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앗 나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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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기간: 1182년 ~ 1213년 12월 25일الناصر لدين الله محمد بن المنصور
앗 나시르 리딘 알라 무함마드 이븐 알 만수르 [영어]
재위기간: 1199년 ~ 1213년 12월 25일
1. 개요[편집]
무와히드 왕조의 제4대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의 아들. 기독교도 측 기록에는 칼리파를 의미하는 '아미르 알 무으미닌'의 몬데그린인 '미라마몰린'으로 기록되었다. 치세 초반에 앗 나시르는 선대부터 제국을 괴롭히던 무라비트 왕조의 잔당 (바누 가니야)을 격파하고 발레아레스 제도와 이프리키야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는 등 군사적 치적을 쌓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선대를 본받아 안달루스로 원정하여 살바티에라 함락하는 등 위업을 떨쳤지만,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에 대패하고 라바트로 철수하여 얼마 후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과 어린 아들 유수프 2세의 죽음과 함께 무와히드 조는 급속도로 분열되며 쇠퇴하였고, 레콘키스타 전쟁은 기독교 국가들로 완전히 기울게 된다.
2. 치세[편집]
1199년 1월, 부친 야쿱이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계승하였다. 당시 무와히드 조는 표면상으론 레콘키스타를 저지시킨 전성기로 보였지만, 1195년에 이미 마요르카와 튀니지 일대가 바누 가니야에게 장악되는 등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2.1. 바누 가니야 격파[편집]
앗 나시르의 즉위 직후인 1200년에는 메노르카 마저 상실하였다. 1203년, 반격에 나선 앗 나시르는 2만 대군을 파견해 마요르카와 메노르카 모두를 점령하며 바누 가니야의 본거지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 지도자 야흐야 빈 이샤크는 같은해 튀니스를 함락하며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무와히드 조는 콩스탕틴 이동 지역을 상실하였다. 1204년, 앗 나시르는 대군을 편성하여 튀니지로 친정하였고 튀니스를 포기하고 도주하던 야흐야를 테브자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로써 튀니스와 알 마디야가 수복되었고, 앗 나시르는 일대의 총독으로 압둘 와히드 이븐 아비 하프스를 선임한 후 회군하였다. 앗 나시르는 후퇴 도중 츨레프에서 야흐야의 습격에 직면했으나 격퇴하였고, 그후 야흐야는 총독 압둘 와히드에게 연거푸 패배하며 점차 외지로 밀려났다. 배후를 안정시킨 앗 나시르는 15년 만에 안달루스 전선에 나서기로 하였다.
2.2. 안달루스 원정과 실패[편집]
-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문서 참조
3. 여담[편집]
13세기 초엽 잉글랜드의 존 왕은 성직자 과세를 두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한 끝에 파문 및 성무 금지령을 당하였다. 동시에 마그나 카르타를 내세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 군이 영국 본토를 침공해 혼란이 이어졌다. 1230년대에 과거를 회상한 성직자 파리의 마티외는 궁지에 몰린 존이 앗 나시르에게 사절을 파견해 도움을 청하며, 그 대가로 이슬람으로 개조하고 잉글랜드를 이슬람 국가로 바꾸어 무와히드 칼리파 휘하에 두겠다고 제안했다고 기록하였다. 런던의 성직자 로버트 등이 포함된 사절단이 당도하자 앗 나시르는 존의 굴욕적인 요청에 역겨워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당대의 비슷한 기록이 없다며 그 사실성을 의심하지만, 존의 잔머리와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꼭 배제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16세기 말엽 엘리자베스 1세와 아흐마드 알 만수르간 동맹의 시초 격이 되는 것이다.
한세기 이후의 맘루크 왕조 술탄인 앗 나시르 무함마드와 왕호가 상당히 헷갈린다... 한쪽은 칼리파, 다른 쪽은 술탄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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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an-Nāṣir li-dīn Allah Muḥammad ibn al-Manṣū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