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압사 사고/논란/경찰 부실대응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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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경찰 관련 사건사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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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부실대응 및 직무유기 / F: 과잉진압 및 강압수사 / H: 경찰내 가혹행위 / I: 부실수사 및 증거 조작 / M: 경찰관 일탈행위 / Na: 국가조직 연루 및 개입 / O: 경찰관 피해 / P: 민간인 피해 / ?: 사건 경위 불명




1. 개요
2. 사고 이전
2.1. 과거 대비 통제 미흡 논란
2.2. 통제 완화 요구 관련 경찰-상인회 진실공방
2.3. 지하철 무정차 요청 관련 경찰-서울교통공사 진실공방
2.4. 기동대 지원 관련 서울경찰청-용산경찰서 진실공방
2.5. 정보 경찰관 배치 요청 묵살 및 미배치
2.6. 사고 전 112 신고 부실대응
2.6.1. 현장 경찰력 부족 문제
3. 사고 이후
3.1. 현장 대응 미숙
3.2. 엉망진창 보고체계 논란
3.3. 서울특별시경찰청 당직 상황관리관 근무지 이탈
3.4. 허위 상황보고서 작성 논란
3.5. 서울용산경찰서 정보과 보고서 삭제 논란


1. 개요[편집]


이태원 압사 사고 발생 당시 경찰의 대응에 관련된 논란을 정리한 문서이다.


2. 사고 이전[편집]



2.1. 과거 대비 통제 미흡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태원 압사 사고/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태원 압사 사고/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다른 해와 다르게 올해에 군중 통제가 미흡했다는 비판은 이태원 압사 사고/원인 문서의 '3.3 문단'에 기술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반론과 정부 당국의 입장은 '3.3.1 문단'에 기술되어 있다. 상세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2. 통제 완화 요구 관련 경찰-상인회 진실공방[편집]


2022년 할로윈 전부터 이태원 상인들이 작년(2021년)에는 경찰이 통제를 너무 엄하게 해 손해가 컸으니 올해(2022년)는 그렇게 통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는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관의 주장이 나왔다. # 반면 상인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한편 이태원 상인회와 경찰 사이의 간담회 기록을 MBN에서 단독입수해 공개했다. 이태원 참사 사흘 전에 있었던 간담회 문건에는 상인 측이 "경찰이 지난해 영업 중단, 인파 해산 등 과도한 조치를 했다"며 "올해는 과도한 경찰력 배치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상인 측에서는 "단지 과도한 단속만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을 뿐 경찰 배치를 줄여달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 경찰력이 배치된다면 경찰조끼를 벗어달라고 요청한 사실, 이태원역장이 환풍구 추락사고 예방을 위해 장애물 설치를 요청했으나 용산구청이 설치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났다. #


2.3. 지하철 무정차 요청 관련 경찰-서울교통공사 진실공방[편집]


출처

  • 서울경찰청 주장: 서울경찰청은 31일 오후 “이태원 사고 당일 지하철 무정차 요청 관련, 경찰이 사고 발생 1시간이 지나서야 무정차 통과를 요청했다는 보도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사고 당일 현장에 있던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장이 오후 9시 38분께 전화상으로 무정차 통과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서울교통공사 측에 사전에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무정차를 요구했으나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승하차 인원이 예년과 차이가 없다며 정상 운영했다”고 답했으며, 경찰은 2차례나 무정차 요청을 했지만 서울교통공사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에 따르면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그간 핼러윈 행사 동안 이태원역을 무정차로 운행한 사례는 없다”며 “필요시 현장에서 판단해 조치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 서울교통공사 주장: 서울교통공사는 이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며 전면 반박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강한 유감을 표했다.

교통공사 관계자는 “경찰이 최초 무정차 요청을 한 시간은 정확히 오후 11시 11분”이라며 “경찰이 주장하는 오후 9시 38분은 역장이 파출소, 치안센터장에 ‘귀갓길 승객이 승강장에 포화상태니 일시적으로 외부 출입구 유입 승객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시간”이라고 반박했다.
또 서울경찰청이 26일 관계기관 간담회 당시 서울교통공사 관계자에게 다중인파 운집 시 이태원역 무정차통과를 적극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교통공사 측은 “당시 나눈 대화는 ‘무정차 요청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 문의한 것에 불과하다”며 “이에 역장이 ‘통상 행사나 축제, 집회가 있으면 경찰이 사전에 협의 후 공문을 보내야 한다. 열차 통제는 호선이 다 연결돼 있고 전체 안내 방송과 시민 안내가 필요해 역장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서울교통공사 관계자에 9시 38분경 무정차 통과를 요청했다고 하였으나 이에 서울교통공사는 무정차 요청이 아니라 이태원 지하철역의 역장이 이태원 관할 파출소, 치안센터장에 지하철 출입구 유입 승객을 경찰에 막아달라고 요청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2.4. 기동대 지원 관련 서울경찰청-용산경찰서 진실공방[편집]


국민일보 보도 용산서 경비과와 112대응실은 대응책을 내부적으로 논의하며 서울경찰청에 기동대 경력 요청을 검토했으나 경비 부서를 통한 공식 요청은 하지 않았다. 2주 전 열린 ‘이태원지구촌축제’에도 기동대 배치가 되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 용산서 측의 주장: 용산서는 문서를 통한 공식 요청 대신 실무자를 통해 서울청에 “경력 지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서울청 측이 "경비기동대 대신 교통기동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교통기동대는 경비과가 아닌 교통과에서 운영하는 교통활동 전문 부대다. 그마저도 기동대 1개단 전체가 아니라 1개 제대(20명)에 그쳤고 종일 근무 지원이 아니라 대통령실 근처 삼각지역 집회 관리가 끝난 뒤 해당 제대가 오후 10시에 넘어오는 방식이었다. 용산서가 서울청에 제출한 계획서는 일부만 받아들여졌다. 용산서가 급증하는 인파에 “교통기동대를 빨리 배치하면 좋겠다”고 재촉했음에도 집회 관리 문제로 기동대의 도착은 늦어졌다. 경찰 관계자는 “기동대가 처음부터 이태원을 2차 근무지로 두지 않고 행사 지원인력으로 배치됐다면 현장 교통 통제 근무가 가능했을 것”이라 언급했다.

  • 서울청 측의 주장: 교통기동대 지원은 용산서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이고 공식적으로 기동대 지원 요청은 오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경찰 "핼러윈에 기동대 배치 전례 없어" 거짓 해명… 현장선 "매년 ‘기동대’ 배치" 경찰 내부에서는 서울청이 교기대와 기동대를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교통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 신호등을 조작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교기대가 인파를 통제하는 것 자체가 혼잡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 YTN 취재 결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도 핼러윈에 대비하기 위해 기동대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문의까지 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서울경찰청의 최고 책임자인 김광호 청장이 처음엔 기동대 투입을 타진한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결국 김 청장이 경찰 기동대가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 없다는 말에 그냥 지나쳐 버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고, 전문가들은 지휘관의 안이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질타했다.
YTN보도 "기동대 투입 필요" 서울청장도 인식...조치는 안 해

2022년 11월 18일, 특수수사본부는 이임재 前 서장의 주장과 달리 용산경찰서에서 서울경찰청에 경비기동대 증원 요청을 한 기록이나 그런 요청을 한 직원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


2.5. 정보 경찰관 배치 요청 묵살 및 미배치[편집]


'이태원 참사'의 원인중 현장의 위험 정보를 파악해서 보고할 정보 경찰관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취재 결과 관할 용산경찰서는 올해 대통령실이 이전할 무렵부터 정보관 수를 두 배 넘게 늘리고도 참사 당일 이태원에는 한 명도 투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참사 당일 현장에 정보관이 한 명도 없다 보니 시민들의 신고 말고는 실시간 위험성을 알려줄 만한 정보 보고가 전무했다. 참사 전, 용산경찰서의 외근직 정보관은 대폭 충원된 상태였다. 그 배경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 등을 꼽았다. 하지만 정작 용산서 정보관 가운데 참사 당일 관할 지역 최대 인파가 몰렸던 이태원에 투입된 인력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 안전'보다 '주요 인사의 안전', '집회 시위' 등에만 집중했던 것 아니냔 지적이 나왔다. ‘이태원 근무 0명’…용산 정보관 인력 2배 늘리고도 왜?

용산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이 방역수칙 해제 후 첫 할로윈으로 인해 인파 상황을 살피고 보고할 정보 경찰관을 현장 배치해야 한다고 보고서 제출 및 보고를 진행하였으나 "당일 저녁 대통령실 인근까지 행진하는 대규모 집회 상황에 집중하라"면서 보고를 묵살했다는 정황보도가 SBS를 통해 이뤄졌다. #

이후 직접 이태원 현장에 나가겠다는 의견도 수용되지 않았고, 직속상관에게 다시 의견을 전달했지만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 진술하였다. 보고 내용이 용산서장은 물론이고, 치안 대책을 세운 112상황실이나 기동대 배치를 하는 경비과에도 전파되지 않은 사실을 특수본에서도 확인하였다.

참사 당일 용산서 소속 정보 경찰이 모두 대통령실 인근 집회를 챙기느라 이태원 축제 현장에 단 한명도 배치되지 않은 경위에 대해서 특수본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일선 경찰들은 당시 이태원에 정보관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입을 모은다. 보고서를 작성한 A씨가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정보관 배치를 요청하고 담당 정보관인 자신이 나가겠다고도 했지만 정보과장은 이런 보고를 묵살하고 "대통령실 집회를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서울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간부는 "집회·시위 현장에서 정보는 머리, 경비는 팔·다리라고 생각하면 쉽다"라며 "위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경력을 보내야 한다'고 무전(보고)을 하면, 상황실이나 지휘부에서는 기동대를 보내서 정보 쪽에서 올라온 내용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정보관은 "경비과장이나 정보과장, 아니면 정보관 수십 명 중 하나라도 그날 집회가 끝난 뒤 퇴근길에 이태원 현장에 가봤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화가 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

2.6. 사고 전 112 신고 부실대응[편집]


이태원 압사 사고 112 신고 접수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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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태원 압사 사고 녹취록 1.jpg파일:이태원 압사 사고 녹취록 2.jpg파일:이태원 압사 사고 녹취록 3.jpg파일:이태원 압사 사고 녹취록 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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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신고가 접수된 녹취록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약 3시간 40분 전인 18시 34분에 첫 신고 전화가 왔으며 "압사당할 거 같아요.", "지금 아무도 통제 안 해요", "소름 끼쳐요" 등의 말로 현장의 위험성을 사고가 났던 지점에서 경고했으나, 황창선 경찰청 치안상황관리관은 "대략 18시부터 (신고) 1건이 (경찰로) 접수된 건 맞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불편신고 정도에 불과했다"라고 중대본 브리핑에서 말하며 위험성에 대한 신고에 대한 안일한 상황인식 및 대응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무려 3시간 40분이란 골든타임을 날린 것이다. 거기다 11건의 신고 중 실제 출동은 초기 신고에 대한 4건 밖에 안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18시 34분 최초 신고자 박 모 씨는 11월 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경찰에서 현장에 나와 계셨다면 판단을 했겠죠"라며 왜 현장을 보고도 통제 판단을 하지 않아 사고로 이어졌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11월 3일, KBS를 통해 약 4시간 전인 18시 17분에 "여기 엄청 지금 사람들이 지금 압사당하고 있어요"라는 내용의 신고가 들어왔고, 10여분 뒤인 26분에도 동일 신고자로부터 신고가 들어와 두번째 신고 4분 뒤 현장에 출동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9시 7분 이후 접수된 5건의 압사 위험 신고는 당장의 긴급출동을 필요로 하는 코드1 신고로 분류됐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전혀 출동시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 SBS 단독 보도에 따르면 당시 용산 대통령실 근방에 11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오후 9시 쯤 철수하고 기동대는 퇴근해버렸다고 한다. 이태원에 남아있던 경찰 병력 137명 중 경비 및 안전 유지를 주업무로 하는 인력은 없었고, 경찰은 밤 10시쯤에는 30분 뒤부터 이태원 일대에서 마약 단속을 하겠다는 내용을 기자단에 공지하며 마약 단속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

사건 당일 관할경찰서인 용산경찰서가 상위 기관인 서울경찰청에 기동대 지원을 요청했으나 서울경찰청에서 기동대 지원을 묵살한 사실이 드러났다. # 2021년에는 약 180명 규모의 경찰 기동대 3개 중대(경찰 총 인원 경찰관 85명에 기동대 3개 중대)가 배치되었으나 2022년에는 단 한 개의 기동대도 이태원에 배치되지 않았다. 경찰 총 인원은 137명으로 동원 가능 인력은 오히려 2021년 보다 감소했다. 언론이 입수한 참사 당일 경찰 인력 운용계획서에서 이태원은 제외되었다. #

첫 112 신고 저녁 6시, 내용은 "압사당할 거 같아요. 경찰이 통제해주세요"
이태원 참사 ‘6시 34분’ 첫 112 신고에도 “압사”, 11통 녹취록 전문 공개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안전시스템 점검 회의에서 왜 4시간 동안 쳐다만 봤냐며 경찰의 대처를 비난하였다. #


2.6.1. 현장 경찰력 부족 문제[편집]


112신고에 대한 경찰 부실대응에 관해 현장 경찰관의 대응만으로 사고를 막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경찰 상부에서 일선의 현장 경찰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 경찰관은 블라인드에 '현직입니다. 이태원 사고 112대응 못한 이유 설명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려 대응이 불가능했던 건 인원 부족과 업무 과중이라는 경찰의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 권역 내 주말 신고 건수는 평균 1만 5천건이고 인원 과밀, 차량 정체와 같은 신고는 연말, 연초, 크리스마스, 명절연휴에 항상 빗발치기 때문에 제한된 인원만으로는 제대로 된 신고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신고 뒤에 밀린 신고가 수두룩하기 때문. 마약, 성폭행, 주폭 등 직접 발생된 범죄사건만 처리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한데 무전에선 빨리 마무리 하고 다른 신고 출동 가라고 지령하고, 옆 순찰팀에선 공조 요청을 한다는 것이다. 즉, 업무 과중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위 글에 따르면, 현장 경찰관이 질서 유지를 위한 기동대 파견이 필요하다고 판단해도 14번의 보고와 결재를 거쳐야 하고 "각 단계에서 한 곳이라도 의견 동의가 되지 않으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한다.[1] 이 경찰관은 경찰 창설 이래 한번도 해소된 적 없는 절대적 인력 부족, 경직된 수직적 조직 문화와 첨탑형 계급구조에 따른 쓸데없이 많은 보고, 결재라인, 하위직 공무원의 재량권 부재 등은 경찰의 오래된 아주 고질적이고 구조적 문제라며 "참사를 막을 수 없는 절대 불변의 구조"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관도 블라인드에 을 올려 "이태원 파출소 근무자들은 정말 죽을 듯이 일했습니다. 휴무, 비번인 직원들도 자진해서 쉬는 날을 반납하고 코피 터져가도록 일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돌아온 건 '조직의 수뇌부'에 대한 '비판'이 아닌 '경찰관 전체'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라며 "직원들에 대한 의미없는 비난은 멈춰주세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태원 파출소에서는 인력부족을 느끼고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라며 교통기동대 지원을 요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현장에 지원된 인원은 20여 명에 불과했고, # 이마저도 인근에서 발생한 집회·시위가 끝난 뒤 오후 10시쯤 넘어오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이에 이것으로는 인력부족이 개선되지 않아 10월 29일 밤 다시 기동대 지원 요청을 했으나 윗선이 거절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 # 즉, 당시 현장에서는 사실상 인력부족 문제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사고 당시 거리 통제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절규하는 이태원 파출소 직원이 언론과 유튜브에 공개된 적 있었다. # #
이에 대해 경찰청에서는 사건 당일 기동대 지원을 요청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당시 경찰청은 660명의 기동대 병력[3]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또한 현장 근처에 1개 기동대가 야간 대기 중이었다. #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 또한 BBC코리아 인터뷰에서 경찰 시스템을 지적했다. 이웅혁 교수는 "몇만 명이 모인 상황에서 경찰 서너 명이 군중을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도, "문제는 왜 경찰관을 계속 몇 명만 그곳에 뒀냐는 것"이라며 "그때라도 경찰 지휘부가 빨리 주변에 있는 경찰 부대를 배치하고 증원하는 등의 의사결정을 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찰관들은 경찰청 내부 게시판에서 지휘부가 책임을 희석하려 현장 경찰에 책임을 지운다고 비판하고 있다. #

11월 7일 SBS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참사 발생 사흘 전인 지난달 26일에 용산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 A씨는 작성한 '이태원 핼러윈 축제 공공안녕 위험 분석'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제출하면서 상급자인 정보과장에게 "인파 상황을 살피고 경찰서에 보고할 정보 경찰관을 현장 배치해야 한다"라고 이미 언급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 보고는 두번에 걸쳐서 "당일 저녁 대통령실 인근까지 행진하는 대규모 집회 상황에 집중하라"면서 묵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태원 참사 전 현장에는 위험을 감지하고 보고하도록 훈련받은 정보경찰관이 한 명도 배치되지 않았다. [단독] "대통령실 앞 집회 집중하라"…배치 요청 묵살, SBS

용산경찰서 교통과의 초과근무 시간이 용산 대통령실 이전 직후 1만 48시간 더 늘어났고, 용산경찰서 전체의 초과근무 시간도 2분기 1만 5513시간 가량, 3분기 9446시간 가량 더 늘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초과근무 시간이 폭증하고 출퇴근 통제로 낭비되고 있는 경찰력과 이로 인한 이태원 압사 사고의 영향에도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 #

참사 당시 용산구 당직 근무자들이 윤대통령 비판 전단지를 떼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구청 당직실은 참사 당일 오후 8시 30분쯤부터 이태원에 밀려드는 인파와 차량으로 복잡하다는 민원 등을 접수하고 현장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다음날 대통령이 전단지를 출근길에 볼 수 있다며 즉시 제거해달라는 '경찰'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구청 비서실장의 재차 요청으로 사고 당일 오후 9시 15분부터 오후 10시 40분까지 삼각지역 근처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을 벽에서 떼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참사가 발생한 시점은 10시 15분이었다. https://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75389.html#cb#

게다가 용산구청이 국회에 제출한 당직일지에는 참사 당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말 오전 9시까지 민원 접수 및 처리 내용이 담겼지만 '전단 제거 작업'은 없는 것으로 확인돼 '은폐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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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고 이후[편집]



3.1. 현장 대응 미숙[편집]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골목길 중간지점 부근 해밀톤 호텔의 계단 난간 옆에 출입구(비상구)가[4]가 존재했었고 이 출입구를 개방하여 우회로를 만들어 대피 및 구조 활동을 하였다면 사상자수를 줄일 수 있었다.

즉 관할 지구에서 출동한 경찰 및 소방 당국이 사고 지점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을 테니 해밀톤 호텔에 긴급 상황임을 알려 출입구 개방 요청을 하여 개방시키거나 혹은 아예 경찰관 및 소방관들이 직접 호텔에 들어가서 이 출입구를 개방하여 먼저 사람들을 대피시켜 압력을 먼저 줄이고 그 후 구조대가 출입구에서 나와 중간지점에서도 구조 활동을 펼쳤다면 앞쪽에서 구조 활동을 펼치는 경찰관 및 소방관들과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여 사상자 수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이런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맨 앞쪽에 엉켜있는 사상자들을 끄집어내는 것에만 급급한 1차원적인 현장 대응으로 사상자를 줄이지 못하였다.

부연하자면 사고 당시 구조활동을 했던 경찰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처음에 경찰 및 소방 구조대가 골목길 앞쪽에서 구조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이 계속 골목길로 진입하면서 골목길 뒷쪽에 있는 인파들이 물러서지를 못 하고 조금씩 내려오게 되면서 중간지점을 더더욱 압박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부 경찰관들이 골목길 뒷쪽 진입로로 출동하여 인파들이 더 들어오지 못 하도록 통제를 했었는데 이렇게 골목길 뒷쪽 진입로에서 더 이상 인파가 내려오지 않게 통제하고, 골목길 앞쪽에서는 당연히 계속해서 구조활동을 펼치고 그리고 가장 압력을 많이 받아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골목길 중간지점에 위치한 해밀토 호텔 출입구를 개방하여 여기서도 대피 및 구조활동을 펼치는 세 갈래로 진행되는 입체적인 구조 활동을 펼쳤다면 사상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덧붙여 해밀톤 지하통로의 비밀의 기사에서 확인되듯이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위치한 해밀턴 호텔 별관의 프로스트 주점과 해밀톤 호텔 본관의 로비가 연결되는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경찰 및 소방 구조대의 컨트롤 타워에서 사고 지점의 건물 외관 구조 및 연결 통로 등 각종 지리 정보를 신속히 파악하여 중간 지점의 출입구 개방 및 지하 통로 등을 구조활동에 활용하도로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에 명령을 내리지 못 하여 스마트한 구조 활동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비슷한 사고나 재난 발생시 실수를 되풀이지 않기 위하여 앞으로 철저한 분석과 개선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3.2. 엉망진창 보고체계 논란[편집]


파일:이태원 참사 보고 체계.jpg
[단독] 112는 신고방치, 서장은 늑장보고, 서울청장은 집에 있었다
용산서장, ‘위험’ 보고에도 늑장…경찰 수뇌부는 尹대통령보다 늦게 알았다

사고 발생 시각은 22시 15분,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 22시 17분이었다. 그런데 용산경찰서에서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게 보고가 올라간 시점이 사고 발생 시각으로부터 1시간 21분이 지난 23시 36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23시 34분에 김광호 서울청장에게 전화가 갔으나 당시 김광호 서울청장이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해 2분여 후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아 보고를 받은 것이어서 실질적으로는 1시간 19분이 늦게 보고가 올라갔다. 때문에 서울청에서 지원하는 것이 그만큼 늦어지게 되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은 경찰이 아니라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을 통해 보고를 받았고 그 시점은 사고 발생으로부터 1시간 4분 여가 지난 약 23시 19분으로 서울경찰청장보다 보고를 빨리 받았다.[5] 또한 윤희근 경찰청장이 보고를 받은 것은 사고 발생 시각으로부터 1시간 59분이 지나서였다. #

이렇게 서울경찰청과 경찰청, 그리고 행정안전부에 보고가 늦게 올라가는 동안 소방당국에서는 사고 발생 28분 만에 소방대응 1단계를, 그로부터 30분 후에 2단계를 발령하면서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대통령실은 경찰이 아닌 소방청으로부터 경찰청, 서울경찰청과 행정안전부보다도 빠른 22시 53분에 보고를 받았다.

결국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은 대기발령 처분을 받았고 새 인사가 부임되면서 사실상 경질되었다.


3.3. 서울특별시경찰청 당직 상황관리관 근무지 이탈[편집]


[이태원 참사] '긴급상황 보고' 임무 당직 총경 1시간24분 공석
이태원 참사 때 '112 상황실' 비웠다…상황관리관, 1시간 뒤 복귀
참사 당시 112 상황실에 없었다…경찰, 총경급 2명 수사 의뢰

참사 당일 서울특별시경찰청 112 상황실의 당직 상황관리관인 류미진 총경(서울특별시경찰청 인사교육과장)이 참사 발생 당시 상황실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은 112 치안종합상황실장을 대리해 서울청장에게 치안·안전 상황을 보고하고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경찰청 상황실에도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서울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치안 상황을 검토하고, 상황에 따른 조치를 결정하는 일도 상황관리관의 책임이다.

류 총경이 112 상황실로 복귀한 건 사고 발생이 1시간 25분 가량이 지난 뒤였다. 당직인 류 총경의 복귀가 늦어지면서 경찰청 보고 시점도 늦어졌다. 경찰청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1월 3일 류미진 총경을 대기발령하고 수사의뢰했다.


3.4. 허위 상황보고서 작성 논란[편집]


경찰, 용산서장 조사 '제식구 감싸기' 논란…허위 공문서 의혹도
용산서장 도착 45분 당겨 보고…책임규명 출발부터 거짓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이태원 참사 관련 상황보고서’에는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의 현장 도착 시간이 허위로 기재된 것이 확인되었다. 상황보고서에는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이 사고 발생 5분 후인 밤 10시 20분에 현장에 도착했다고 기재되어 있지만 실제로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5분인 것이 확인되었다.


3.5. 서울용산경찰서 정보과 보고서 삭제 논란[편집]


8일까지 이태원에 사람이 많이 몰릴 거라는 사전 보고를 묵살하고 삭제를 지시했던 용산경찰서 간부들이 그 보고서를 썼던 경찰관과 같이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입건되면 업무에서 배제하는 게 보통인데 아무런 인사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후 9일 정보과장과 계장이 대기발령되었다. #

정보과장은 참사 뒤 상황 보고서 삭제 지시와 관련해서 '정보 보고 문건 폐기 규정에 따라 정보과에 전체적으로 PC를 정리하라고 지시한 것'이라 말했다. 사전 보고를 하고 정보과 경찰관 배치가 필요하다며 자신이라도 나가보겠다는 경찰관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묵살한 게 아니라, 관내 집회도 있어 고생하니 들어가서 쉬라고 배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SBS 보도

11일 오후 12시 45분 증거인멸 혐의로 입건 되었던 용산경찰서 공공안녕정보외사과(정보과) 계장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관련 내용 수사에 어려움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

초기에는 보고서 삭제를 지시한 인물이 용산서 정보과장으로 알려졌지만 내부 감찰 과정에서 서울경찰청 정보부장으로부터 삭제 지시가 하달된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청 정보부장이 삭제 지시"…윗선 번진 은폐·묵살 의혹

14일 서울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경무관)을 대기발령 조치했다. 이태원 참사 관련 경무관급 이상 고위직 경찰관의 인사조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

경찰청 특수본이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정보부장과 김진호 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

[1] 실제로 사고 당일 용산경찰서에서 상급기관인 서울경찰청에 기동대 파견을 요청했으나 거절됐다고 한다. 서울경찰청은 파견 요청이 없었다고 맞섰다. #[2] 당시 근처에 기동대 병력이 있었으나, 그대로 퇴근했다고 한다. #[3] 사고 발생 후 출동한 병력이다.[4] 건물 내부에서 외부로 대피시 사용하는 비상구로 확인되었음[5] 나중에 이상민 장관이 브리핑에서 실언을 한 것도 보고가 늦게 올라온 데다 경찰이 아니라 소방 지휘계통을 통해 보고를 받으면서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될 수 없었기 때문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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