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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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장과 즉위
3. 폭정과 선정 사이
4. 대외 정책
5. 아내의 죽음과 차르의 폭주
6. 광기 속의 최후



1. 개요[편집]


이반 4세의 생애에 대한 다룬 문서이다.


2. 성장과 즉위[편집]


이반 4세의 아버지인 바실리 3세는 첫 아내 살로메이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녀원에 보낸 뒤 옐레나 글린스카야와 재혼했다. 그러나 정교회 대주교는 바실리의 재혼을 죄악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악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대의 나라가 공포와 눈물로 얼룩지리라. 피가 강처럼 흐르고 그대의 도시는 불길에 휩싸이리라."고 저주했다. 이 저주는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풍문으로는 하늘이 갈라지고 번개가 크렘린을 덮치는 가운데 1530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의 장남으로 이반 4세가 태어나자 나라에 흉흉한 소문들이 퍼졌다고 한다.

1533년, 불과 3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바실리 3세가 세상을 떠나자 차르로 즉위했다. 몇 년 동안은 어머니 옐레나가 일부 보야르[1]들의 협력을 받아 섭정을 하였다.

옐레나는 1510년생으로 군주의 어머니로서 섭정이 되었을 때 23살에 불과했다.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데다 성품이 거만하고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집권하자마자 바실리 3세의 동생인 드미트로프의 유리(Yury of Dmitrov) 및 스타리트샤의 안드레이(Andrey of Staritsa)의 도전을 받았는데,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1534년과 1537년에 투옥시킴으로써 권력 투쟁에서 우위에 서는 듯 했다. 이후 옐레나가 선택할 수 있는 제일 이상적인 길은 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믿을 수 있는 보야르들을 포섭함으로써 아들 이반을 보호할 세력을 만드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력 보야르들은 러시아에 강력한 통치자가 사라진 틈을 타 권력을 되찾으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옐레나에겐 그런 수완이 없었다. 그녀를 도와준 숙부 글린스키 공이 사망한 후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 인물은 젊고 잘생긴 보야르인 텔렙네프 오볼렌스키였다. 별 정치적인 기반이나 수완이 없는 그를 오로지 자신의 정부라는 이유로 요직에 앉힌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반대파가 많은 옐레나에게 더 정적을 늘릴 구실을 제공했다. 결국 1538년 옐레나는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2]

옐레나는 5년에 걸친 섭정 기간 동안 이반 4세를 지킬 권력 기반을 다지지 못했고, 슈이스키와 벨스키 등 유력 보야르 가문들을 찍어 누르지도 않았다. 태후가 태만하게 행동한 대가는 어린 아들들이 치러야 했다. 7살의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이반 4세는 청각장애인인 동생 유리[3]와 함께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두 형제의 유년 시절은 슈이스키와 벨스키 가문 보야르들의 권력 투쟁 가운데서 힘겹게 생존하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이반 4세는 10살 때 여러 모로 총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글을 읽는 방법을 일찍 깨우쳤으며 교회의 문헌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력 보야르들은 이반 4세의 권력을 제한할 의도로 그에게서 친족들과 친구들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는데, 이 과정을 포함하여 이반 4세의 내면에는 이런 보야르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보야르들은 자신들에게 전제정권을 휘두른 조부 이반 3세에게 받았던 대한 반감과 복수로 어린 이반 4세를 모질게 학대하고 수도 없이 갈궜는데 이게 얼마나 유명한지 지금도 기록되거나 전해지는 여러 일화들이 남을 정도였다. 해가 뜨기도 전에 몇명의 귀족들이 이반의 침실로 달려들어와서 소리를 질러대며 격렬한 논쟁을 벌여 어린 이반이 쉬지 못하게 심술을 부렸으며 귀족들은 이반에게 아무렇게나 넝마주이나 누더기 옷을 입히고는 먹을 것조차 주지 않았다.[4] 이처럼 귀족들한테 당한 심한 갈굼으로 하루하루 고생했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었고,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에 대한 기억은 안드레이 쿠릅스키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편지 내용 일부에서는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더러운 신발을 나의 침대 위에 올려놓았는데 정말 참기가 힘들다."라고 적었던 내용도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때의 무시무시했던 경험들이 불안정한 이반의 마음과 정신상태를 만들었다고 한다.[5]

아래 항목에서 더 후술을 하겠지만 나이먹은 후에 자신의 아들마저 때려죽일 정도로 광기로 치닫는 이반 4세의 정신적 배경에는 이런 어두운 유청년기도 작용하지만, 젊은 시절에 권력에서 배제된 채 한량질을 하며 얻은 매독이라는 치명적인 병도 작용했다. 실제로 소련 시절 그에 대한 부검을 위해 크렘린에 안장된 이반의 석관에서 유해를 발굴해 연구한 결과 정말로 뼈에서 중증 매독 환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독균이 침투한 흔적들이 나왔다. 매독의 증상은 매우 다양해 다른 병들과 헷갈리기가 쉬워 '흉내내기병'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지만 감염자의 뇌가 병으로 손상될 경우 진행부전마비 증상이 오기도 한다. 이런 상태의 환자는 통제하기 힘든 미치광이로 변하며 때때로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것 같은 괴이하고 엄청난 발상을 하기도 한다. 진행부전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대부분 5년 내에 사망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 이상 살아남을 수도 있으며 완전히 미치거나 무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때때로 그럭저럭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때도 있다. 이런 환자들은 엉뚱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망치거나 주변 사람들을 공포스럽게 만들곤 한다. 또는 일부 학자들은 그의 비정상적인 인격이 당시 매독 치료제로 쓰이던 수은 섭취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수은 섭취에 병적인 집착을 보여 그의 방에 있는 가마솥에 수은을 끓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던 소련 시절에 그의 유해 부검을 진행했을 때에도 수은 중독이 사실로 드러났다.[6]

17세에는 재색을 겸비한 귀족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이반은 진정으로 아나스타샤를 사랑했던 듯한데, 그녀 앞에서는 그 악독한 이반 4세가 순한 양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아내의 영향 때문인지 이반은 영웅에 필적할만한 놀라운 업적을 후세에 남기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안나, 마리, 드미트리, 이반, 유도시아, 표도르라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이반과 표도르만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이 결혼으로 권력에 가까워진 로마노프 가문은 인척 관계를 명분으로 혼란 시대 이후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상술했듯 보야르들에게 학대를 받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매우 총명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주교 마카리와 그 일파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 독서에 열중하게 된 덕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주변 사람들이 괄목할 정도로 매우 지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글 쓰기에 관심이 많아 실제로 많은 글을 썼고, 고전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다. 이반 뇌제의 도서관은 당시 유럽에서도 큰 규모였고 진귀한 고대 그리스, 로마와 비잔틴의 서적들도 보관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왕권신수설이나 왕권 강화와 관련된 자료를 즐겨 읽어 이른 나이부터 강력한 군주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도덕성은 그의 지성을 따라가지 못했고, 대주교 마카리를 비롯한 신실한 성직자들은 그의 비틀린 심성을 교화하는데에는 실패했다. 최종적으로 성직자들이 만들어준 이반 뇌제의 지적 능력은 하필이면 끔찍한 유년기에 기반한 무자비, 의심, 복수심과 결합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3. 폭정과 선정 사이[편집]


그는 함께 전투에 나가거나 여러 위치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귀족과 신하는 물론 낯선 사람도 친근하게 대했다. 이런 방식으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때로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 국가의 군주 중 그처럼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은 이는 없을 것이다.

16세기 영국 대사의 기록


1550년에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회의[7]를 소집하였다. 귀족성직자, 신흥 사족, 상인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이 회의는 오늘날의 국회와 같지는 않았지만, 이반 4세는 이 회의에서 비판적인 의견들을 귀담아 듣고 몇가지 잘못을 시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그는 "내가 이전에 저지른 사악한 행동들은 내가 고아였던 탓에 측근의 귀족들에게 나쁜 짓을 배운 탓이니 전부 잊어 주시오. 앞으로 부강한 러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소."라고 말하며 앞으로 더 존경받는 통치자가 되겠노라 약속했다고 전한다.

젬스키 소보르는 소집된 해에 법전인《수데브니크》를 편찬했고 농민들의 권리나 뇌물 처벌에 대한 규정들을 정했으며 이후에 젬스키 소보르는 황제 선출이나 전쟁 승인 등, 중요한 일들도 맡았다.[8]

중앙집권체제도 강화되어 중앙정부의 관청인 프리카스들을 만들어 외교, 군사, 인사, 토지, 차르에 대한 탄원을 비롯한 각종 업무들을 맡도록 했고 중앙정부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점점 부서들이 늘어났다. 외무성에는 유능한 외교관인 비스코바티가 활약했고 차르에 대한 탄원을 맡은 탄원소에는 차르의 최측근 관료인 아다셰프가 책임자였다.

1551년에는 대주교 마카리가 주도하는 스토글라프 종교 회의가 열려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통일된 교회 의식을 정했으며 성직자들의 윤리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9] 그리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종교 회의에서는 각 도시에 교회와 수도원 부설 학교들을 세울 것을 결의했고 세속의 교사들도 활동하여 문맹률을 낮추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1553년 이반 4세는 인쇄소를 건설하였고 그 책임자인 이반 표도로프가 1564년에 사도행전을 찍어냈다. 1565년에는 문자학습용 책인《기도서》가 나왔다.[10]

1556년에는 지방 행정 제도를 개혁해서 지방 행정 단위를 개편하고 지방관인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를 폐지해 지방민들이 지사들과 각종 기관의 장들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여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한편, 지사들이 더 이상 지역민들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고 중앙정부로부터 받게 하고 재판권과 징세권을 새로 만든 재판소의 소장에게 주어 지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많은 도시들과 요새들이 세워졌으며 지방 도시에서는 모스크바의 도시 양식을 따라하기도 했다.[11]

군제 개혁도 이루어져서 신분에 상관없이 군사 부분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을 고위직에 임명했고 최초의 상비군스트렐치를 창설했다. 스트렐치는 국가로부터 현금을 보수로 받았고 무기와 제복을 비롯한 물자도 받았다. 1556년에는 복무 규정을 제정하여 군역에 대한 의무를 정하고 대를 이어 작위를 세습하는 세습 지주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토지를 받는 봉토 지주의 권리를 동등하게 정하여 황제권을 강화했다. 또 이 규정으로 전국에서 농민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고 군복무를 하지 않는 이들에겐 체형을 가하고 봉토를 박탈할 수 있도록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그가 유일하게 믿는 마카리 대주교에게 내정을 맡기고 자신은 외부에 집중했다. 제일 먼저 공격했던 대상은 당시 러시아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카잔 칸국이었다. 카잔 칸국은 아스트라한 칸국과 함께 늘 러시아의 동부와 남부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해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팔던 국가였고 카잔에만 10만에 달하는 러시아인 포로들이 잡혀있을 정도였다. 카잔 정벌은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과 유사했는데, 성직자들은 카잔과의 전쟁을 이슬람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황제를 지지했고 귀족들은 카잔을 정벌하고 난 뒤에 그 지역 토지들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전쟁에 동의했다. 상인들은 카잔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동방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평민들은 카잔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황제의 정벌을 지지했다. 이렇게 각 계층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카잔 정벌전이 일어났지만 십자군 원정과 달리 1547년 ~ 1550년 사이에 있었던 두 번의 원정은 준비가 미흡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552년에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여 도시를 포위해 150대의 대포로 포격을 가했고 중간에 조그만 구멍을 낸 나무 방벽에 바퀴를 달아 안전하게 움직이면서 총을 쏠 수 있도록 한 굴라이 고로드를 만들어 총알을 퍼부었다. 하지만 카잔은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반 비로드코프의 지휘 아래에 공병대가 동원되어 카잔의 성벽을 뚫기 위해 성벽 밑에 폭약을 설치해 터뜨리는 작업을 실시했고 폭약이 터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자 러시아 군대가 이쪽으로 돌격하여 카잔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카잔 정벌 이후에 황제는 아스트라한 칸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1554년에는 아스트라한 칸들의 통치권을 크게 제한했고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을 완전히 점령했다. 아스트라한이 러시아에 넘어가자 카스피 해 북부 지역의 노가이 칸국도 모스크바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두 칸국을 제압함으로서 러시아는 볼가강 전역은 물론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넓혔고 동부와 남부에서 안전을 확보했다.[12]

또 많은 민족들을 러시아의 국민으로 편입해 세금을 거두고 그 인력을 활용했다. 특히 타타르 병사들이란 특수 계층을 만들어 카잔의 귀족층이 중심이 된 타타르인, 바시키르인들을 우대했으며 봉토를 지급하는 대가로 군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이 타타르 병사들 제도는 제국 정부가 소수민족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으로 실시한 것이었고 제국 입장에선 다행스럽게 예상이 적중하여 타타르 병사들은 제국에 충성했다.[13] 러시아에 편입된 민족들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볼가 강을 따라 활발하게 무역하는 사람들이었고 주로 이슬람교도들이었다.[14] 이후로 카잔과 아스트라한은 러시아의 중요 도시가 되었으며 러시아로부터 오는 이주민들과 포로 출신 러시아인들이 현지인들과 함께 공존하며 살았다. 카잔 칸국의 피지배층에 해당하던 마리인, 추바시인, 모르드바인들 역시 신민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이반 4세는 당시로선 꽤나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해 학자와 기술자를 초빙하려 했다. 백성들은 이반 4세가 타타르족들에 연승을 거두는 것에 크게 고무되어 이반을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고 불렀다.

특히 이반 4세는 타타르 칸국들과 합쳐진 기념으로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건축물인 성 바실리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이 성당은 이반 4세가 1552년에 러시아가 드디어 카잔 칸국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됨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1560년에 완성된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정식 이름은 포크로프스키 성당인데, 1588년에 증축한 부제실에 당시 열렬한 숭배를 받고 있던 성 바실리를 모셨기 때문에 나중에는 바실리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더 친숙해지게 되었다.

루머에 의하면 이반 4세는 완공된 성당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이 성당을 지은 장인이 다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두 눈을 뽑아버렸다 카더라. 다른 좀 더 디테일한 루머에 의하면 영국엘리자베스 1세가 이 성당을 보고 "영국에도 아름다운 성당 좀 짓게 기술자 좀 보내주시죠?"라고 요청했는데, 이반 4세는 영국에도 이런 간지나는 건축물이 올라갈 것을 아니꼽게 여겨 장인의 눈을 뽑았다고 한다.[15]

볼가 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로 이반 4세는 시베리아 지역도 정복하려 했고, 유명한 카자크 탐험가 예르마크와 그를 후원한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다. 1581년부터 시작한 예르마크의 원정은 시비르 칸국의 수도인 카실리크를 정복하고 인 쿠춤을 몰아내는 등, 성공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은 줄어들었고 1585년 여름, 카실리크에 주둔했던 예르마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쿠춤에게 포위당했다. 다행히 공격을 물리치고 곧 도시에서 빠져나왔지만 시비르 칸국의 군대가 기습을 가해 예르마크는 이르티시 강을 도하하던 도중 익사했고[16] 그의 군대는 항복했다.[17]

그러나 예르마크의 원정으로 시비르 칸국은 약체화되었으며 시베리아의 영토를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보리스 고두노프는 다시 한 번 대규모 군대를 보내 1598년에 쿠춤을 공격했고, 이 공세를 막지 못 했던 쿠춤은 패퇴하여 얼마 안 가 죽었다.

서부 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는 먼저 개척자들과 장인들을 보내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튜멘이나 토볼스크같은 도시들이 이 시기에 세워진 곳들이다. 도시들이 세워지자, 시베리아 지역으로 카자크들과 상인, 군인, 탈주자들이 이주해갔고 이 넓고 비옥한 지역은 점점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밀과 소금, 철을 주고 모피와 어육으로 교환하는 모피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고[18] 시베리아의 광대한 토지를 개발하는 등 많은 이득을 보았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로 시베리아인들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에 더 이상 이웃들로부터 약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19] 러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농사 기술과 건축술을 비롯한 각종 지식들을 전수받고 철기와[20] 농기구들도 얻는 등, 시베리아 민족들의 경제와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 시베리아에는 통일된 국가가 없고 씨족 단위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에 동부 시베리아 정복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러시아인들과 시베리아인들은 서로 통혼하고 공존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에 지방 통치 조직을 이식하고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시베리아인들로부터 걷는 모피세 야사크는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시베리아인들이 불 같은 물이라고 부른 보드카가 러시아로부터 유입되면서 음주 문제도 생겨났다. 또한 러시아인들과의 통혼과 정부에서 강요하는 기독교 개종은 러시아화를 의미했다. 백인의 일부 부하들은 비싼 모피를 헐값에 사들이려 했고 시베리아의 러시아 관리들, 성직자들은 중앙아시아유럽 러시아의 관리, 성직자들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 했다. 이주민들이 시베리아인들의 토지를 차지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분쟁도 생겼다.

러시아 정부는 식민지화를 강화하는 한편, 이동 생활을 하는 민족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하려 했고 부역도 강요했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많은 시베리아인들의 정체성에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정부에 저항했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많은 민족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나는 이주민들과 시베리아에서 힘이 강해지는 러시아 정부를 피해 그들이 없는 곳으로 이주해야 했고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에 미하일 스페란스키의 제안으로 제정된 법에 따라 원주민들을 세 부류[21]으로 분류하고 국가 농민과 동등한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민족 문화와 전통은 보존하는 식으로 하여 이 문제들은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 법은 그 당시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서 가장 진보적인 법이었으나 러시아로의 동화와 정착민화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한계도 있었고 일부 민족들이 러시아 정부와 화해한 것은 이 법이 제정되고도 수십 년이 지나서였다.


4. 대외 정책[편집]


1554년, 영국인 탐험가 리처드 챈슬러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챈슬러를 통해서 영국과 접촉하게 된 이반 4세는 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적극적인 교역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 때 영국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고 있던 시대였는데, 이반 4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이반 4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독신임을 알고 은근히 구혼의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잘 알지 못하는 이반 4세와 결혼할 리가 만무했다.[22] 그래서 그는 대신 영국의 귀족 여성과의 혼인을 청했지만, 이 또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3] 그래도 통상 부분에선 큰 성과를 거두어, 영국 해군은 모두 러시아로프를 사용할 정도였다.

이반 4세는 서유럽과 더 교류를 활성화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에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반 4세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랫동안 앙숙의 관계에 있던 폴란드, 스웨덴,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리투아니아와 후에 북방전쟁의 하나로 불리우는 리보니아 전쟁이라 불리는 25년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패배하고 만다.[24] 리보니아 전쟁이 장기화되고 영국이 러시아와의 교류를 중단하면서 점점 위기를 맞게 된 이반 4세는 그간 잠들어 있던 광기가 슬슬 살아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5. 아내의 죽음과 차르의 폭주[편집]


"아냐스타샤를 데려간 하느님은 잔인하고 무분별했다. 이제부턴 나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결국 1560년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가 사망하면서 이 광기는 폭발하고 만다. 덧붙여 이반은 총 7번 결혼했는데, 이 첫 번째 결혼 생활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멀쩡했던 결혼 생활이었다고 하며 아나스타샤를 무척 각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이후 2번째, 6번째 아내에게서 각각 바실리, 드미트리[25]라는 아들들을 낳기도 했지만 둘 다 어린 나이에 죽었다. 몇몇 결혼 중엔 헨리 8세처럼 금방 이혼한 적도 있다고 한다.[26] 이반 4세는 자신의 아내를 귀족들이 독살했다고 믿고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27] 그는 "아나스타샤를 데려간 하느님은 잔인하고 무분별했다. 이제부터 나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신처럼 여겨 모든 도덕률에서 면제되었다고 생각하였고, 하느님이 그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자신도 하느님에게 해를 끼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예전보다 더 난폭한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를 이반 4세의 편집증적 광기가 스스로를 아내가 독살당했다고 믿게끔 만들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소련 시대에 아나스타샤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묘에 평균치보다 훨씬 높은 수은 함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골때리는 주장이 있는데,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이반 4세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반 4세는 수은에 중독되어서 수은을 마시고 수은을 아궁이에서 끓이는 등의 행동을 했는데, 이러한 이반 4세의 행동 때문에 아니스타샤도 점점 수은에 중독되면서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1564년, 이반 4세가 느닷없이 모스크바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밤중에 몰래 자신의 친위부대만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빠져나와 모스크바에서 95km 떨어진 알렉산드로프라는 작은 마을에 틀어박혔다. 한달 후,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부주교 앞에 두 편의 편지를 보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반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맹비난한 데에는 자신의 측근들인 신흥 사족들에게 줄 봉토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당황한 모스크바 시민들과 귀족들이 이반 4세에게 귀환을 간청하자 그는 못 이기는 척 두 가지 조건을 내걸며 귀환했다. 하나는 반역자 처분은 자신이 알아서 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프리츠니나라 불리는 황제 직할 영지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오프리츠니나는 이반 4세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인 오프리치니크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몰수한 토지들로서 모스크바의 몇 개 구에서 시작해 종래에는 러시아 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공언한 대로 반역자 처분을 시작했는데,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오프리츠니크들을 동원해 전 러시아를 휩쓸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서 교회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많은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대상은 귀족들이 많았지만, 때때로 도시마저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예로 노브고로드 시가 리투아니아와 내통했다고 의심한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들을 보내 노브고로드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했다.[28]

이 시기 이반 4세의 어이없는 행동으로 유명한 양위 소동이 있다. 어느날 이반 4세는 카심 칸 시메온 벡-불라토비치를 불러 러시아차르라는 칭호를 바치고선, 자신은 모스크바 공(公)으로 강등한 후 시메온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황당한 소동이 있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를 장난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반 4세가 이 양위 소동을 통해 러시아 내의 타타르인 세력의 복종을 얻을 명분을 쌓았다고 보기도 한다.

오프리치니크들의 피바람은 결국 귀족 세력 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과 시민들에게까지 미쳐 결국 그들은 이반 4세의 학살에서 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러시아 영토의 확장과 시베리아 개척을 불렀다. 이반 4세는 8년 후에 전제 권력이 완벽하게 확보되자 모스크바로 돌아와 오프리츠니크를 폐지했지만, 이미 나라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뒤였다. 결국 킵차크 칸국의 계승 제국이라고 선포하고 다니던 크림 칸국이 1571년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침략해 쳐들어왔을 때까지도 러시아군은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지만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크림 칸국군은 러시아의 도시와 마을들까지 모조리 다 함락하며 러시아 시민들을 약탈하거나 학살하고 많은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잡아가서 오스만에 팔아버렸다.[29] 이 패배와 약탈에 이반 4세는 큰 충격을 받아 실의에 빠지고 만다.


6. 광기 속의 최후[편집]


말년에 이른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 출신의 측근들과 측근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프리치니크의 대표격인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사위보리스 고두노프조카인 보그단 벨스키였다. 이들은 단순히 이반 4세와 체스를 함께 두거나 그의 식사를 점검하는 말직에 불구하였지만 이반 4세의 돌출된 행동을 제어하면서도 그가 언제 자신들을 숙청할지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잔인한 폭정을 여러 번 일으킨 이반 4세는 첫 아내 아나스타샤와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이반은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반 4세는 일찌감치 이반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자신이 출정하는 전쟁에도 데리고 다니거나 교육을 시키는 것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반의 공포정치를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부자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581년 어느 날, 이반은 임신한 황태자비 옐레나가 얇은 옷을 입은 걸 보고 복장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마구 구타했다.[30]

이로 인해 옐레나는 그만 유산을 하고 말았고, 황태자 이반은 두 명의 전 황태자비들을 수도원에 보내버린 것도 모자라 임신한 며느리를 유산시킨 아버지를 저주했다. 이에 격노한 이반 4세는 이성을 잃고 아들마저 사정없이 폭행했고, 잠시 뒤 정신을 차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후회하며 아들을 끌어안고 울었으나 황태자는 결국 3일 뒤 죽고 말았다.

파일:Iván_el_Terrible_y_su_hijo,_por_Iliá_Repin.png
19세기 러시아의 대 화가 일리야 레핀이 이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있다. 일리야 레핀은 그 당시 발생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서 영감을 얻어 광기와 폭력을 비판할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다. 즉, 이반 뇌제는 광기폭력을 휘두르는 무절제한 기성세대 지배자이자 차르, 황태자 이반은 그 광적인 폭력에 희생당한 신세대이자 공화주의자 정도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런데 레핀이 그린 이반 뇌제의 표정 묘사가 너무나 역동적이고 생생한 나머지, 화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이반 뇌제를 동정하게 되었다. 마치 표정으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라고 말하는 듯한 이반 4세의 얼굴을 보면,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채로 감상하는 사람들도 사건의 배경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그림을 계기로 러시아 사학계에서 이반 4세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이반 4세는 성군폭군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황제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이 그림은 두 번이나 관람객에 의해 훼손되었다. 1913년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31]에 의해 황제와 황태자 두 사람의 얼굴 부분이 칼로 세 번 찢겨 훼손되었으나, 당시는 작가 일리야 레핀이 살아있었기에 본인의 손으로 직접 복원되었었다.

이후 2018년 5월 27일에 두 번째로 훼손을 당하는데, 모스크바 뜨레티 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중, 갤러리 뷔페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취한 관람객이 옆에 놓여있던 금속봉으로 아들을 묘사하는 부분 3군데를 훼손하였다. 그림에 압도당해서 그랬다고. 다행히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 부분은 훼손되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자는 징역 3년에 벌금 3백만 루블(약 6천만 원)을 선고받았다. 기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Wjatscheslaw_Grigorjewitsch_Schwarz_001.jpg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반 4세.

그러나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막힌 스토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들은 황태자 이반이 이반 4세의 국정에 불만을 품어 불화가 있었다는 것과 이반 4세가 어느 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아들을 죽였다."고 썼던 것 때문에 이반 4세가 아들을 우연히 죽인 것이 아니라 독살하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는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황태자의 무덤에서 발굴한 시신을 분석한 결과 다량의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1584년, 이반 4세는 5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는지 점성술사들을 불러 죽을 날을 점치게 하였다. 그들은 그가 1584년 3월 18일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반은 예언이 맞지 않으면 점성술사들에게 화형당하거나 생매장당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며 궁 안을 헤매고 다녔으며 황제의 보물창고로 가서는 보석들을 만지며 자신이 만진 보석이 색이 변하나 안 변하나를 살폈다고 한다.[32] 그러다 체스를 두겠다고 체스판을 가져오게 해 체스를 두려는 순간 뒤로 거꾸러지며 점술사들이 예언했던 1584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아들 표도르 1세가 뒤를 이었지만, 그가 1598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1613년까지를 러시아 역사의 가짜 차르들이 난립한 "혼란 시대"라 부르며, 권좌를 놓고 치열한 대립과 전쟁이 벌어졌다.
[1] 봉건귀족을 일컫는 러시아어[2] 옐레나가 사망한 이유는 옐레나 대공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반 4세의 삼촌들을 처형한데 대한 복수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겨진다. 현재는 슈이스키(Shuisky) 가문이 독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거론되고 있다.[3] 1532년 출생. 형의 대관식 이후 재산과 하인을 받아 결혼도 하고 살다가 1563년에 사망했다. 아내는 팔레흐 공녀 울리아나로 부부에게는 아들 바실리가 있었지만 1살에 사망하고 그녀는 남편 사후 수도원에 들어가 1569년에 사망.[4] 실제로도 이반 뇌제는 자신이 어렸을 시기에 옷과 먹을 것 문제로 크게 고생했다고 회고했다.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진 적도 있었다 하니...[5] 물론 어머니 쪽 친정 집안, 그러니까 이반 4세의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전혀 이반 4세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반 4세가 친정을 시작한 뒤 갑자기 나타났고 두 외삼촌은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1547년 모스크바 봉기 당시 책임을 지고 큰 외삼촌 유리는 군중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작은 외삼촌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어머니 안나(이반 4세의 외할머니)와 잠시 추방당했다.[6] 물론 전근대에는 수은을 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독인줄 몰랐다. 페니실린의 발명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독의 몇 안되는 치료법 가운데 하나는 수은 증기를 매독 환부에 쐬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매독의 경과를 늦추는 데에 그쳤고, 종국에는 매독이 신경까지 침투해 수은 자체의 신경독성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경우도 흔했다. 비슷한 경우로 수은을 복용하면서 이상해진 진시황이 있다.[7] 러시아어로는 젬스키 소보르[8] 젬스키 소보르의 권한이 커진 탓에 대귀족들의 힘이 약화되었다.[9]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거나 지나친 토지 소유를 막았다.[10] 러시아 인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반 표도로프는 "책 인쇄는 마법이고 이단!!"이라고 선언한 성직자들과 값싼 인쇄물이 나옴으로서 손실을 입게 된 필경사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11] 중앙의 힘이 강해지자 뛰어난 장인들과 상공업자들이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모스크바가 러시아 건축술의 중심이 되고 도시청, 석공청과 같은 도시 건설과 관련한 부서들이 생겨났는데, 지방에서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2] 남부에서는 조금 예외적이었는데,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정복에 격분한 오스만 제국 황제가 신하국인 크림 칸국에 명령을 내려 남부 지역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크림 칸국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공격해오자 러시아는 브랸스크에서부터 시작해 랴잔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짜서 크림 칸국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13] 봉토는 고려의 군인전이나 동로마의 프로니아 제도처럼 상속되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아들에게 다시 지급하는 체제였다. 이렇게 봉토를 받고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들외에도 타타르인 관료들이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14] 황제가 신앙에 대한 자유를 주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정교회로의 개종 작업을 실시하고 개종자에 대한 혜택과 이슬람교도들에게 상속받을 권리에 대한 차별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유로 개종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이들이 계속 이슬람을 믿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갔다.[15] 당연하지만 이 루머가 실화일 가능성은 없다. 타지마할 공사에도 샤 자한이 장인의 "손을 잘랐다."던가, "눈을 멀게 했다."던가 루머가 있는걸 감안하면 전세계 공통이다.[16] 고령에다 무거운 갑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예르마크와 비슷하게 죽었다.[17] 예르마크의 일대기를 후일 톨스토이가 단편소설《예르마크》로 다루었다.[18] 1640년 러시아 정부의 수입 중 1/3이 모피로 걷어들이는 것이었다.[19] 16세기 전반기부터 시비르 칸국의 남쪽에 살았었던 노가이 칸국, 우즈베크, 카자흐 칸국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20] 동북부 시베리아인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중남미인들처럼 철기에 대해서 몰랐고 아즈텍인들과 비슷하게 수정으로 만든 칼을 썼었다.[21] 정착민, 유랑민, 유목민[22] 이반 4세는 뒤끝이 있었는지 "비천한 계집 같으니라고. 딱 자기 주제에 맞게 행동하는군. 더 이상 당신들과 상대하지 않겠소. 모스크바에 영국 촌놈들 따위는 필요 없소."라고 말하며 보복으로 영국과 교역하던 나르자 항을 다른 나라에 개방했다. 이후 영국은 교역을 재개하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23] 이반이 엘리자베스 대신 점찍었던 사람은 여왕의 시녀였던 메리 헤이스팅스였는데, 레이디(Lady) 메리는 "야만인들의 땅에 시집을 가기 싫다."며 질색팔색을 하고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반의 청혼을 받았던 일 때문에 차리나라는 별명을 얻었다고.[24] 처음엔 러시아가 우세했는데 러시아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제국, 리투아니아가 연합하여 반격하는 바람에 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보니아에 전 군사력을 투입하다시피하다 보니 남부의 크림 칸국과 동부의 타타르를 비롯한 외적이 침입해와 모스크바를 유린하는데도 제대로 맞설 수가 없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기근이 꼬리를 물면서 귀족들의 반란까지 일어나니 이반 4세는 더는 감당할 수 없어 강화하여 사실상 패배하고 말았다.[25] 이 아들을 사칭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이나 나온다.[26] 하지만 헨리 8세처럼 아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맘에 안든다고 패거나 수도원에 보냈을 뿐.[27] 무엇보다 이반 본인이 어릴 때부터 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시달려왔고 귀족들의 반란을 겪은터라 귀족들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다만 그녀의 유골에 수은이 검출되면서 이것이 피해망상이 아닌 합리적인 의심일지도 모른다.[28] 학살은 무려 5주간 진행되었는데, 현대 사학자들은 사망자 수를 2,500 ~ 12,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러시아의 역사적 중심지 중 하나이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될 당시 인구 2만 5천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였던 노브고로드는 이 일로 큰 타격을 입고 몰락한다.[29] 이런 크림 칸국의 노예 무역이 큰 돈을 벌리자 나중에 준가르 제국도 노예 무역에 뛰어들긴 한다. 물론 청나라 건륭제가 준가르 제국을 정복하면서 노예무역은 종식되지만.[30] 원래 임산부들은 태아의 체온 때문에 체내 열이 높아져 더위를 잘 타게 되는 일이 많다. 때문에 더워서 얇은 옷을 입기도 하고, 그러고도 버티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31] 당시 29세였던 이콘 화가였던 아브람 발라쇼프라는 사람에 의해 훼손되었는데,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쇠퇴한 고의식파 신도였다.[32] 이반이 미쳐서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는 보석도 은처럼 독이나 병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병에 걸렸으면 보석의 색이 변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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