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목(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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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순조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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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홍순목
洪淳穆

출생
1816년(순조 16)
사망
1884년(고종 21)
시호
문익(文翼)
본관
남양 홍씨

희세(熙世)

분계(汾溪)
부모
부친 - 홍종원(洪鍾遠)
부인
전주 이씨
자녀
장남 - 홍만식(洪萬植, 1842 ~ 1905)
차남 - 홍영식
3남 - 홍정식(洪正植)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홍영식의 아버지이다. 1884년 홍영식이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개화파에 가담하다 정변의 실패로 참수되자 역적의 아비라는 이유로 자살하였다.


2. 생애[편집]


1844년(헌종 10년)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이후 지평, 수찬, 초계문신을 지냈고 1849년 헌종이 승하한 뒤 빈전도감 도청, 부사과, 이조참의를 거쳤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자 대사헌이 되었다.

그 후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이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전통적인 수구파로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척화비 설립 등을 지지했다. 이후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척족이 세력을 잡자 흥선대원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면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1884년 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자 다시 실각했다.

같은 해 갑신정변 때 아들 홍영식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파에 가담하여 주역으로 활동하다 정변이 실패하고 역모죄로 참수되면서 역적의 아버지라는 오명으로 쓰고 자택에 지내던 중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살하였다.

한때 개화파로부터 수구파의 거두라는 이유로 제거 대상에 오른 적도 있었으나 홍영식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복권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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