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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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송나라 시대 이전
2.2. 송나라 시대부터


1. 개요[편집]


중국에서의 옛 지명이며, 나중에 후한 13주 중에서 옹주로 편성되었고, 현재 중국의 섬서성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소관, 무관, 진창 고도의 산관, 효함 고도의 함곡관, 이렇게 4개 관문의 '가운데(中)'에 위치한다고 하여 '관중(關中)'이라고 불리운다.

고대부터 진나라부터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지역은 대부분 왕조가 수도를 관중에 두었을 만큼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실 관중은 청나라대 들어와서야 중국 중앙에 위치해있게 된것이지 명나라 시대까지는 중원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위치였고, 이민족 주거지와도 가까웠다. 그러나 중원이 하북부터 강남까지 탁 트여있는 지형인 것과 달리 험준한 산맥과 관문으로 보호받는 지리적 이점이 있고, 그렇다고 익주마냥 지나치게 험준하고 멀지는 않다.

지형이 폐쇄적이면서도 평화시기에는 관문만 통과하면 중원 남부와 북부로 바로 이어져서 교통도 크게 나쁘지 않고, 위수를 중심으로 한 위수분지의 생산력 덕분에 관중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수도를 유지할 생산력은 낼 수 있었다.

위수, 경수, 낙수가 황하와 합쳐져서 함곡관 지역을 통과하고 낙양을 지나간다[1]

중원의 변두리인 낙양이 중요했던 이유의 경우, 관중에서 함곡관 쪽을 통해서 중원을 향하면 비교적 바로 앞에 낙양이 있기 때문이다.




2. 역사[편집]



2.1. 송나라 시대 이전[편집]


주나라의 발상지이자 수도였으며,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에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鎬京, 현재의 서안 부근에 해당하는 장안)에서 동쪽의 낙읍(洛邑:뤄양, 현재의 낙양)으로 천도했다.

이렇기에 천하쟁패의 시기가 오면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곤 했다. 항우의 경우 '진을 멸망시킨 다음 이 관중을 근거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하여, 관중의 중요성도 모르는 의관을 입은 원숭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

송나라 이전까지 관중 지방과 파촉 지방을 결합하면 그 세력은 중국 통일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관중을 먹지 못한 익주 세력은 결국 중원의 물량에 밀려 멸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한중제갈량을 보유하고도 형주를 상실하고 농서와 관중을 병탄하려던 시도가 실패해 결국 에 잡아먹힌 촉한이 있다. 역으로 촉한이 그 불리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북벌을 행한 것 역시 이 관중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작 삼국시대 당시 관중은 후한 말기의 혼란, 특히 삼보의 난으로 인해 초토화해서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물론 관중 자체의 잠재력은 여전했고 촉한이 관중을 목표로 한 것도 합리적인 방안이 맞지만 적어도 삼국시대 당시엔 관중의 생산력은 그 이전 및 이후와 비교해 보면 중요도가 떨어졌다.

전국시대 진나라, 한고조, 북주(와 이들의 후신 수나라-당나라)가 관중에 도읍하고 익주배후지에 두어서 천하를 제패한 케이스, 오호십육국시대 전진도 관중에서 일어나 이런 식으로 중국을 다시 제패하기 직전까지 갔다. 일단 관중과 익주를 동시에 먹으면 양쪽에서 진령산맥을 축으로 한 적대 세력의 방해가 없어져, 관중의 물량을 전선으로 이동시키고 그 빈자리를 배후지인 익주의 풍부한 물자를 끌어다 보충하는 방식으로 시너지가 나는 것이다. 한고조가 전투의 승률만 보면 항우에게 밀리는데도 이런 식의 물량전으로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거기다 관중의 대도시인 장안까지 먹으면 험지에 의존해 그 안에서 천하를 제어하는 게 쉬워진다.

한고조가 '중원낙양이 아니라 '관중의 장안'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유사시에 관중 땅의 험지 안에서 제후들을 제어하기에 편한 땅이라는 유경의 제안에 공감했기 때문. 삼국지를 보면 촉한이 이곳을 지속적으로 공략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 지역의 인심을 잡으려 했으며 이민족들과의 연계를 통해 공략하려고 한 연유가 이것이다. 후세에 조선의 학자 정약용이 괜히 '고대의 전략가들은 장안, 낙양을 중심으로 전략을 짰다'라고 한 게 아닌 것. 물론 여기에는 고대, 짰다 처럼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포인트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관중+파촉만으로는 힘들고, 한수를 따라 내려와서 형북(남양, 양양)까지 장악해야 천하통일이 가능해진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완성을 넘어'라고 직접 언급한 게 이부분이다. 관중을 기반으로 통일한 세력(선진, 서한, 북주) 모두 최소한 남양까지는 확보했다. 단순히 파촉+관중만으로는 적의 침입 경로가 제한되어 있어(함곡관, 백제성) 방어에는 편하지만 바꿔 말하면 공격할 때 진출로도 제한되어 있다는 소리.[2]

특히 유방의 경우 형주 전역(임강국)이 초한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우의 제후(임강왕 공오)였던 터라 남양(그나마도 직할 봉지가 아니라 왕릉의 '세력권' 정도였음)을 제외하면 형주가 아예 적지나 마찬가지였고 형양과 성고에서 고생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한신의 북벌이 성공했기에 저 사수 전선이 무의미해진 것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결국 항우가 자리를 비우면 뺏고, 돌아오면 뺏기는 순환이 무한반복되었을 것이다.


2.2. 송나라 시대부터[편집]


송나라 시대부터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이때부터 중국 역사의 중심지는 관중보다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분분한데, 내륙 깊숙한 곳에 있던 관중지방이 당 말기인 서기 8~9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 기후변화로 건조해지면서 중국 동부 해안과 강의 하류가 더 중요해졌다는 설, 관중은 실크로드의 출입구인데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반대로 실크로드를 통한 육상무역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설, 장강 하류의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경제적 중심지가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설, 이민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시기에 관중이 동쪽 중원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서쪽과 북쪽에서 들어오는 이민족의 공격에는 취약한 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송 태조 조광윤이 장안을 도읍으로 물색했던 것은 북방 이민족의 방어가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의 선견지명이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서 이 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만 위수분지 이북은 여전히 말을 기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이곳을 잃은 송은 기병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어 북방 방비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중세 중국에서는 나름대로 중요한 지역이었다가 명나라 말엽에 이르러 다시금 17세기의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기후가 다시 변화하자 관중을 포함한 섬서성 일대는 곡창지대에서 황무지가 되었으며, 거듭되는 흉작까지 겹치자 대규모 유랑민이 발생한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그 사건이 명나라를 사실상 멸망시킨 이자성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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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예시로 익주에서 장강을 타고 선박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 형주라서, 이 2곳 또한 서로 중요하게 연관되었다.[2] 양양이 중요한 이유가 한수를 끼고 있는 천연 요새이면서 양양 이북으로 진출하기에 편할 뿐만 아니라 공격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번성을 넘어가면 사수관까지는 방어선을 형성할만한 지형지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