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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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시원.jpg

본명
조용원(趙鏞元)

호일(胡逸)
본관
함안 조씨[1]
출생
1904년 10월 23일
경기도 적성군 남면 황방리
(현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2]
사망
1982년 7월 18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자택[3]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요셉)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85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이다.

독립유공자 조소앙의 친동생이다. 또한 안춘생독립기념관장이 그의 사위이다.


2. 생애[편집]


1904년 경기도 적성군 남면 황방리(현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서 생육신 중 1명인 어계(漁溪) 조려의 16대손인 아버지 조정규(趙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둘째 형 조소앙과 다른 형들을 따라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상하이 남방 대학(上海南方大學)[4]을 졸업하였다.

1928년 청년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베이징,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0년에는 상하이에서 통일 전선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무단장,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 1940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 창군에 참가한 뒤 간부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대한노동총연맹 간부를 지냈다. 1948년 조소앙 등과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경기도 양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대한국민당 김덕열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2년 자유당창당에 참여해 여당의원으로 변신하였다. 1954년 조선전업주식회사 이사로 근무했고, 1955년 인촌 김성수국민장 위원회위원으로 인촌 김성수의 국민장을 주최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당 강영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 유세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정희 대통령 지지 연설을 하는 등 여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1965년에는 형 조소앙이 설립한 한중문화협회를 재건하였고, 1968년 제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광복회 창립 후에 부회장을 맡았고, 1971년 제3대 광복회장에 취임하는 등 독립유공자들의 활동을 알리고, 유족들의 복지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1982년 7월 1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시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1982년 7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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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8세 용(鏞) 항렬.[2] #[3] 자택이 있던 상수동 160-15번지에는 현재 래미안 밤섬리베뉴 1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4] 1952년 10월 화남사범대학(華南師範大學)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