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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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정진근
鄭鎭瑾 | Jeong Jin-geun


파일:정진근.jpg

출생
1907년 9월 29일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석동
(現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구소석마을 824번지)[1]
사망
1984년 7월 25일 (향년 76세)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석계리 자택
묘소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 산26번지 선영
학력
상북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학부 (정치경제과 / 중퇴)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07년 9월 29일 경상남도 양산군(現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824번지에서 아버지 정순모(鄭舜謨)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북공립보통학교,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現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학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후 교내 독립운동 학생모임에 가입했고, 아버지와 상의해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 일본 제국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동기생이었던 윤치영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미국으로 가는 항공편을 기다리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회유에 넘어간 아버지의 권유로 1934년 귀국했다. 귀국 후 경기도 경성부 종로(現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던 본가로 갔다가 그곳에서 잠복 중이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도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대상에 올랐다.

1939년 상하이시로 다시 망명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잠시 귀국했다. 그러나 양산군 본가로 가던 도중 경기도 경성부 영등포정(現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영등포역에서 잠복 중이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1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가족들과 함께 낙향해 농업에 종사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윤치영의 도움으로 유학시절 독립운동자금 지원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구제받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서장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지영진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받았다. 1984년 7월 25일 오전 7시 30분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석계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2]

[[무소속|
무소속
]]

12,184표 (54.67%)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3]
2,813표 (13.02%)
낙선 (4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2,399표 (11.44%)
낙선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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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양산문화대전[2] 제13선거구[3] 제14선거구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