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타라기 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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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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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夛良木健
(1950년 8월 8일~)

1. 개요
2. 생애
2.1. 입사 초기
2.2. 게임기 개발
2.3. 플레이스테이션의 대성공
2.4. 플레이스테이션 3의 실패
2.5. 이후
3. 여담



1. 개요[편집]


소니의 엔지니어이자 SCEI의 전 회장. 1975년 소니에 입사하고 경험을 쌓은 뒤 일선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를 개발하고 시장에서 성공시키며 지금의 PS브랜드가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플스3 발매 직후의 실패들이 겹치며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개발자로서의 재능과 악동, 모험가적인 기질로 큰 인상을 남겼기에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입사 초기[편집]


1975년 소니에 입사한 쿠타라기 켄은 액정 디스플레이를 오디오와 연결해 응용한 제품을 만들거나[1] 사내 엔지니어들에게 PC와 소프트웨어를 전도하며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당시 소니가 추진하던 VCR연구 부서에서 쿠타라기 켄을 '내부 스카우트'할 정도였으나 그는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정보처리 연구소로 보내달라며 부사장에게 청원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싶었던 연구를 하게 된다.

2.2. 게임기 개발[편집]


정보처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쿠타라기 켄은 방송국용 실시간 3D 특수 효과(VFX) 시스템인 '시스템 G'의 데모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생방송에 실시간으로 3D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장치인 시스템 G를 보며 쿠타라기는 '이걸로 가정에서 게임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시스템 G를 가정용 게임기로 만들려면 2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LSI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쿠타라기는 무어의 법칙이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1994~1995년 정도에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 쿠타라기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으로 닌텐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며 쿠타라기는 게임 사업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관여한 2인치 플로피 디스크 시스템을 납품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슈퍼 패미컴에 PCM 사운드 시스템을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1987년 양사간에 2박 3일 동안 합숙을 하며 쿠타라기는 여러 제안을 했고 차세대기에는 CD-ROM을 사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989년 슈퍼 패미컴 개발이 막바지일 때 다시 한 번 제안했지만 내키지 않았던 닌텐도는 대신 소니에게 '슈퍼 패미컴의 외장형 CD-ROM 드라이브'와 소니만의 자체적인 일체형 머신을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그러나 닌텐도는 1991년 5월에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였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개발 및 생산 준비에 들인 비용 15억엔을 날린 데다가 당시 홍보이사였던 이데이 노부유키가 SCE의 이사회 의장이었던 마루야마에게 무슨 일처리를 그런 식으로 하냐며 전화로 크게 화를 내고 훗날 이데이가 CEO로 취임할 때 쿠타라기가 긴장할 정도로 자리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오가 노리오 사장의 보호아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마루야마 시게루는 오가 노리오가 쿠타라기를 총애했고, 그리고 나머지 사원들은 쿠타라기가 일 벌리면 수습하고 사과하는 노예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과거 쿠타라기 켄이 정보처리연구소에 근무했던 시절 소니의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부카 마사루 사장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닌텐도와의 협상이 1991년 후반기까지 지지부진하자 쿠타라기는 사업보고서에 게임기 사업으로의 진출이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1992년 6월 24일 소니 그룹 최고 경영 회의에서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도 좋습니까? 소니는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2]라고 발언하였고,[3] 임원들은 '소니가 져도 되는 상대는 분하지만 마쓰시타 뿐', '교토의 화투집에 지면 어쩔려고 그러냐', '천하의 소니가 장난감을 만드냐' 등등 게임 사업에 잔뼈가 굵은 닌텐도에 비해 문외한인 소니는 경쟁이 안 된다며 반대를 했지만 "닌텐도에게 먹칠을 당했는데 다물고 있을 겁니까?"[4]라고 했고 오가 노리오 사장은 "그렇게까지 말하거든 독자노선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증명해 봐라. DO IT!"[5]이라며 승인했다는 설이 있다.[6]

한편 소니가 닌텐도와의 파담 직후 마이클 슐호프 미국 소니 사장이 자체 사업보다는 세가와 파트너십을 맺으면 어떤가 하는 제안을 했고, 실제 쿠타라기와 세가의 사토 히데키 등이 팀을 이루어 기술 검토를 했지만 3D 게임기와 2D 게임기의 이견으로 결렬되었다.[7] 결국 닌텐도와 세가와의 협업 계획이 엎어지자 소니는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쿠타라기는 임원 회의 때에 백 수십억 엔짜리 계약서를 들고 와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1993년 봄에 LSI 로직스와 CPU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이 140억 엔. 또한 쿠타라기 켄 본인이 진두지휘하며 칩부터 시작해 기계를 스스로 설계한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은 시대를 먼저 내다보고 3D 기능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성능, 균형적인 사양, 괜찮은 가격 등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2.3. 플레이스테이션의 대성공[편집]


당시 콘솔업계를 장악했던 닌텐도세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다 게임 개발자들이 3D 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게임업계에서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비관적인 태도로 주시했다. 그러나 3D 기판의 개발과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던 남코가 플레이스테이션의 탁월한 가성비에 놀라 시스템 11과 철권, 소울 엣지 등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인 우군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상황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1993년 8월 오락기기 박람회에서 버추어 파이터가 공개되자 개발자들은 3D게임의 가능성을 보고 소니로 찾아올 정도였고 데모를 보여주자 이런게 가능하냐며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훗날 SCE 초대 사장인 토쿠나카 테루히사는 이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은 세가 버추어 파이터의 성공 덕분임을 언론과 서적을 통해 회고했다.

1993년 10월 28일, 소니는 소니 본사 대강당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를 열었다. 이 시연회에 모인 개발자들은 대체로 대기업은 아닌 회사 쪽 사람들로 이루어졌지만 많은 수가 참석했고,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 4대를 설치해 티라노사우루스의 3D 동영상을 시연하자 다들 충격을 받았다. 회장은 조용해서 시연회가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쿠타라기 켄의 말로는 프로토타입 기기 말고도 워크스테이션이 따로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오기도 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발매 약 3주 전 겨우 완성되어 양산하기 시작했다. 최초 생산 계획 물량은 30만 대로 잡았다. 쿠타라기 켄은 발매 당일 그 어떤 언론에서도 취재하러 오지도 않았고, 이후 언젠가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 도서관에서 1994년 12월 3일 신문축쇄판을 보았는데 어느 곳에도 플레이스테이션에 발매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이나 게임 업계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100% 실패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구입했고, 쿠타라기와 사에키는 아침부터 아키하바라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오가 되기 전에 매진이 되어 초회물량 10만 대를 하루에 다 팔았다. 다음날 신문에도 대서특필이 되었고 그 때까지 소니가 게임기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곳에서마저 주문이 쏟아졌으며 소니 안에서도 게임기 사업을 반대하던 이사의 부인이 오가 노리오에게 한 대만 구해달라며 부탁을 하는 등 세간의 평가는 180도로 변했다.

이후 파격적인 가격 인하, 파이널 판타지 7의 출시 및 닌텐도와 세가의 부진[8][9]으로 업계의 승리자가 된다. 플레이스테이션은 1억대 이상이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2 역시 DVD 비디오 재생이라는 멀티미디어 기능으로서의 강점과 여전히 수많은 서드 파티들의 참여로 크게 성공하여 발매 약 1년을 조금 넘긴 2001년 3월 23일 1천만 대 판매, 2002년 9월 전세계 4천만 대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다. 최종 판매량은 무려 1억 5,768만 대로 기네스북에 제일 많이 팔린 게임기로 등재되었다. 쿠타라기 개인으로도 완전 자국산 칩 개발이라는 꿈을 이루기도 했는데, 플스 1에서는 LSI 로직과 합작으로 CPU가 개발되었으나 플스2에는 도시바가 CPU 개발을 맡았기 때문.

그러나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된 소니와 쿠타라기 켄은 아이러니하게도 슈퍼 패미컴 때의 닌텐도와 같이 지나친 자만심에 빠져버리게 된다.

2.4. 플레이스테이션 3의 실패[편집]


파일:ps3_e3.jpg

플스3는 2005년 5월 E3에서 2006년 봄 발매 예정임을 밝히고 가격도 함께 발표했다. "슈퍼 컴퓨터에 필적하는 연산 능력을 가진 Cell을 탑재한 차세대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이라는 거창한 수식어와 함께 공개되었지만 문제는 가격. 20GB 모델은 59,800엔(세금 포함 62,790엔) 60GB 모델은 오픈 프라이스라는(20GB 모델에 1만엔 정도 추가로 실 판매가는 대략 73,000엔 정도) 선언은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쿠타라기는 이것은 게임기가 아니며 성능을 생각하면 전혀 비싸지 않다고 반박하며, 그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과 직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 같은 가격일 수 있느냐?"는 발언으로 호된 비난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9월 TGS에서 20GB 모델의 가격을 세금 포함 49,980엔으로 인하를 발표했다. 거기에 20GB모델에 원래는 없었던 HDMI까지 탑재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론 2만엔 가량의 가격 인하를 한 셈이었다.

게다가 발매를 2006년 봄으로 예정했으나 해가 2006년으로 바뀐 시점에서도 제대로 준비된게 없어 발매 연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조차도, 먼저 발매된 엑스박스 360을 견제하느라 끝까지 앵무새처럼 '2006년 봄 발매 예정'이라고만 밝히는 촌극도 있었다. 역사상 발매 전 이토록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게임기는 PS3가 전무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발매를 연기해 2006년 11월 11일에 출시되었으나 생산 문제로 초도 물량을 일본 10만 미국 40만 대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이 물량은 하루 만에 모두 팔렸고 미국에서는 PS3를 강탈하는 강도와 총기 사고, 매장 앞 밤샘 줄서기 중 폭력 사건이 발생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미처 구입하지 못한 소비자들로 인해 플레이스테이션 3가 eBay에 올라왔으며 무려 $2,000도 넘는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 나오는 게임기가 잘 팔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웃을 수 없었고 일본에서는 구매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매를 목적으로 한 중국인이었다는 보고까지 나왔다.

초기에는 듀얼쇼크도 없어서 유저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정확히는 E3에서 기존 듀얼쇼크와 모양이 완전 다른 부메랑 모양의 패드를 공개했다가 폐기되었고, 결국 형태는 기존의 듀얼쇼크를 계승한 모양에 진동을 제거하고 육축 센서를 탑재한 식스 액시스 패드를 동봉해 발매했다. 사실은 이미전과의 특허 분쟁에서 패했기에 진동을 어쩔 수 없이 빼버린 건데, 필 해리슨은 이걸 좋게 포장하느라 진동을 일컬어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희대의 개드립으로 엄청난 원성을 듣기도 했었고 아직까지도 이 발언이 인용되며 조롱당하고 있다. 애초 그래픽만 더 좋아졌을 뿐이지 기본적인 게임 장르와 게임 방식은 똑같은데 갑자기 진동 패드만 구시대의 유물이 될 리가 없었고, 결국 팬들의 불만이 폭주했던지 이머전과의 소송에서 패소 후 로열티를 지불하고 듀얼쇼크 3가 부활하여 후기 버전엔 듀얼쇼크 3를 기본 동봉했다.

플스 진영이 이런저런 삽질을 하는 사이 닌텐도는 게임큐브 시절 서드파티 없이 혼자서 고된 수행을 한 끝에 기존의 경쟁자들과는 다른 시장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닌텐도가 출시한 NDS, Wii 시대부터 게임에 전혀 관심 없는 세대 공략에 성공함과 더불어 퍼스트 파티로 다른 하드들을 끝장냈기 때문. 그러니까 이 시대부터는 Wii 콘솔 내에서 닌텐도 한 회사의 소프트 판매량이 닌텐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회사를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마이크로소프트Xbox 360 또한 이전 기기에서 비효율적인 설계를 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원가 절감을 목적으로 칩의 특허권을 소유하거나, 컨트롤러가 FPS에 특화되어 있다는 강점을 활용하는 등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플스2의 성공으로 자만에 취해있던 것도 있었지만, 당시 소니에는 전체적으로 암운이 드리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니는 2003년 1월부터 3월까지 불과 3개월동안 1650억 엔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주식시장에서 매물이 너무 많아 3일 연속으로 주가가 하한가를 기록하는 '소니 쇼크'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최고경영자 이데이 노부유키의 리더쉽이 의심받고 결국 2005년 6월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이 쿠타라기 켄은 소니의 구원투수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첫단추였던 PSX와 차세대 콘솔 플스3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PSP가 분전했지만 결국 닌텐도 DS에게 밀리는 등 상황은 계속 꼬여갔다.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2012년에 소니의 최고경영자가 되는 히라이 카즈오가 당시 SCE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쿠타라기 켄은 명목상으로는 SCE의 CEO로 승진하나 개발 일선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쎘던 쿠타라기 켄은 2007년 4월에 사표를 제출하고 6월에는 명예회장과 기술고문역을 제외한 모든 임원직에서 물러나며 파란만장했던 그의 소니 경력은 마무리된다.

2.5. 이후[편집]


은퇴 이후 그는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나 객원교수로 활동하거나, 병렬 처리 컴퓨팅과 같은 최신기술을 연구하는 회사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그가 마지막에 맡았던 플스3는 발매 초기 삽질로 인해 어마어마한 적자를 봤지만 메탈기어 솔리드 4, 언차티드 2, 갓 오브 워 3,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등의 명작 게임들이 발매되며 어느정도 수습하는데 성공하고, 최종적으로 판매량 8,741만 대를 달성했다. 그리고 PSP도 당시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닌텐도 DS를 상대로 8,200만 대의 추정 판매량으로 휴대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의 절대 강자 닌텐도를 상대로 유일하게 분전한 타 회사의 게임기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후속 기종인 플스4와 플스5가 다시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 편. 소니 그룹 자체도 앞서 언급한 히라이 카즈오 회장의 지휘 아래 체질 개선에 성공한 상태이다.

3. 여담[편집]


  • 2022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메타버스엔 회의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그의 삶을 다룬 네이버 포스트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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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오디오 음량의 크기를 바늘이 달린 미터기를 사용해 표시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나, 쿠타라기 켄이 액정 디스플레이를 활용하여 녹색과 빨간색 LED로 오디오 음량을 표시하는 제품을 만들었고 이는 곧 오디오 업계의 유행이 된다.[2] 我々は本当にこのまま引き下がってもいいのですか。ソニーは一生笑いものですよ。[3] 출처: SONY의 선율(나의 이력서), 오가 노리오, 출처 2[4] 任天堂から顔に泥を塗られて、黙っておられるつもりですか。[5] そこまで言うなら独自路線でいけるかどうか証明してみろ。DO IT![6] 시대의 리더: 쿠타라기 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사장, 일본경제신문, 2009년 5월 22일#대체[7] 당시 세가 미국지사의 칼린스키 사장이 제안한 소니와의 협업을 일본 본사에서 거절하는 등 세가 본사에서는 소니를 만만히 보고 있었기에 협업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8] 닌텐도는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오만에 취해 서드 파티들에게 기기독점 요구, 개발 개입 등 갑질을 하며 서드 파티들이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서드 파티들이 플스진영에 붙는 대참사를 두고봐야만 했다. 세가는 미국 지사와 일본 본사의 갈등으로 실리콘 그래픽스와 기술 제휴, 소니와의 게임기 공동 개발이라는 기회를 몽땅 날려버리며 새턴, 드림캐스트 시기에 처참한 실패를 겪고 게임기 사업을 접게 된다.[9] 단 닌텐도 같은 경우 같은 시기의 닌텐도 64가 비록 플스1에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게임계에 큰 영향을 끼친 슈퍼 마리오 64,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골든아이 007, 스타폭스 64와 같은 퍼스트, 세컨드 파티의 3D 명작들이 출시된 기종이고, 북미에서는 꽤 분전하였던 기종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