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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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인물
4. 명문가


1. 개요[편집]


플레이어 국가. 즉 주인공. 수도는 양평맥성.[1] 스타트 당시에는 당시 중국을 주름잡던 전국칠웅에 비해 뒤떨어지는 국가라 보정이 있을 것이 공인되었으나 초기 영토나 국력 다이스에서 괜찮게 나와서 상당한 국력으로 시작했다. 스타트 당시 대략 이시대 전국칠웅 최약체였던 연(춘추전국시대)과 엇비슷한 수준. 이 시대에 아직 전국칠웅에 못미치는 국가도 제법 많았던 걸 생각하면 다이스로 인한 초반 보정이 굉장한 수준. 시작시 영토는 대략 요서+요동을 다 확보하고 북쪽 경계가 서요하까지 뻗어 있는 정도. 그리고 꾸준히 팽창한 결과 현재(50스레)기준으로는 연+조를 포함한 중원 동북부 일대[2]와 요동반도+만주 일부분과 한반도 북부[3]까지 확장했다. 그리고 130어장 기준으로 제나라를 상대로 합종군을 일으켜서 제북과 임치, 동군 일대를 정복하고 명실상부한 중원의 최강국이 되었다.
이후 역으로 합횡의 대상이 되면서 조선군 최초의 패배를 맛보는 등의 위기 또한 겪었으나, 합횡 자체가 가진 각 국가간의 사정에 의한 한계 등을 바탕으로 최종적으로는 도리어 위나라를 다시금 몰락시키면서 영역을 넓히고 합횡에 참여했던 국가들 대부분을 대 초나라 연종의 구성원으로 바꾸어버리며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특이사항이라면 특이사항이겠지만, 조선 공족, 즉 기자 조선(?)의 기씨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대다수가 비범하다. 이로 인하여 기취의 은퇴 이후 스레주가 조선 공족들 또한 구현령을 시행할 경우 등장할 수 있도록 조치했을 정도.

기자의 후손임을 자칭하며 이때문에 군주(조선후)의 성씨는 기씨. 처음에는 사칭이었지만 초중반에 공인되는 데 성공해 스무스하게 중원에 진입. 이후 고속으로 성장해 작중 진행상에는 국력만 치면 전국칠웅 중에서도 탑을 다투는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특히 강한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성장 과정에서 신의가 없는 태도를 과하게 보여 외교적인 신용이 없는 국가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4] 그 외에도 태행산맥과 요서회랑이란 지형지물 탓에 국토가 강제적으로 분할되어 있어 국력을 집중하기 어렵다는 내재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정왕 때 요서회랑에 도로를 내고 동조선과 서조선을 연결해서 위의 문제는 거의 해결 되었다.

북방에 위치해서 말 산지를 독점하다싶이 하고 있고, 유목민들과 교류가 많았기에 초반 이후로는 최강의 기병을 운용중이고, 이를 이용한 기동전은 조선군의 최대의 장점 중 하나이다. 이덕분에 무적에 가까운 위용을 자랑하지만, 초원과 중원 두 지역의 일 모두 신경 써야하고 초원이 조선과의 교류로 원역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세후 때 변법을 강하게 밀어붙였고[5], 유후 때 공손앙과 기라등 여러 한다하는 인재들을 등용해서 제도를 개선했기에 중원에서 가장 세밀한 제도를 운용하며, 법가의 총본산이기도 하다.[6] 또한 법가뿐만 아니라 유가,묵가도 상당한 세를 자랑하지만, 도가나 명가는 조선의 실질강건 문화와 잘 안 맞아서 세가 약한모양.

2부 6스레 기준으로 현재는 5대째인 기설의 치세이다.


2. 역사[편집]


상세한 역사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역사 참조.

3. 인물[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등장인물 참조.

4. 명문가[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주요 가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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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 이름은 계 혹은 하도로 연나라 수도였다.[2] 삼국지로 치자면 기주+병주+유주에 해당된다.[3] 관서와 해서, 현대의 평안도황해도 일대[4] 작중 시기는 아직 타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데 익숙하지 않은 시대인데('계절존망'이라고 한다) 그 속에서 조선은 급성장하면서 타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사례가 잦았다. 연나라의 경우 군주인 연간공이 죽으면서 가문 자체가 끝났고, 조나라 역시 군주의 가문은 살아남았으나 나라 자체는 두차례의 공격에 멸망. 위나라의 경우에는 수십년간 동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공격하기로 마음먹자 거의 국가의 허리를 분지를 기세로 맹공을 가했다. 그 결과 한때 제나라를 제외하면 조선은 타국의 외교 상대로써는 크리 이상의 결과에서나 표에 표기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다만 애초에 외교의 특성에 더해 참가자들에게 이 시기의 사정에 고저차는 있을 지언정 그리 밝지는 못했기에, 일단 시도해보고 경과를 보는 식으로 적응을 해나가는 식으로 적응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5] 후에 밝혀지기를 처음부터 군국제를 흔히 아는 형태인 군이 현의 우위에 있는 형태로 적용하는 등 후발주자의 덕을 많이 본 듯. 다만 후에 설명하기를 제대로 된 적용경험이 없어서 책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킨거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6] 세치의 신도 법치의 상앙, 술치의 신불해 중 앞의 두명이 조선에서 활동했고, 한나라와의 교류와 술치연구를 통해 술치 또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