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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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의흥(義興), 호는 목촌(牧邨)이다.
2. 생애[편집]
1927년 2월 7일 경상남도 부산부 항정4정목(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4가)에서 아버지 예성옥(芮成玉)과 어머니 서흥 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1] 를 취득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선거 기탁금 등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하였다. 이후 친 김종필계에 속하였다. 그 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영도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9년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킨 4.8 항명으로 의원총회에서 양순직,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의원과 함께 제명되었다. 이어서 3선 개헌 당시에도 박종태, 양순직, 정구영 등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복당하여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상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중구-영도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에서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한병채, 오세응, 박찬, 손주항, 이상민, 김현규 등과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이 무렵 영도에서 국내 최초 민영도서관인 영도도서관을 운영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에 의하여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고문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1984년부터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을 대표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힘썼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후보단일화를 끝까지 주장했으나, 이것이 무산되자 함께 활동하던 재야 세력의 일부를 모아서 조순형, 유인태와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직할시 영도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김정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20년 7월 22일 새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3. 그 외[편집]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모두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박정희, 삼김 모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기에 말년에 그의 인터뷰들을 보면 박정희와 3김을 함께 평가내린 내용이 많다.#
박정희에 대해선 독재는 잘못되었으나 박정희는 항상 나라를 생각한 애국자였으며 큰일을 이뤄냈고 김종필에 대해선 말년에 아쉽게 되었지만 능력있고 비전도 있었으며 3김중 가장 낫다고 평가하였다.
대조적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해선 사욕을 버리지 못하였고 지역감정과 분열을 초래하였다고 혹평을 하였다. 애초에 한겨례민주당이 끝까지 후보단일화, 야권통합을 주장하다가 결국 양김이 분열된채로 대선과 총선을 치루게 되자, 어느쪽도 참여할 수 없다면서 만든 당이었다. 양김후보단일화 불발에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은 음식평론으로도 유명한 예종석 한양대 교수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9대 회장이며 2017년 2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캠프 홍보본부장으로 영입되었다. 차남은 예종홍 국민대 교수이며 삼남 예종영 고려대 교수는 남재희의 사위다. 남재희의 둘째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 남재희는 여당 의원이었고 예춘호는 정치활동이 금지된 야당 인사여서 화제가 됐다.
4. 선거 이력[편집]
5. 소속 정당[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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