고제한나라를 세워서 천하통일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그가 묻혀버린 것이 크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중국판이자 수문제의 대선배인 셈이다. 실제로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법이 너무 엄격했던 것은 그랬다쳐도, 진시황이 자식농사만 잘했어도 진나라가 단명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28] 문제는 자식농사 잘 짓는 것도 군주의 덕목 중 하나라는 것이다. 유능하고 인성도 좋은 후계자를 키워 내고 그 후계자가 권좌를 물려받고 자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안배하거나 그렇게 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도 엄연히 군주가 해야 할 역할이다. 태종이 외척이나 공신을 숙청하는 면모가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숙청이 세종대왕이라는 후계자가 본인이 뜻하는 정치를 마음껏 할 수 있게 안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높게 평가받는 것처럼 말이다. 무능하고 인성도 나쁜 양녕대군에게 적장자라고 권좌를 물려 주고 외척이나 권신이 폭주하지 못하게 안배를 해 놓지 않았다면 조선은 일찍 망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진시황 본인이 무능하다는 주장은 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지만 그가 유능하다고 해서 유능한 자에게 권좌를 물려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되도록 장치를 마련해 놓지도 못한 점까지 옹호해 주는 것은 진시황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9] 춘추전국시대 동안에 중국 전체가 수많은 나라로 나뉘어 난립하면서, 여러 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는 식으로 중화권에 편입했기에 사용되는 언어도 서로 다르고, 따라서 그 언어에서만 쓰이는 문자가 마구마구 한자 체계에 편입되었으니, 나라별로 문자가 다른 건 당연하다. 심지어 이미 한자 체계를 통일화한 현대 중국에서도 특정 방언에서만 쓰이는 문자들이 잊을 만하면 속속들이 발굴되어, 중국 공산당 측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30] 특히 무명양조위의 글자를 받아가려고 조나라에 있는 서당을 찾아갔을 때, 진나라의 군대가 서당을 공격하려고 하자, 비설과 함께 날아오는 화살들을 무술을 이용해 막아내기도 했다. 심지어 이 서당의 훈장이 "아무리 진나라의 군대가 강하다고 한들, 조나라의 문자를 말살할 수는 없다!"고 외치고는 제자들에게 조나라 문자의 정수를 배우게 될 것이라며 강의를 시작하고, 그 제자들은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꿋꿋하게 서예에 임하는 장면이 나온다.[31] 조나라 문자로 자를 쓴 것이다.[32] 애초에 파검이 원하던 것은 천하통일 자체가 아니다. 그의 연인인 비설이 무명과 함께 서당을 공격하는 진나라 군대의 화살을 목숨을 걸고 막아내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비록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위해 천하통일의 대의는 받아들이겠으나, 이를 핑계로 문화를 말살하는 행위를 하지말 것을 촉구하는 게 그의 진의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 진시황중국을 통일한 뒤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분서갱유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33] 중국에서 후한 때까지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탓에, 서예를 할 때 모래에다 먼저 써놓고서 죽간이나 명주천에다 이를 보고 베끼는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감독이 이를 중요한 장면의 소재로 사용한 이상 감독의 의도와 무관한 단순 고증으로만 바라볼 이유는 없다. 진나라가 검은색을 숭상한 것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지만 얼마든지 해석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처럼.[34] 당연히 아들은 이를 거부하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반란까지 일으켰고, 이 반란이 실패하자 그대로 자결했다.[35] 실제로 그런 의도로 이렇게 연출했냐는 논란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렇다.[36] 때문에 몇몇 작품은 해외 영화제로의 출품이 금지된 것도 있다.[37] 김규삼은 역전시네마에서 이때 진왕이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어색한 장면이었다고 평했다. 불로초 찾는데 혈안이 되고 수만 명을 동원해 거대한 왕릉을 조성할 정도로 만년까지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진시황인데 겨우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순순히 목숨을 내놓을 리가 없잖아?라고. 굳이 끼워맞춘다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서복을 바다로 보내고 진시황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는 것은 진시황 본인이 맛이 간 후대의 일이니 영화의 작중 시간대와는 별 상관없기는 하지만.[38] 대신 외에는 아무도 100보 내로 들어올 수 없지만, 자객 셋을 무찌른 자에게는 포상으로 10보 앞에서 술을 하사한다.[39] 왕을 암살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40] 최초 1위를 찍은 뮤츠의 역습은 더빙 개봉이었다.[41] 단, 급파파적신의 영어제목은 my father is a hero 이기 때문에 그냥 드립만으로 보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