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탱 엘리 술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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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ustin-Élie Soulouque
포스탱엘리 술루크
생몰년: 1782년 8월 15일 ~ 1867년 8월 3일
1. 개요[편집]
포스탱엘리 술루크는 아이티 대통령과 황제를 지낸 인물로, 포스탱 1세(Faustin I)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일생[편집]
2.1. 노예에서 대통령까지[편집]
포스탱엘리 술루크는 아이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절인 1785년에 흑인 노예로 태어났는데 1793년에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었고, 아이티 혁명 막바지인 1803년부터 1804년까지는 혁명군에 병으로 입대하여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아이티의 독립이 확정된 이후에도 아이티군에 남아있던 술루크는 1806년에 아이티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1810년에는 알렉상드르 페시옹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호위 기병대 장교로 임용되었고, 필리프 게리에 대통령 하에서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장 바티스트 리셰 대통령 하에서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아이티 육군 총사령관 겸 대통령 경호부대 사령관에까지 올라 아이티 군부와 정계의 핵심 인물 중 1명이 되었다.
이와 같이 출세가도를 달리던 술루크는 리셰 대통령이 임기 중인 1847년 2월 27일에 사망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847년 3월 2일에 취임했다.
2.2. 황제 포스탱 1세[편집]
그러나 술루크는 대통령직에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집권 2년째인 1849년 8월 25일에 개헌을 단행하여 공화정을 폐지하고 1849년 8월 26일에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했다.
그가 수립한 아이티 제2제국은 장자크 데살린의 제1제국이 선거군주제를 채택했던 것과 달리, 세습군주제를 채택했고,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며 지지를 확보했다.
경제적으로는 커피와 면화 재배를 독점하며 국고를 충당했으나, 낭비와 부정부패로 이를 탕진했고, 아이티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도미니카 공화국을 네 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재정복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56년에 있었던 4차 침공마저 실패로 끝나자 군부 내에서 포스탱 1세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커졌는데, 그에게 작위를 하사받은 인물 중 하나인 타바라 공작 기욤 파브르 니콜라 제프라르가 1858년에 총대를 메고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제프라르가 이끄는 반군은 같은 해 12월에 아이티 대부분을 장악했고, 1859년 1월 15일에 포스탱 1세가 퇴위를 선언하고 망명하면서 제국은 붕괴되었다.
당시 포스탱 1세는 프랑스 공사관에 망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영국령 자메이카 킹스턴에 정착했다.
2.3. 퇴위 이후[편집]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포스탱 1세는 이후 아이티 공화국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채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했고 1867년에 사망했다.
다만 제위 세습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라서 그의 후손이 명목상의 아이티 제위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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