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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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0년 7월 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의 외가쪽 5촌 조카라고 하는데, 성분이 좋은 덕분이었는지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체육과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진학했다. 김정일과 대학동창 출신이다.

1973년 만경대예술단 섭외부 부부장, 문화부 과장, 1975년 5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국장을 지내는 등 외교 업무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전선동부장인 김정일과 매우 친해져서 그의 측근이 되었다. 1977년 5월,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을 보아서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3월, 평양 학생소년예술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86년,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8년 통일전선부의 조총련 담당 부부장을 지냈으며 전임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인 리동호가 김정일 생일 때 김일성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가 총살당한 이후 1989년 3월에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까지 승진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8월에 조평통 부위원장을 지냈다. 1991년 9월, 보천보전자악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만성간염이 나빠져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 또 일본에 다녀오는 등 일본통으로 보인다.

1993년 경에 김일성이 막판에 대남 대화공세를 강화하면서 통일전선부장으로 승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대남비서 김용순은 대미대화를 맡았다고 한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7년 2월, 리창선이 맡고 있던 구 사회문화부가 개편된 대외연락부 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총련 전문가였던 그가 대외연락부로 이동하면서 조총련 업무도 대외연락부로 이관되었다.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7년 7월과 1998년 12월, 조총련 업무지도를 위해 또 방일했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대외연락부가 개편된 내각 225부 부장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한단계 낮아져서 선출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내고는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8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과 조선로동당의 조국통일로선을 높이 받들고 이 땅우에 기어이 존엄높고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모든것을 다 바친 성원'으로 꼽혀서 김양건과 함께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근데 김양건도 이미 교통사고로 죽은 다음에 받은걸 보면 어쩌면 받았을 당시에 이미 죽은 상태였을 수도 있다.

3. 여담[편집]


사위는 내각사무장을 지낸 손영훈이다.

4.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11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11).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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