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중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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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중로전 지도[1]
1. 개요
2. 전각 및 문화재 목록
2.1.1. 보물 제1827호
2.1.2. 대광명전 삼신불도
2.1.2.1. 보물 제1042호
2.1.3. 정광여래부도
2.2.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2.2.2. 봉발탑
2.2.2.1. 보물 제471호
2.2.3. 가경 3년명 미륵후불탱
2.2.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0호
2.3.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2.3.2. 석등
2.4.1. 삼십칠 조도품탑
2.7. 세존비각
2.7.1. 석가여래 영골사리부도비
2.7.1.1. 앞면
2.7.1.2. 뒷면
2.8.1. 진영 목록
2.9.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2.10. 황화각
2.11. 원통방
2.12. 감로당
2.13. 원주실
2.15. 후원


1. 개요[편집]


통도사 중간에 위치한 구역이다.

2. 전각 및 문화재 목록[편집]



2.1. 대광명전[편집]


파일:통도사 대광명전 문화재청.jpg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1758년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한국전쟁 관련 영상
대광명전 내부 벽면에는 '단기 4284년(1951) 4월 29일 퇴원자 출발', '통도사여 잘 있어라, 전우는 가련다.',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등의 낙서가 남아있다. 이러한 낙서는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31육군병원의 분원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단청 물감 관련 영상
2022년 7월 대광명전 단청기록화조사사업 중 조선시대 단청용 물감그릇이 발견되었다. 이 그릇은 백자분청사발로 당시 쓰던 물감이 그대로 굳어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1759년 사용했던 그릇으로 추정되며 단청을 그리던 스님이 깜빡하고 건물 윗부분에 두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2.1.1. 보물 제1827호[편집]


대광명전은 통도사내 중로전(中爐殿)의 중심 불전으로 대웅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사전(寺傳)에는 1725년(영조 원년)에 축환대사가 대광명전을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1759년에 만든「大光明殿三成功畢後懸板」에는 1756년(丙子) 10월 21일 밤 자시에 화재가 발생하여 법당 4위, 승료 4, 고사 10칸이 회진(灰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1758년(戊寅) 1월 초7일 공사를 시작하여 3법당을 9월 26일 중건하고 내외 장식까지 마쳤으며, 이듬해 1759년(己卯) 4월초에 시작하여 6월 26일까지 대광명전 단청을 마치고, 비로불상, 영산전불상도금, 후불탱을 동시에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대광명전은 1756년에 화재로 불탄 후 1758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건륭 23년(1758년)이라는 암막새 명문으로 보아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광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기단은 막돌 바른층으로 쌓은 위에 장대석으로 갑석을 만들어 조성했으며 정면 어칸 앞쪽에는 폭이 넓은 석계가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에는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의 원주를 세워 상부가구를 받고 있다. 창호의 정면은 소슬 꽃살창으로 어칸은 삼분합문이고, 나머지는 이분합문이다. 측면 퇴칸에는 정자살창 또는 빗살창이, 배면 3칸에는 띠살창이 각각 달려 있다. 공포는 정면과 측면의 경우 앙서형(仰舌形) 살미로 처리한 반면, 배면은 교두형 살미로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또한 정면 어칸의 기둥 상부에는 섬세하게 조각한 용두(龍頭)가 돌출되어 있고, 불전의 내측에는 용미(龍尾)가 돌출되어 있어 당시의 장식적 경향과 세련된 조각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대부분 퇴락하여 흔적만 남은 상태이나 내부는 문양은 물론 색까지도 선명하게 잘 남아 있다.

대광명전은 부재의 치목 및 조각 수법이 우수한 불전으로 평면구성과 공포형식, 창호 등에서도 18세기 중반 시기의 다포계 불전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불전 단청의 특색을 연구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2.1.2. 대광명전 삼신불도[편집]




2.1.2.1. 보물 제1042호[편집]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 등 삼신불을 그린 삼신불도이다.

가로 3.15m, 세로 4.6m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삼신불도는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고 그 왼쪽에 노사나불을, 그 오른쪽에 석가를 배치하였다. 주존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을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손모양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처럼 통견을 입은 노사나불은 양손을 위로 한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주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고,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과 석가여래의 아래에는 각각 두 명의 천왕이 있어 전체적으로 사천왕이 삼신불을 호위하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삼신불도는 영조 35년(1759)에 임한, 하윤 등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석가,아미타,약사여래를 삼신불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이 삼신불도에서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여래로 삼신불을 표현한 드문 예로서 미술사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2.1.3. 정광여래부도[편집]



2.2. 용화전[편집]


파일:통도사 용화전 전경 문화재청.jpg
양산 통도사 용화전
미륵전이다.
한국전쟁 관련 영상
소조미륵불좌상 안쪽에서 용화전미륵존불갱조성연기가 발견되었다. 구하스님이 쓴 글에 따르면 1950년 국군 상이병 3천여명이 통도사에 들어와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하였다고 적혀 있다. 즉 통도사에 31육군병원의 분원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2.2.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편집]


통도사는 합천 해인사, 승주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사찰 중 하나로 경내는 크게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의 3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용화전은 중로전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지었으며, 조선시대 영조 1년(1725)에 청성대사가 보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지붕을 받치기 위하여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매우 화려하다. 세부장식에는 용무늬를 많이 썼고 건물 앞면 중앙칸에 문짝을 달은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약 2m 정도의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다.

통도사 용화전은 특이하고 화려한 공포구조를 가진 소중한 문화재이다.


2.2.2. 봉발탑[편집]


파일:통도사 봉발탑 문화재청.jpg
양산 통도사 봉발탑
용화전 앞에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2.2.1. 보물 제471호[편집]

영축산(靈鷲山)에 자리한 통도사는 우리나라 3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사찰(佛寶寺刹)이며,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다.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와 승복의 하나인 가사(袈裟),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모시고 창건하였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중요한 절이었다.

이 봉발탑은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가운데·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2.2.3. 가경 3년명 미륵후불탱[편집]




2.2.4.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0호[편집]


본 작품은 1798년에 통도사에서 활동한 중요한 화승인 옥인(玉仁) · 경보(璟甫) · 승활(勝活) 등에 의해서 제작된 작품이며 특히 화폭에 미륵독존상을 배치한 도상으로 상태도 양호하여 자료적 가치가 높다.


2.3. 관음전[편집]


파일:통도사 관음전 문화재청.jpg
양산 통도사 관음전

2.3.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편집]


통도사는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지은 절로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관음전은 통도사의 중로전에 있는 3개의 법당 중 하나로 가장 앞쪽에서 남향하고 있으며 그 뒤로 용화전과 대적광전이 있다. 조선 영조 원년(1749) 용암대사가 지었고 그 뒤 여러 번 보수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내부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다. 또한 따로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을 넓게 꾸몄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2.3.2. 석등[편집]



2.4. 개산조당[편집]


1727년 처음 세워졌으며 1900년 고산대사가 수리하였다. 또한 원래는 장경각문이었지만 1912년에서 1932년 사이 개산조당 뒤에 있던 장경각이 해장보각으로 바뀌며 이름이 개산조당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2.4.1. 삼십칠 조도품탑[편집]




2.5. 해장보각[편집]


해장보각도 개산조당처럼 1727년 처음 세워졌으며 1900년 고산대사가 수리하였다. 원래는 장경각이었지만 1912년에서 1932년 사이 어느 시기에 이름을 해장보각으로 바꾸었다.

2.6. 장경각[편집]




2.7. 세존비각[편집]


석가여래영골사리비를 모신 비각이다.


2.7.1. 석가여래 영골사리부도비[편집]


1706년 세워진 비석이다. 해석문을 보고 싶다면 앞면과 뒷면 부분을 클릭하여 보자.

2.7.1.1. 앞면[편집]

사바교주(娑婆敎主) 석가여래(釋迦如來) 영골사리부도비(靈骨舍利浮圖碑)와 서(序)

선교랑(宣敎郎) 수사간원정언(守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 채팽윤(蔡彭胤) 지음

가의대부(嘉義大夫) 행승정원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상서원정(尙瑞院正) 이진휴(李震休) 씀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권규(權珪) 전액을 씀

불교가 천하에 행해진 지 오래되었다. 항상 나타난다고 하기도 하고 또 항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는데, 더욱 신령한 것은 항상 나타나면서 항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영남의 양주(梁州,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通度寺) 에 예부터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어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영골사리(靈骨舍利) 부도(浮圖)를 봉안해 왔다. 우리 임금 30년 갑신년(숙종 30, 1704년)에 성능(性能) 대사가 대중에게 의논하기를 “부처님은 계신데 부처님 보물은 없습니다. 돌아보니 지금 석종이 갈라지고 석단에 틈이 생겨 드러난 새김이 없으니 이는 존숭하는 바가 아닙니다. 어느날 저의 벗인 진희(眞凞)대사 운(雲)이 전각을 먼저 지어 나를 이끌었습니다.”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대사께서는 우리 스승의 문하에서 공덕이 많으십니다. 일찍이 대화엄경을 판각하셨고 또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장륙전(丈六殿,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을 중수하셨습니다. 오늘의 일도 오직 대사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을 도모하여 갈라진 것을 바꾸고 이지러진 것을 고쳤다.

또 비를 세우는 일을 내게 부탁하기에 아주 완강하게 사양하였더니 말하기를, ”세존을 사라쌍수에서 다비하고 사리 여덟 섬 너 말을 얻었는데 그때 군대를 일으켜 이를 다툰 것이 팔만 사천 나라였습니다. 지금 해동에 자리하여 세존 이후 삼천년이 되며 인도로부터 이천 유순(由旬, 왕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 30리 혹은 40리라 함)이나 떨어져 있는데 군대를 일으킨 노고도 없이 그 영골과 함께 머물게 하니 혹은 이른바 바다 가운데 한번 머문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사부대중(四部大衆, 남녀 승려인 비구 비구니와 남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 곧 불교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첨례(瞻禮)하는 이가 이르면 그때마다 기이한 향기로 응하니 그 변화를 보임이 혹은 보이고 혹은 숨고,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금이 되고 혹은 옥이 되고 혹은 금과 옥이 섞이고, 흩어지면 모래가 되고 쌓이면 알갱이가 되어 전체로는 넷인데 나뉘면 천이 되고 백이 된다고 합니다. 응달지고 갬이 서로 바뀌고 천둥과 비바람이 갑자기 이르며 방광을 하면 구불구불하여 오색 빛깔이 일정하지 않은데 천지가 밝아지고 산과 골짜기가 서로 흔들려 지혜가 불꽃처럼 타올라 떨쳐 날아 분분하고 어지럽고 무지개 깃발이 윤기를 겨루고 앞뒤로 왕래합니다.“ 하였다. 대개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 있어 이미 그 단초가 시작되었으니 왼손에는 든 것은 통도사의 고적이요 오른손에는 든 것은 청허(淸虛)대사 휴정(休靜, 1520~1604년. 조선 후기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승) 의 글이었다.

살펴 보고 말하기를, ”당나라 정관(貞觀) 10년(신라 선덕왕 5, 636년)에 신라 율사(律師) 자장(慈藏)이 중국에 불법을 구하러 가서 오대산(五臺山) 북대(北臺)에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친견하고 한번 좌정하여 10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자장이 꿈에 게송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화신(化身)이 와서 부처의 머리뼈와 손가락 마디 사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세존(世尊)의 믿음의 표시인데 지금 그대에게 전한다. 신라의 남쪽에 취서산(鷲栖山)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신령한 못이 있어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 그대는 돌아가서 단을 만들어 이것들을 봉안하라’ 하니 이것이 통도사(通度寺)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15년(고려 충숙왕 15, 1328년)에 지공(指空)대사가 바다를 건너 와서 단에 올라 법을 설하나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귀신이 설하는 것을 듣는 듯하였다. 명나라 홍무(洪武) 10년 정사년(고려 우왕 3, 1377년)에 왜구가 양주에 침입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였는데 월송(月松)대사가 구덩이를 파고 찾아내 가지고 도망쳤다. (왜군의) 추격이 급해지자 하늘이 검게 되고 비가 내려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기록 중에 실려 있다. 다시 만력(萬曆) 20년 우리 선조(宣祖)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영남 지방은 먼저 군대의 침공을 받아 죽이고 불태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계단(戒壇)도 이를 면할 수 없었다. 마침 사명(四溟)대사 유정(惟政, 1544~1619년) 이 의승장(義僧將)으로서 힘을 다해 사리를 완전하게 하고 뒤에 다시 손상될까 염려하여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잘 싸서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대사에게 보냈다. 휴정이 생각하여 말하기를 ‘어찌 남녁만 왜적에게 당하였겠느냐. 이 산은 동쪽으로 바다와 나란히 있어 만전(萬全)을 기할 곳이 못된다. 저 취서산의 좋은 자리는 문수보살의 명을 받은 자리이다. 불행하게도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그 뜻을 겉으로만 본다. 얻고자 하는 것은 금주(金珠)이지 신보(信寶)가 아니다. 예전처럼 계단에 봉안하고 중수하도록 하라.’ 하며 마침내 한 함을 유정에게 돌려보내니 유정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蟠寺, 정암사를 말함)는 신령함이 밝게 드러난 곳이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두 문인에게 명하여 한 함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게 하고 글을 지어 이 사실을 새겼다. 이로 인해 서쪽과 남쪽의 두 개의 사리탑이 있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보니 신라와 고려 때에 절과 탑을 많이 세워 이제 그만 두었으면 하고 한탄하였다. 일천년의 국조(國祚)와 삼국통일의 위업에 이르러 이를 부처의 도움으로 돌리는데, 전해 오는 신령한 성령과 위엄있는 신성한 일은 저절로 빛난다. 위아래로 천 백년 동안에 퇴락하고 부흥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이는 오직 한(漢)나라의 금인(金人)이 한 것이 아니라 노(魯)나라의 보옥(寶玉)이 한 것이니 그 무리가 크게 한 것에 다름이 없다. 크게 한 것은 이렇게 존재하도록 한 것이고, 존재하도록 함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게 한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게 한 것인가.

마침내 이렇게 썼다.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서기전 1027년)에 부처가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정반왕궁(淨飯王宮)에서 탄생하여 출가한지 49년만인 목왕(穆王) 53년(서기전 949년)에 열반에 들었다. 계단은 세로가 백무(百畝, 1무는 100보이니 100무는 10000보)이고 가로도 같다. 다섯 단으로 나누어 하나로 하였다. 높은 것은 2층 전각인데 5칸이고 구리와 철로 만든 기와를 얹었다. 절에는 또 세존의 비라금점가사(毘羅金點袈裟)와 보리수(菩提樹) 잎으로 만든 염주와 경전이 있는데 이 또한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명에 이른다.

부처가 말한 바 있으니 우담바라꽃이라

삼천년만에 한번 피어 우리 부처가 세상에 나심과 같네

그 수가 이와 같으니 앞도 없고 뒤도 없어

낳음과 낳지 않음은 멀고먼 예전부터 이어졌네

한량 없는 몸은 멸하나 멸함이 없네

세 법계를 거쳐 상주하는 신은

그 신은 무엇인가 향기만 자욱하네

빛나는 광채는 황홀하게 이어져 굽이치고

있는지 없는지 응달도 싣고 햇볕도 싣네

양주의 북쪽에 취서산이 있어

못에 용이 살아 계단을 쌓아 높였네

그 위의 사리탑은 자장율사의 힘이네

자장의 힘이 아니라 문수보살의 명이네

신령한 거북이 먹으니 문수보살이 아득하네

그 믿음의 도구를 받아 저 가섭에게 전해

신묘하게 들어맞기를 가만히 구해 이에 그 사람을 얻었네

만세토록 아침 저녁으로 동방으로 돌아가라 말했네

서쪽에서 흰 바다를 건너니 그 누가 막으리

용은 간직해온 보배를 바쳐 이에 와서 법을 지키네

하루에 세 차례나 내탕금이 내려오고

세도가들 실어 날라 멀리서 분주히 오가네

서쪽에서 와서 참배하나 남쪽 왜구를 막질 못했네

밝도다 그 신령함이여 오직 청허와 사명이로다

뜻을 합쳐 공을 나란히 해 대를 이어 법을 잇고

동운 대사의 뒤에는 성능 대사가 이를 도와

그 계승을 키우지 않으니 아름답도다 우리 성능 대사여

마음의 검은 자취를 좇아 뛰어난 선문을 모아

이에 계단을 증축하고 범종을 새로 조성했네

크고 큰 말씀이여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셨네

너의 거울과 너의 마음은 부정함이 있지 않다

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요히 없어지는 것이다

가서 느낌이 울림 같아 저 큰 구름에 의지하여

옛도 아니고 지금도 아닌데 삼천대천세계를 뒤덮었네

대사가 일어나 합장하여 우리 나라를 진호하셨네

성인의 나라 만년토록 이어지기를!

- 해석자 정병삼 -


2.7.1.2. 뒷면[편집]

대공덕주(大功德主) 부종수교 정혜원묘 자비보조 변재무애 홍각등계대선사(扶宗樹敎定慧圓妙慈悲普照辯才無碍弘覺登階大禪師) 성능(性能) 지음

동운문인(東雲門人) 호월자 보윤(皓月子普允) 씀

세존께서는 오랜 겁(劫) 이래로 여러 선근(善根)을 닦으시어 현겁(賢劫,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 세 시간 중에서 현재) 중에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가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준 석가의 과거 부처)을 만나 교화(敎化)의 수기(受記,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를 받으시고 도솔천에 머무르시다 보살의 교화를 마치시고 금단천자(金團天子)에게 “저 아래 염부제(閻浮提,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내가 태어날 곳을 찾아보라“ 하시니 금단천자가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정반왕(淨飯王, 석가모니의 부왕)의 성스러운 왕비의 이름이 마야(摩耶, 석가모니의 모비)인데 묘덕성(妙德城)의 선각(善覺) 장자(長者)의 여덟째 따님입니다. 그 궁전에 태어나심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코끼리를 타고 햇무리를 따라 처음에 마야부인의 태중에 맡기시고 오른쪽 옆구리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시니 주(周)나라 소왕(昭王) 갑인년(서기전 1027년) 4월 8일이었다. 경신년(서기전 1021년, 7세)에 일곱 살이 되어 일체의 신묘함에 통달하시고, 계해년(서기전 1018년, 10세)에 이르러 화살로 금고(金鼓)를 쏘아 뚫으시니 화살 앞에 탑을 세웠다. 임신년(서기전 1009년, 19세)에 이르러 성의 네 문을 유람하시고 늙고 죽어감을 싫어하여 한밤중에 성을 넘어 금도로 머리칼을 잘라내고 설산에 지내면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후 목왕(穆王) 3년 계미년(서기전 998년, 30세) 12월 8일에 이르러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마군(魔軍)을 항복받으시고 보장(寶藏)을 보이시며 녹야원(鹿野苑)에 이르러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셨다. 경인년에 이르러 하늘에 올라 어머님을 위해 설법하시니 우전왕(于?王)은 부처를 흠모하여 전단향(?檀香, 향기가 매우 좋은 향)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부처님께서 수기(授記)를 하시니 다자탑(多子塔)에 이르러 자리를 나누어 주시고(分半座) 신묘년(서기전 980년, 38세) 영산회상(靈山會上) 설법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다(拈花示衆). 교화의 인연이 다하여 목왕(穆王) 53년(서기전 949년, 79세) 2월 15일에 이르러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두 다리를 보이시고(槨示雙趺) 스스로 삼매(三昧)의 불로 다비하셨다. 사리 여덟 섬 너 말을 얻어 세 나라 왕이 각국에 나누어 주어 각기 보탑에 봉안하였다. 이때 시라왕(尸羅王)이 금궤(金櫃)을 만들어 정수리뼈(頂骨)을 넣고 열반하신 곳에 봉안하였다.

당나라 정관(貞觀, 627~645년) 때에 현장(玄?) 법사가 인도에 법을 구하러 가고자 황제에게 표(表)를 올렸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현장은 사사로이 원주(原州)에서 옥문관(玉門關)을 나서서 고창(高昌)에 이르니 그 나라 국왕 국문태(麴文泰)가 물자를 지원하고 호송해 주었다. 여러 나라를 거쳐 세존이 열반한 곳에 이르러 정수리뼈와 치아와 손가락과 대승경전을 얻어 본국에 돌아와 표를 올렸다. 황제는 부처의 정골과 여러 도구를 맞아 봉상현(鳳翔縣, 섬서성 서안 근교)의 법문사(法門寺)에 봉안하고 종남산(終南山, 섬서성 서안 남방) 운제사(雲際寺)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법을 구하러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더니 부처의 정골과 사리 백매와 여러 도구를 주면서 “신라 남쪽 취서산 아래의 신령한 못에 계단을 쌓아 봉안하라”고 하였다. 자장이 사리를 가지고 돌아와 여러 산에 나누었다. 성스러운 불골(佛骨)과 여러 도구들은 한결같이 문수보살의 위촉에 따라 땅을 가려 봉안한 것이니 천세 만세토록 영원히 동국의 큰 보배가 될 것이다. 지금의 통도사가 이것이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년)의 병란 나머지의 일은 송운(松雲, 사명대사 유정)대사 노장께서 기록해 두셨다. 순치(順治) 연간(1644~1661년)에 정인(淨仁) 대사가 중수하여 마무리하시고 강희(康熙) 을유년(숙종 31, 1705년) 봄에 나 영민하지 못한 성능이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에서 와서 백겁토록 만나기 어려운 일을 만나 성골을 함부로 봉안하고 첨례(瞻禮)하고는 불보 계단을 중수하고 비에 새겨 세웠다. 일을 다 마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 흘리며 삼가 발을 쓴다.

겸순찰사(兼巡察使) 김연(金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윤숙(尹淑), 태수(太守) 김환(金?), 전첨사(前僉使) 이동백(李東伯), 가선 김치명(金致嗚), 통정 최연민(崔延敏), 통정 이성발(李成發), 박명금(朴命金), 부모를 위해 대시주한 통정 이청(爾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자헌 현즙(玄楫), 영남총섭(嶺南摠攝) 자중(自重), 전총섭(前摠攝) 선원(善元), 덕홍(德弘)

각진부조(各鎭扶助)

대구(大丘) 동전 100 꾸러미, 경주(慶州) 목재 1동 20필, 안동(安東) 동전 60 꾸러미, 상주(尙州) 동전 90 꾸러미, 진주(晋州) 동전 100 꾸러미, 김해(金海) 동전 60 꾸러미, 칠곡(柒谷) 동전 40 꾸러미, 성주(星州) 동전 30 꾸러미, 선산(善山) 목재 4필, 남한산성 동전 30 꾸러미, 호남 쌀 25섬

대시주(大施主)

가선 김여활(金麗活) 동전 500 꾸러미, 널리 부모를 위한 인경(印經) 동전 160 꾸러미, 별좌 통정 수현(守賢) 조 70섬, 통정 경천(景天) 조 70섬, 전주지 신감(信鑑) 조 20섬, 가선 자수(自修) 쌀 7섬, 가선 해감(海鑑) 쌀 7섬, 김석선(金錫銑) 동전 40 꾸러미

대선사(大禪師)

북부 도안(道安), 동부 자징(自澄), 서부 국추(?秋), 남부 수영(首英), 한양 정원(淨源), 호남 명안(明眼), 서제(?霽), 법안(法眼), 인경(印?), 명찰(明察)

산중대덕(山中大德)

성균(性均), 축환(竺環), 나영(懶英), 청신(淸愼), 회정(會貞), 수호(守湖), 성수(性修), 탄변(坦卞), 영숙(靈淑)

승통(僧統) 가선 인감(印鑑)

도감(都監) 전주지 지섬(智暹), 부감(副監) 회명(會明)

주지 통정 도학(道學)

가선 옥림(玉林), 순철(順哲)

단(壇)을 열어 재(齋)를 지낸 화주 통정 낭총(朗聰)

상방(上房) 보능(普能)

수승(首僧) 준명(俊明), 월조(月照)

전좌(典座) 종숙(宗淑), 세청(世淸), 연두현(年斗?) 보율(普律)

직사(直舍) 대안(大安), 계열(戒悅)

지전(持殿) 사흘(思屹), 법탄(法坦), 최순(最淳)

연화인(緣化人) 130인

상당(上堂) 15인

석공(石工) 김세기(金世奇)와 그가 거느린 20인

비공(碑工) 대준(大俊), 묘인(妙印), 선감(宣甘)

공궤(供饋) 14인

야장(冶匠) 김사립(金士立), 김봉창(金奉昌)

내왕(來往) 12인

매탄(埋炭) 5인

부목(負木) 5인

조역(助役) 30인

대흡(大洽) 우경(宇瓊), 찬운(贊云), 충담(沖湛), 해훈(海熏), 금회(錦懷), 건심(建諶), 가신(可信)

제전(諸殿) 화공(?工) 계신(戒信), 채백(採白), 지감(智甘)과 그가 거느린 졸자 17인

본사 역군(役軍) 600인, 경상좌도 27인

관청 석군(官曳石軍) 1만 1천인

팔진 각각의 차례(八鎭各茶禮) 해인사, 쌍계사

별차례(別茶禮)

각관거사(各官居士) 부조(扶助)한 사람

각수(覺修), 영인(靈印), 두운(斗云), 가선 처신(處信)

조연대덕(助緣大德) 단식(檀湜), 증원(證元), 지원(智圓), 간초(澗草), 민오(敏悟), 보정(寶晶), 탄오(坦悟), 진습(眞習)

철조교생(鐵助校生) 김정민(金精敏), 이현(爾?)

한양 거주 거사의 딸 자철(自哲)

별도로 부조한 각 절

불국사(佛國寺), 장흥사(長興寺), 원원사(遠願寺), 천룡사(天龍寺), 감로사(甘露寺), 용연사(龍淵寺), 용천사(涌泉寺), 영정사(靈井寺), 운문사(雲門寺), 적천사(?川寺), 천주사(天柱寺), 수암사(水岩寺), 대둔사(大芚寺), 영지사(靈芝寺), 선여사(船余寺), 장안사(長安寺), 축정사(竺井寺), 두류산 쌍계사(頭流山?溪寺), 백천사(白泉寺), 영악사(靈岳寺), 대흥사(大興寺), 반룡사(盤龍寺), 남해사(南海寺), 용문사(龍門寺), 창녕사(昌寧寺), 용흥사(龍興寺), 경흥사(慶興寺), 범어사(梵魚寺)

목재 운반 3사

운흥사(雲興寺), 청송사(靑松寺), 대운사(大云寺)

재 운반

신흥사(新興寺)

숭정갑신후 63년 병술(숙종 32, 1706년) 2월 일 세움

이동립(李同立), 양천하(梁千夏)

- 해석자 정병삼 -


2.8. 영각[편집]


스님들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60점이 넘는 그림이 있으며 일부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8.1. 진영 목록[편집]


  • 청허 휴정(서산대사, 1520 - 1604)
  • 기허 영규(? - 1592)
  • 사명 유정(사명대사, 1544 - 1610)
  • 영한 종열
  • 우운 진희(? - 1694)
  • 환성 지안(1664 - 1729)
  • 화곡 계천(? - 1759)
  • 설송 연초(1676 - 1750)
  • 호암 체정(1687 - 1748)
  • 영파 성규(1728 - 1812)
  • 일봉 우민
  • 응암 희유
  • 용파 도주
  • 경파 경심
  • 동파 탄학
  • 금파 임추
  • 취봉 궤붕
  • 월허 계청
  • 퇴은 등혜
  • 도암 우신
  • 화악 태영
  • 동명 만우
  • 해송 관준
  • 삼성 서징
  • 화악 지탁(1750 - 1839)
  • 백암 관홍
  • 성월 홍진
  • 청담 준일
  • 춘암 인천
  • 화봉 유철
  • 침계 관추
  • 학송 이성
  • 구룡 천유
  • 우계 염일
  • 의송 최인
  • 용암 혜언(1783 - 1841)
  • 홍명 궤관
  • 화담 경화(1786 - 1848)
  • 추파 지첨
  • 해령 원성
  • 성담 의전
  • 호성 석종
  • 대은 우관
  • 영담 유홍
  • 경해 성찬
  • 금용 경희
  • 용담 성한
  • 덕암 혜경
  • 구성 봉의
  • 환담 예은
  • 성곡 신민
  • 포운 윤경
  • 환은 민열
  • 오성 우축
  • 응허 도협
  • 구담 전홍(1793 - ?)
  • 구봉 지화
  • 용허 지묵
  • 우담 유정
  • 성해 남거(1854 - 1927)
  • 남허 신영
  • 추파 대명
  • 근암 한영
  • 보운 도엄
  • 낙운 지일
  • 망운 취일
  • 헌암당
  • 덕월 지홍
  • 석담 유성

2.9. 불이문[편집]


파일:통도사 불이문 문화재청.jpg
양산 통도사 불이문

2.9.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편집]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지은 절로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통도사의 세번째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지은 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모든 것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음을 불이(不二)라 하며, 불이문은 이러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짜임새가 있고 견실한 건물이다.

문에 걸려있는 ‘원종제1대가람’이라고 쓴 현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2.10. 황화각[편집]




2.11. 원통방[편집]




2.12. 감로당[편집]




2.13. 원주실[편집]




2.14. 공양간[편집]




2.15. 후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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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색칠되어 있는 부분이 중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