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특수요원/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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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위치한 북파공작원 충혼탑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

잔인한 응징! 무자비한 보복!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악랄해지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위국헌신 군인본분


멋있게 싸우고 값있게 죽자.


김일성 마빡에다 대검을 꽂고

유유히 돌아오라 켈로의 용사

적진 속을 마음대로 누비는 우리

남포동의 밤거리는 모두 나의 것

장하다 그 이름 켈로의 용사

 

-켈로가 [1]

1. 개요
2. 과거
2.1. HID
2.1.2. 설악 개발단
2.2. AIU
2.2.1. 선갑도 부대
2.3. 과거 출신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3. 현재


1. 개요[편집]


국군 직제상 정식 명칭은 910여단이다.[2]
과거 공개모집시절 '특수정보부사관'이라는 명칭으로 모병했으며 현재는 육상 특수요원이라는 명칭으로 모병중이다. 육군부사관 병과[3]명칭은 인간정보이다. 어색한 감이 있지만 굳이 공식적인 명칭대로 부르자면 인간정보부사관이 되겠다.

대한민국공공연한 비밀[4] 첩보부대이며 통상적으로는 과거의 명칭인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고 불리운다. 과거에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으로 명령, 인사, 예산 등 모든 부분에서 육군본부의 통제를 받았으나,[5] 현재는 대한민국 국군의 3군 첩보부대가 모두 국군정보사령부에 통합되었기에 국방부 직할부대인 국군 정보사령부 소속으로 부대원들만 육군일뿐 명령, 인사, 예산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육군본부의 통제로 부터 독립했다.[6] 모병은 민간 모병만 하고 있으며 육상 특수요원(HID)으로 비공개모병을 하고 있다.

2. 과거[편집]


자세한 것은 북파공작원 문서 참조.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에 따르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이들은 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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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이다. 대한민국 정보부대는 최초 1946년 1월 경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8년 8월경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같은 해 11월 말경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경 육군본부 정보국 내에 공작과가 생겨서 주로 첩보수집 임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에 따른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성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1951년 3월에 별도 조직으로 독립시켜서 확대 개편시킨 육군 첩보부대(HID)를 만들게 된다. 일명 돼지부대라고 불리는 부대가 바로 여기다.

1961년 7월 HID라는 부대명을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바꾼 뒤, 1972년 육군 정보대(MIG : Military Intelligence Group)를 통합해 육군정보사(AIC :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그리고 1990년 각군 정보부대를 통합한 것이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이다.

2.1. HID[편집]


당시 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 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여 개가 있었다. HID 직할대가 제1교육대였고 36지구대와 18지구대는 각기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맡아 첩보활동을 벌였다. HID 제1교육대는 1952년 10월 말경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19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하게 된다. 교육생들은 공수훈련·유격훈련·중요건물 및 교량폭파·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독도법·도둑질 등의 특전유격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 정신교육 등 16주 과정의 공작원양성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훈련시 분대별로 행동했는데, 야간에 북한산 계곡을 누비는 행군을 했으며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영할 때는 동굴에 낙엽을 깔고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덮고 돌멩이나 해골을 베고 잤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제1기생은 1953년 봄 김종벽 소령의 인솔하에 2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원들은 해주 앞 용매도에, 제2중대원들은 진남포 앞 취라도 등 서해안으로 침투했다. 제2기생들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낙하하여 침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기상악화에 의해 일부만 투하되었고, 일부는 원산 앞 여도에 합류하였다. 제2기생 일부는 휴전 후 설악대원으로 해상·육지로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제3기생은 김석환 대위가 이끌고 원산 앞 여도에 침투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중 HID요원들은 그 당시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장비가 열악해 주로 미군 등 유엔군의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설악대는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 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 이 전공으로 김동석[7]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2.1.1. SC지대[편집]


6.25 당시에 편성했던 한국에 살던 화교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외인부대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2.1.2. 설악 개발단[편집]


설악대는 HID 산하의 수많은 공작대 중에서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 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 이 전공으로 김동석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설악 개발단은 HID가 AIU로 개편된 이후에도 따로 크게 개편되거나 하지 않고 전체적인 틀을 유지한 채로 잔존해 있게 된다. 종종 육군 첩보부대의 호칭으로 HID 이외에 설악단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이유가 유명한 것 이외에도 이러한 것 때문이다.


2.2. AIU[편집]


육군 첩보대로 개칭한 후에는 공작원 포섭에서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AIU물색조로 켈로부대 출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켈로부대의 출신들을 AIU에 고용하여 신참 공작원 포섭과 양성에 켈로부대의 경험을 상당히 많이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AIU본부는 지금 하야트호텔이 있던 지역인 수원지 옆 보광동에 있었는데, 훈련은 강원도 OO군 OO리 첩보대훈련소, 일명 개발단에서 받았다. 정보사 물색조팀에 의해 포섭되어 1주일에 한 번씩 4회 면담한 후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면담은 한 사람씩 앉혀 놓고 하는 일대일 면담이었다.

계약서 쓰고 도장도 찍었다고 하는데,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의하면, 계약서 주요 내용은 6개월 교육을 받은 후 이북에 올라가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사회로 복귀시킨 후 제대증도 주고, 평생 다달이 연금도 주고, 성과에 따라 보상도 주고(개인택시 한 대 분), 사회에 적응할 직장, 북파 후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 준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남산야외음악당, 용산 노동회관 등지에 모여 동북산업사(AIU 가명)버스를 타고 양평동에 소재하고 있던 정보사대기소에 갔다. 거기서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밤새 강릉으로 향했다. 훈련소에서는 파고다, 백담배 등 담배는 3일에 3갑씩 지급되었고, 남산표 속옷, 북한제 계급장·옷·배낭 등이 배급되었다.

무기는 AK소총, 소련제 기관총, 탄알 90발, 세열수류탄 등이 지급되었다. 훈련은 30㎏ 배낭을 거의 매일 메고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후 인천대·문산대·전곡대·양구대·속초대·운천대 등 예하부대에 배치받았다. 인천대와 속초대는 지구대(해상침투)였고, 나머지는 지상대(육로침투)였다. 예하부대에서는 안가(안전가옥)에서 지냈는데, 그 안가에 보통 10여 명이 거주했다. 안가에서 통신·살인·폭파·독도법 등을 가르쳤고 일반적으로 작전은 1조(5인에서 6인)를 편성해 했다. 훈련에 있어서는 일명 키퍼(Keeper)가 있어 조교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초반 설악부대, 즉 설악개발단 출신들의 경우 제대할 때 상병과 병장 계급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군대에 왔다갔음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 주민등록증 앞면 병역란에 첩보대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악부대와 같은 무장유격대와는 별도로 AIU에서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부대들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작원들 증언에 의하면 청계산(일명 악마산)에 OO부대가 단독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지금 삼팔교가 있는 경기도 OO군 OO리에 있는 부대도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OO리에 있는 부대는 절취반·사진반·납치반으로 나뉘어져 절취반과 사진반은 단독침투, 납치반은 3인 1조로 작전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정보사는 강원도 모처에 이 첩보부대를 유사시에 대비해 당시 1972년 규모로 유지하고 있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2.2.1. 선갑도 부대[편집]


1968년에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던 1.21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이들 첩보부대 산하에 각각 임시 보복부대들을 만들게 된다. 그 중 육군 첩보부대가 살악개발단과 같은 산하 상설부대 이외에 임시로 만들었던 응징보복부대가 바로 이 선갑도 부대이다. 이들은 대부분 사형수나 무기수같은 흉악 범죄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pn=0&num=33072 참조


2.3. 과거 출신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편집]


2002년 9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정부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목숨 걸고 무력시위를 하겠다고 선언한 북파공작원(HID) 설악동지회(회장 정순호)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 양측 모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설악동지회는 이날 오전 10시 40분경 영등포역 앞 롯데백화점 삼거리를 점거하고 시위에 들어갔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가스통과 쇠파이프, 깨진 보도블럭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밑은 해당 시위 영상. 이때 출동한 경찰 진압부대가 과격한 공세적 진압방식으로 유명한 단셋 1001중대였는데, 이들조차 고전해서 경찰특공대가 출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6:56부터 한소절 빠진 켈로가를 들을 수 있다.

김일성 마빡에다 대검을 꽂고
유유히 돌아오라 켈로의 용사
적진 속을 마음대로 누비는 우리
남포동의 밤거리는 모두 나의 것
장하다 그 이름 켈로의 용사

이런 시위를 하게 된 원인은 국가가 북파공작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이 알고 싶다 886화 "빵빠레[9]와 빠삐용- 나는 무엇이었나" 편을 통해서 보면 국가가 그들에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폭력시위를 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시위덕분에 2004년 1월 8일,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재정되었다


3. 현재[편집]



3.1. 국군정보사령부[편집]


90년대, 각군마다 만들어져있던 공작부대를 통합하여(육군의 HID, 해군의 UDU) 국직부대인 국군정보사령부를 창설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3.1.1. 대한민국 특수요원[편집]


각각 육상해상으로 모집한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본래의 목표를 행하지 않고 폐쇄적인 상태로 외부와 교류도 없는 부대를 보며 몇몇 인사들이 예산과 각종 이유를 들며 해체할 것이냐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결국은 국군이 남겨둘 일종의 히든카드로 존치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아직도 폐쇄에 대해 여러 논쟁이 나뉘는건 현재진행형이다. 자세한 것을 떠나 사소한 정보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으며 모집 또한 비공개로 진행한다. 훈련은 여전히 혹독하다고 하며 그 이외 실제 작전 여부나 상세 정보는 여느 특수부대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폐쇄적인 이들의 성향을 고려하면, 알 수 없고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절대 이 곳에 서술하지 말 것. 좀 더 많은 정보를 위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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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설 시 한국 육군 소속이었던 HID와 미국 극동군이 운용했던 KLO부대는 한국전쟁기의 동시대에 존재했던 전혀 별개의 부대였지만, 휴전 후 KLO부대(8240부대)가 해체되면서 소속 부대원들이 한국군으로 편입되어 육군의 여러 부대들로 흩어졌는데, 그 중엔 HID로 배속된 대원들도 있었기 때문에(주로 신입대원감이 될만한 청년들을 관찰한 뒤 회유/포섭하여 공작원으로 계약시키는 물색조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을 통해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2] 11년도까진 870이였지만 그 이후에 부대명이 바뀌었다. 보안 등의 이유로 부대명을 바꾸는듯 하다.[3] 해군은 직별, 공군은 특기이며 해병대는 육군과 같이 병과라고 한다.[4] 모르는 사람이 드물어 비밀이라고 하기엔 민망 할 정도다.[5] 군사정권 북파 실행 시기엔 중앙정보부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6] 국방정보본부의 통제를 받는 육군부대.[7] 육사 8기, 예비역 대령으로 맥아더가 "This man" 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임한 사람이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맥아더에게 올라오는 북한군에 대한 고급정보가 오면 맥아더는 자신의 책상에 둔 김동석의 사진을 가르키며 This man 이 보낸 거냐고 물어보고 그렇다면 전적으로 그 정보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에서는 6.25 4대 영웅 중에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참고로 가수 진미령 씨의 아버지 되신다.[8] 인터넷에는 '손도끼로 진압 방패를 갈라버린 다음 겁에 질린 의경 대원에게 "걱정마 니들은 안때려" 라고 말하더라.', '경찰특공대가 출동하고 자신들이 하고싶은 것을 다 하자 군가를 부르며 알아서 도열해 경찰버스에 오르더라.' 같은 썰이 떠돌고 있다.[9] 가혹행위중 하나. 겨울철엔 얼음물에 2,3,시간을 버티게 하는 가혹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