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니카라과)

덤프버전 :

그라나다
Granada
Santiago de Granada

파일:그라나다 주기.svg



국가
[[니카라과|

니카라과
display: none; display: 니카라과"
행정구
]]

지역
그라나다 주
면적
592.1㎢
시간대
UTC-6
인구
132,054명[1]
인구 밀도
223.0명/㎢

1. 개요
2. 역사
3. 관광



1. 개요[편집]


그라나다니카라과 서부의 도시이자 동명의 주(Departamento de Granada)의 주도이다. 지리적으로 마나과의 남동쪽에 있으며 니카라과호의 북서안에 면한다. 니카라과에서는 9번째로 인구가 많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처지는 도시지만 역사적으로는 니카라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로서의 역사도 수도 마나과보다 거의 300년이나 앞선 1524년에 시작한다.

2. 역사[편집]


그라나다는 1524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세웠다. 이름은 고국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왔다. 식민지 시기 그라나다는 니카라과호산후안강을 지나 대서양 방면의 항구까지 통로가 이어지는 중요한 상업도시로 강을 거슬러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의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2] 1850년 당시 그라나다의 인구는 1만 명이었다. 독립 후 그라나다는 보수주의의 아성으로 자유주의의 중심지 레온과 니카라과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했다.[3] 특히 그라나다는 이런 대립에 끼어든 윌리엄 워커 일당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 전쟁을 일으킨 워커는 1855년 10월 13일 그라나다를 점령했고 1856년 11월 중앙아메리카 연합군의 공격으로 패배 위기에 몰리자 그라나다를 초토화하고 도망쳤다.[4]

윌리엄 워커가 쫓겨난 니카라과는 1893년 자유주의자인 호세 산토스 셀라야가 집권할 때까지 30년 넘게 보수주의자가 집권했다. 이 기간 동안 그라나다는 다시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각종 인프라가 들어섰다. 셀라야 대통령이 집권한 후 그라나다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었지만 그래도 니카라과에서 가장 부유했다. 그라나다의 인구는 1850년 1만 명에서 1950년 2만 1,035명으로 증가했다.[5] 그라나다는 1970~80년대를 휩쓴 니카라과 내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3. 관광[편집]


레온과 함께 니카라과의 양대 관광지로 꼽힌다. 스페인 식민지 시기 세워진 유서깊은 건물들이 볼만하다. 가장 볼만한 건물은 1561년 완공된 그라나다 대성당(Catedral de Granada)다.[6] 다만 거리가 좁아서 자동차로 통행하기엔 불편한 점이 많고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이 물가도 비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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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기준#[2] 그 중에는 그 유명한 윌리엄 댐피어도 있다.[3] 마나과가 수도가 된 사연도 레온과 그라나다 사이의 대립이다. 양측이 자기가 수도가 되겠다고 다투다가 두 도시 사이에 있는 마나과를 수도로 정하기로 합의했기 때문(...)[4] 워커는 도시에 여기는 그라나다였다(Aquí estuvo Granada)는 표지판만 남겨 중앙아메리카 연합군을 능욕했다. 훗날 워커는 온두라스에서도 깽판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5] 같은 해 그라나다 주(Departamento de Granada)의 인구는 4만 8,732명, 니카라과 총 인구는 104만 9,611명이었다.[6]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로 그라나다 대성당에 사용된 자재는 원래 남아메리카 페루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스페인에서 출발한 배가 실수로 그라나다로 오는 바람에 여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