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호(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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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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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20.postimg.org/doosan200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47번
하창우
(1988~1994)
최용호
(1995~2003.7.8.)
이원희
(2004~2007)
KIA 타이거즈 등번호 52번
김영배
(2001~2002)
최용호
(2003.7.9.~2005.7.24.)
신동주
(2005.7.25.~2006.6.2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4번
신동주
(2005~2005.7.24.)
최용호
(2005.7.25.~2006)
강봉규
(2007~2015)

파일:최용호.jpg
최용호
崔容鎬 | Choi Yong-Ho
출생1976년 4월 30일 (48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학력배명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OB)
소속팀OB-두산 베어스 (1995~2003)
KIA 타이거즈 (2003~2005)
삼성 라이온즈 (2005~2006)

1. 개요
2. 선수 경력
3. 연도별 성적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프로야구 선수이다. 배명고를 졸업했고 OB/두산, KIA를 거쳐 삼성에서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154경기 평균 자책점 4.77 483이닝 27승(1완투) 21패 3 세이브.


2. 선수 경력[편집]



2.1. OB-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1994년 12월 28일에 당시 계약금 7,500만원, 연봉 1,800만원(총 9,300만원)의 조건으로 OB와 전격 입단을 계약했으며 1997년 시즌까지 단 2경기에만 나왔을 뿐 주로 불펜을 맴돌았으나 1998년 시즌에는 30경기에 출장 해 54와 3분의 2 이닝을 던져 2승 2 세이브를 기록 성장 가능성을 예고했었다. 1999년 5월 6일 LG전에서는 8회 동안 단 1안타 만을 허용하는 눈부신 피칭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팀명이 두산으로 변경된 첫 시즌인 1999년에는 선발 투수로 뛰면서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으나 규정이닝을 채워줬고, 2000년까지 5선발 겸 전천후로 등판하곤 했다.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승선하며 커리어 유일한 우승 반지를 끼기도 했을 정도.


2.2.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2003년 7월 9일 외국인 투수 마크 키퍼를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 되었다. 그러나 최용호는 트레이드를 거부한 뒤 은퇴 선언을 하고 잠적했으나[1] 얼마 안 가 은퇴 의사를 철회하고 동년 7월 17일에 선수단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2004년 이후로는 1군에 다시 올라오지 못했고 2005년 7월 24일에 신동주를 상대로 맞트레이드 되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된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3.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WHIP
1995OB1군 기록 없음
1996
19972100009.00101012.00
19983054⅔20203.29322292551.12
1999두산38154⅓87004.261311692151081.45
20002812184005.0612514721961.63
2001228575004.98858463581.54
20021014⅔00004.9121250101.77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WHIP
2003두산 / KIA410⅔020010.131518172.16
2004KIA2041⅔23105.83436229191.56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WHIP
2005KIA / 삼성1군 기록 없음
2006삼성
KBO 통산
(5시즌)
1544832721304.7745349275313541.51


4. 기타[편집]


KBO 공식 사이트에 연도 별 방어율 TOP 10에 등록되어 있다. (4.26/10위)

박명환야구TV에서 이경필이 간접적으로 근황을 전했는데 2014년경에 베트남인 여성과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5. 관련 문서[편집]




[1] 이건 최용호의 입장도 이해해야 한다. 애초에 해태 타이거즈는 과거부터 엄격한 팀 분위기와 군기잡기로 유명한 팀이었으며 구타 또한 빈번한 편이었다. 오죽하면 2000년 3월 양준혁을 상대로 해태로 트레이드된 손혁이 당시 해태 선수단 합류를 거부하고 곧바로 은퇴를 선언한 뒤 잠적해버렸을 정도로 해태 말기~기아자동차 인수 후 KIA 타이거즈 초기까지 예전의 쌍팔년도식 문화가 남아 있기로 유명했다. 삼성에 있다가 트레이드로 기아로 넘어간 박충식이 이를 접하고 굉장히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LG와 해태/KIA가 트레이드를 하면 LG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LG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선수들도 마음 편하게 팀에 적응했고 자연스럽게 성적도 좋아지는 경우가 상당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선수들은 기아로의 이적을 굉장히 기피했다. 그리고 최용호가 KIA로 트레이드되기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사건이 뇌리에서 잊혀지기에 1년은 너무나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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