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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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권태응.jpg
성명
권태응(權泰應)

동천(洞泉)
본관
안동 권씨
생몰
1918년 4월 20일 ~ 1951년 3월 28일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칠금리
사망지
충청북도 충주군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소설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권태응은 1918년 4월 20일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칠금리에서 부친 권중희와 모친 민경희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인 안동 권씨 가문으로, 9대조 때부터 충주에 뿌리를 내렸다. 부친 권중희는 권태응이 10살일 때 사망했고, 권태응은 한학자이자 진사 벼슬을 지낸 조부 권병억에게 길러졌다. 그는 9살 때 충주공립보통학교(현재 교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집에는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즐기며 글을 짓는 걸 좋아했다.

1932년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성고보 33회 동기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치밀하고 정의감이 있었으며 조선인 학생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사와 대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최인형(崔仁衡)‧염홍섭(廉弘燮) 등이 주도해서 조직한 UTR구락부에 참여하고 친일 선향의 학생을 구타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보름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1937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한 권태응은 도쿄에 유학 중이던 경성고보 33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33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사회주의 성향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과 사회주의사회 실현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다 1939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평소 운동을 즐길 만큼 건강했던 그였지만, 감옥 생활 1년만에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폐결핵 3기 판정을 받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하지만 와세다대학에서는 이미 퇴학 조치를 내렸고, 어쩔 수 없이 조국으로 돌아온 권태응은 인천에 있는 적십자요양원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박희진이라는 간호사를 만나 사랑을 나눴고, 1944년 초에 귀향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작 활동은 시조 창작으로 시작되었고, 점차 시와 동시로 확대되었다. 그가 생전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50편이 채 안 됐다. 1947년 4월 21일 <소학생> 45호에 동요 <어린 고기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1948년 작품 30편을 수록한 <감자꽃>을 출간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한 소설 단편들은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하다가 아들 권영함 씨가 1990년대에 〈충북작가〉 여름호에 게재하면서 공개되었다.

이 단편집 중 〈새살림〉은 1945년 4월26일에 탈고한 작품으로 지주 집 행랑채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빈궁한 젊은 부부의 애환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별리>는 일본 유학을 하는 두 젊은이를 대비시키며 지식인의 도리를 고민하는 작품이며, <양반머슴>은 8.15 광복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양반 신분으로 머슴 노릇하고 있던 윤서방이 농민들의 화합을 이끌어내며 미래를 꾸려나가는 작품이다.

또한 그의 동요, 동시에서는 풍부한 우리 말이 들어있었다. '얼뚱애기'(얼러 주고 싶은 귀여운 아기), '용얭이'(군것질거리), '찌어리'(찌꺼기), '타래'(꼬투리)와 같은 방언을 비롯해 '오골박작'(작은 벌레나 짐승, 사람 등이 한곳에 빽빽하게 많이 모여 자꾸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오볼조볼'(작은 열매 따위가 많이 매달려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탈방탈방'(물건이 얕은 물 위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오곤자근'(서로 정답게 지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캥매캥'(꽹과리 소리를 흉내 내는 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의 문학 활동은 4년이 채 되지 못한데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28일 충주에서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권태응의 작품은 교과서에 한 두품 수록되거나 동시 선집 목록에 오르기는 했지만, 동시 속에 은연 중에 드러나는 현실 지향적 요소가 반공주의 정서가 지배적이던 대한민국 풍토에서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게다가 1960년대 들어 본격동시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로 정형율격을 구사했던 그는 "소박한 동시를 쓰다가 요절한 해방기의 시인" 정도로 치부되었다.

그러다 1948년 출간됐던 <감자꽃>의 재간본이 1995년 재출간된 이후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시작했다. 이후로 그가 필사본으로 갈무리해뒀던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공개되었고, 이오덕 작가는 2001년 출간한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에서 권태응에 대해 “농사꾼과 농사꾼의 아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유일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권태응이 일제강점기 말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대항했다가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실도 조명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권태응 문학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