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D. 루스벨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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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일생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어린 시절과 정계 입문 초기[편집]
1882년 1월 30일, 뉴욕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FDR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나름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고, 미들네임인 어머니의 가문 델러노(Delano)는 보스턴 브라민의 일원이었던 만큼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겐 먼 친척뻘(13촌)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그러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이 때의 인연으로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미합중국 해군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때부터 루스벨트는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는데,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가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내기도 한다. 또 이때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스벨트의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보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출처
3. 부통령 후보 출마와 뉴욕주지사 재임[편집]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1] , 당시 민주당 윌슨 대통령이 주도하다 결실을 맺지 못한 국제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제임스 콕스 후보가 공화당 워런 G. 하딩 후보에게 패하며 FDR도 함께 낙선한다.
게다가 본인 건강에도 큰 문제가 생기는데,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으며,[2] 때문에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3]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4]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뉴욕주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사족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5] ,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6]
다만, 장애를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식의 내용은 과장된 감도 없잖아 있다. 실제 1932년 전당대회 당시부터 정적들은 루즈벨트의 건강을 물고 늘어졌고, 루스벨트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할때 대놓고 휠체어를 타고 나올 정도로 당내에서는 이미 그가 반신불수라는게 공공연한 비밀 수준이었다. 마이애미대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토빈도 소아마비 사실을 기를 쓰고 숨겼다는건 과장된 사실이며, 루즈벨트 세대 미국인들은 대부분 루즈벨트가 최소한 걸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자세한건 이 글도 참고. 즉, 애초에 반신불수인 이상 주변인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며, 그 외 타지에 사는 사람들은 몰랐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는게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4. 대통령 취임과 뉴딜 정책 추진[편집]
1932년 1월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 다만 장가라의 총알은 FDR에게서 빗겨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안톤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 암살사건에 대한 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7] 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장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장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선 믿거나말거나 수준이라 어느 설을 신뢰할진 알아서 판단하자.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길이길이 남았다.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fear itself."(후략)
"우선, 제 확고한 신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후략)
노동자의 선택, 루스벨트.
-1936년 대선 포스터.#
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는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일단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8] 예를 들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하고,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 제정 등이 이때 이뤄졌다. 또한, 1933년 증권법 및 1934년 증권거래법을 통해 증권 거래에 대한 규제의 틀을 잡았다.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이자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이 시행된 후, 그의 집권기간 실업률은 줄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 등 경제 상황이 빠르게 호전된다. 그리고 이러한 호경기에 힘입어 그는 1936년 대선에서 상대편 공화당 후보인 알프레드 랜든(Alfred Landon)을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한다. 1936년 대선 선거운동을 하면서 루스벨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 연설 전문 ]
한편, 이 1936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여론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명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사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대규모 전화 여론조사 및 독자들에 대한 우편 설문을 통해서 공화당의 알프 랜던이 선거에서 이길 것[9] 이라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루즈벨트의 압승. 그것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전국 득표율인 60.8%(1위는 1964년 린든 B. 존슨의 61.1%)를 기록하며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상하원 선거도 상원 76석, 하원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담는 그야말로 압승.[10]
사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전에 여러 번 선거 예측에 성공한 선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할 정도의 오판을 한 이유는 리터더리 다이제스트의 조사 방법 때문이었다. 뭔 소린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전화 및 우편 설문은 그 표본의 대표성이 크게 떨어졌다. 당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독자는 잡지를 사서 읽을 정도가 되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를 차지했고, 당시에는 꽤 고가품이었던 전화기를 집에 설치할 정도의 계층 역시 중산층 이상이 다수였다. 때문에 표본은 편파성을 띄게 되었고, 결국 잘못된 결과를 도출한 것. 그리고 이 실패로 인해 다이제스트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2년 후인 1938년 폐간하고 만다. 반면 조지 갤럽이란 언론인은 무작위 표본 추출을 통한 조사를 통해서 루스벨트의 승리를 예측했고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서 인기를 얻는데,[11] 이 성공으로 갤럽은 독자적인 여론 조사기관을 만들었고 이게 바로 현대의 그 유명한 갤럽이다.[12]
그렇게 루스벨트는 집권 2기에 들어섰으나, 1937~1938년엔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찾아왔고, 외교적으론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 지역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고심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선 경제 주기상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시적 패턴이란 설도 있고, 또 고전학파 전문가들은 뉴딜 정책의 재정지출 효과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케인즈주의자들은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즉 뉴딜을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 때의 경기 침체란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대공황 시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또 집권 1기와 달리 집권 2기는 의회와의 상대적 불화로 애초에 뉴딜이 제대로 작동할만한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지도 못했다.[13]
실제 집권 1기 동안에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과반 의석에 힘입어 뉴딜 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을 거침없이 통과시켰지만, 1937년 들어 민주당의 진보화에 불만을 가지던 보수적인 상당수 남부 민주당원 의원들은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이른바 보수연합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보수연합은 1930년대 중후반 이후에 상정된 뉴딜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의 거의 대부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가장 마지막으로 입법화되는데 성공한 뉴딜 정책 관련 중대 법안은 1938년에 제정된 "공정한 노동기준에 대한 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이다. 또 보수연합은 뉴딜 정책에 대한 법안들의 상당수를 위헌으로 판결한 당시의 보수적인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법관 증원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14]
하여튼 그런 와중 1940년, 루스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비록 지난 선거보다는 득표율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서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루즈벨트가 3선에 출마, 당선된 1940년이 정확히 그 사이였던 것.
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편집]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기도 하다.[15]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16]
그리고 역사적인 1941년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습 이후, 루스벨트는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40초부터)
[ 연설 전문 ]
직후 미국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17]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마스 E. 듀이[18] 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3선과 달리 4선은 당시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나,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19]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물론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중임을 무조건 금지하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6. 승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편집]
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20]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미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 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사망 하루 전 찍힌 마지막 사진인데, 상태가 매우 안 좋아보임이 한 눈에 보인다.
한편 루스벨트의 사망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깐 들떠서 과거 프리드리히 2세가 7년 전쟁에서 멸망 직전에 몰린 순간,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망으로 인해 기사회생한 전례를 재현하길 꿈꿨다. 이런 생각을 한 게 히틀러 혼자만은 아니였는지 괴벨스는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전화로 "여제가 죽었습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망과 루스벨트의 죽음을 동일시한 것이다.[21] 이렇게 잠시 동안 베를린 전체가 살았다는 열광에 휩싸였지만 후임자인 트루먼은 표트르 3세의 삽질을 반복하지 않았다. 서방 연합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독일을 압박해왔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자결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대통령 사망 혹은 탄핵 등 유고시 선거를 하지 않고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 이에 따라 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에 올랐다. 트루먼은 영부인 엘리너의 전화를 통해 부고를 접했는데, 엘리너가 "트루먼 씨,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요.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1] 당시 38세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2] 오늘날에는 이 질병을 소아마비가 아니라 자가면역 질환인 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3] 재활의 일환으로 온천이 있는 조지아주의 웜 스프링스(Warm Springs)를 방문하여 온천욕을 경험한 후, 사재를 털어서 온천수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요양원을 세우고 다른 소아마비 환자들과 같이 치료를 받았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임기동안 16차례나 찾았을 정도로 애용하였으며 일종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듯 하다. 이 요양원은 Roosevelt Warm Springs Institute for Rehabil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존재한다.[4] 다만 앨 스미스는 나중에 1936년 대선과 1940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지 않고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5] 루스벨트는 당연히 자력으로 앉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벌어진 기억의 착각이다. (출처: The Roosevelts: An Intimate History, Ken Burns, PBS 다큐멘터리 6화)[6] 이와 관련해 영화 The American President(국내명 대통령의 연인)에선 비서실장(배우는 마틴 쉰)이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있던 시절이라면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거다."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7] 조직 범죄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8] 당시 민주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기에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9] 실제로 루스벨트 당선 확률이 43%이라고 예측했다.[10] 참고로 FDR 집권 이후 민주당은 20세기 후반까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상하원 선거에선 수십년간 주로 우위를 차지한다.[11] 심지어 갤럽은 다이제스트가 루스벨트 당선 확률을 44% 정도로 볼 것이라는 예측까지 했다. 실제와 단 1%p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12] 다만 갤럽도 이후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해리 S. 트루먼의 재선을 예측하지 못해서 체면을 구긴 적도 있었다.[13] 다만 정부의 경기부양을 지지하는 케인즈 학파도 경기가 호황에 들어서면 흑자재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자재정은 정부부채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 결국 출구전략을 어느 시기에 적절히 쓰느냐의 문제. 자고로 논쟁이란 본인의 정치/사상적 신념 문제까지 끼여들 확률이 높기에 어느 나라, 어느 사상이든 서로 유리한 자료만 가지고 떠드는 경우가 많은 문제이니 적당히 걸러듣자. 그만큼 뉴딜이 세상에 큰 파급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4]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남부 당원들은 FDR의 위세에 눌린건지 아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서인지 어쨌는지 민주당 당적은 유지하며 붙어있었지만, FDR 사후 1940년대 후반부턴 독자 출마 등 본격적인 이탈 조짐을 보이게 된다. 완벽하게 갈라선건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친 1960년대 이후.[15] 물론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참전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그건 내 지인과 가족이 전쟁터 가는건 안된다는게 크지 유럽이 나치의 손에 들어가는걸 놔둬야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16] 이미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개전하기 전인 1938년 나치의 위협이 커져감에 따라 미국인들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The War of the Worlds의 라디오를 청취한 청자들이 공황에 빠졌다는 일화로도 잘 알 수 있다. 하물며 1940년에는 거의 전 유럽이 추축국의 손에 떨어진 시기다. 고립주의랍시고 마냥 안심하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17]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고전중이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뜬금없는 미국 선전포고를 듣고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돼버리겠지." 라며 좋아했다. 한편 독일에선 "총통 각하, 굳이 왜..."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18] 검사로서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인 럭키 루치아노에게 콩밥을 먹인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또한 루스벨트와 지역 기반이 뉴욕으로 같다.[19] 스탈린이 대놓고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20] 당시에는 고혈압의 이해도가 낮아 혈압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무려 350/190mmHg이었다.[21] 실제로도 루스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동부 전선의 병사들을 비롯한, 독일 고위층 사이에서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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