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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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6년 4월 11일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동산리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이명
김고주(金高洲)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기헌은 1896년 4월 1일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의 지시를 받은 곽명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이가순, 이순영, 차광은, 차용운, 이진구, 김장석, 김계술, 정연수, 인이극, 함태영 등 14명과 함께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에서 만나 의논한 끝에 3월 1일에 원산 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각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13명의 주동자들과 함께 시내 요소요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촌동 장터로 행진했다. 그 후 이곳에서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지나서 원산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헌병·소방대가 출동하여 물감을 탄 물을 소방용 호스로 뿌리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이번에는 공포를 쏘아서 오후 6시경 강제 해산하였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체포하였는데, 김기헌도 이때 붙잡혀, 이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2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조선인차가동맹(朝鮮人借家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이로 인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 거주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6.25 전쟁 시기 김기헌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건국훈장 서훈을 미뤘다. 이에 대해 하와이에 거주하는 딸 김년자(金年子)가 항의글을 조선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2년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