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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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 1722년
1. 개요[편집]
조선의 유학자, 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상헌의 증손자이며,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둘째 형인 농암 김창협과 함께 농연[1] 으로 불리기도 한다.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처사이며,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당대 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었으며 조선 후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2]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가문이 가문이니만큼 노론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2. 생애[편집]
아래 내용은 여러 논문을 종합적으로 참조하여 발췌한 것이다.[3]
1653년 효종 4년에 김수항과 모친 안정 나씨 사이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적부터 시재가 뛰어났으며, 15세에 형 김창협과 함께 정관재 이단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4] 큰아버지인 김수증과도 친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5][6]
16세(1668년)에 경주 이씨[7] 와 혼인하였다. 19세(1671년)에 처음 금강산을 기행하며 시명을 얻기 시작하였고, 21세(1673년)에 집안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응시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과거에는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고 시를 추구 대상으로 삼았다. 일정한 곳에 거처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독서를 즐겼고, 특히 형 김창협과 함께일 때가 많았다. 1675년 9월 영암에 유배된 부친을 찾았다. 1676년 조성기와 서로 오가며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김창협도 함께 어울리며 학문을 논했다.
1678년 철원으로 이배된 부친을 뵈었고, 1679년(27세)에 강원도 철원 용화촌 삼부연(三釜淵)에 칩거하며 자호하였다.[8][9] 1680년(28세) 경신환국으로 부친이 영의정으로 복귀하였고[10] 부친의 지시로 서울로 돌아왔으며 낙송루라는 정자를 지어 형제, 친구들과 낙송루시사를 만들었다. 30세에 김석주의 추천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31세(1683년)에 아끼던 뛰어난 문재를 지녔던 막내 동생이자 제자인 김창립이 마마에 걸려 사망하였다.
이 시기까지 자유롭게 지내며 공부하고 시를 짓던 삼연은, 37세(1689년)에 발생한 기사환국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며 큰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11] 부친의 진도 유배시 함께 따라갔고, 부친 사사 후 운구하여 양주 율북리에서 장사를 지냈다. 형제들은 영평 백운산 아래에 모여 거상기간을 갖는다.[12][13] 이후 설악산으로 가서 은거하였고 심리적으로 불교에 의지하기도 한다.[14] 1691년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도 불서를 탐독하자 동생 김창즙이 서신으로 경계하기도 했다.[15][16] 탈상 후 백부와 춘천의 곡운에서 인제의 한계산 유람을 다녀왔으며, 1692년(40세) 여름에 양구에 우거하고, 8월에는 인제의 갈역촌[17] 곡백연으로 갔으며, 11월에는 삼부연으로 돌아왔다.
42세(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은 재집권하였고 부친이 복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유계를 따라 출사하지 않고 유람하고 은둔하며 학문을 닦고 시를 지었다. 반복되는 환국을 겪으며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김창협과 본격적인 성리학 연구를 시작한다. 당시 사람들은 두 형제를 이정(정호, 정이 형제)에 비유하였다. 둘은 정기적으로 만나 학문 토론을 하며 서로를 보완하며 발전하였다. 높은 학문으로 명망이 높아지며 반복적으로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18]
1696년, 1698년 각각 강화유수, 개성유수에 임명된 형 김창집을 방문하였다. 1698년에는 곡백연의 입구에 백연정사를 짓고 은거의 기반을 갖추었다. 그리고 3대째 교유하던 최명길 가문의 최석정과 절교하였다.[19] 1702년 회덕을 방문하여 호서의 유림들과 교유하며 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진다. 1703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박세당의 사변록을 비판한다.[20]
1705년 갈역촌 곡백연에서 평생 은둔의 뜻을 굳히고 벽운사 동쪽에 벽운정사를 짓기 시작한다. 1706년 부인상을 당했다. 1707년 벽운정사는 완성되었으나 곧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1708년에는 형 김창협이 사망하였다.[21]
1709년(57세)에 설악산 조원봉 아래에 영시암을 완성하였다.[22] 이후 영시암에 거처하던 삼연은 5년 동안 동해안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양평 벽계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714년 함께 거처하던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간 호환이 발생하여 은둔을 결국 포기하고 나오게 되었다. 1712년에는 연행길을 떠나는 김창집과 김창업을 전송하였다.[23] 1713년 동생 김창즙이 사망하였다. 1715년 백부가 은둔하던 곡운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된다. 1721년에는 김창업이 세상을 떠났고, 신임옥사로 유배가는 김창집을 전송하였다. 70세(1722년) 2월에 김창집의 편지에 답장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경종 2년 2월 21일.실록 링크1, 실록 링크2)[24] 2개월 후 김창집은 사사되었다 (경종 2년 4월 23일).실록 링크[25]
문집으로 삼연집(三淵集) 36권 18책이 전한다. 사망하기 전 조카이자 제자인 김신겸과 아들 김치겸에게 문집의 산정에 관한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三淵集拾遺」 卷31의 語錄에 기록되어 있다.삼연집 해제 참고[26]
여담으로 안동 김씨의 족보 첫 발행에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김수항의 발의로 시작되어, 김창흡이 정리하였다. 족보 서문도 김창흡이 작성하였으나 간행까지는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727년에 간행되었고 김신겸이 간행 내력을 서술하였다.
3. 문장과 시[편집]
낙송루 시사를 창도하여 동생 김창업, 김창립 및 이규명, 홍세태, 김시보, 홍유인 등과 함께 시와 시경, 사기 등 전적을 읽으며 체계적인 시문 공부를 하였다.[27] 이들은 현재 백악시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형 김창협, 동생 김창업, 조정만, 김시보 형제와 청풍계 시회를 조직하여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 경전을 읽고 토론하고 시문을 지어 서로 품평하였다.
현대로 치면 학회나 소모임을 통해 친목과 학문, 시, 문장의 교류의 장을 가졌다고 보면 되겠다. 김창흡은 이 공부와 적극적인 창작을 바탕으로 추후 본인의 시론을 정립하게 된다. 그 실천을 위해 삼연은 직접 전국 산천을 주유하며 산수의 진면목을 시화하였고, 우리나라 한시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40년 동안 설악산에 은거하며 왕래하였고, 금강산도 6차례나 올랐다. 호남, 영남, 근기, 관서, 관북의 산천과 사찰을 수차례 유람하며 국내 대부분을 돌아다녔다. 산수도 단순한 미적인 대상이 아니라, 시인에 앞서 유학자로서 산수 속에 깃들인 이치를 체득하고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재인식하여 산수의 품평, 마음과 역사에 대한 강론, 고금에 대한 풍자를 하였다.[28][29]
이는 당대 복고적인 시단에 대한 진시 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문으로 표현한 진경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했고, 제자인 진경시의 대가 사천 이병연과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 절정을 이룩하게 된다. 삼연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시 창작을 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다.
조선조 3백년의 누습을 한꺼번에 씻은 시인. - 조귀명(趙龜命, 1693 ~ 1737)[30]
조선조에서 才學(재학)이 모두 지극한[31]
유일한 시인. 3백년 동안 대적할 이가 없을 것. - 안석경(安錫儆, 1718 ~ 1774)[32]
선조 이후의 문장이 볼 만한 것이 많은 가운데 시인으로는 모든 체제를 갖춘 淵翁(연옹)[33]
에 이르러서야 大家(대가)를 이루었다.대상을 있는 그대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읊어낼 때 이것이 우리의 시, 곧 조선의 한시. [34]
- 이덕무
노년기의 삼연은 숙종 말년 격변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사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세계를 투시하고, 세상의 수많은 현상을 깊이 성찰하였다. 60세 이후 삼연은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성의 깊이를 획득하게 된다. 일찍부터 거창한 관념의 허위성을 회의하였던 삼연은 갈수록 일상의 작고 구체적인 일에 내재해 있는 진실에 주목하였다. 이는 연륜이 쌓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삼연은 관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져서, 먹고 마시는 일상의 일을 송시(宋詩)의 격조와 당시(唐詩)의 소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를 스스로 잡스러운 민요라고 하여 낮추어 부르며 그러한 형식을 선호하였다.
-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1999
일화 하나. 1684년에 동생 김창즙이 조성기와 만남에서 있던 이야기를 형에게 전한다. 동악 이안눌[35] 과 오산 차천로[36] 의 시를 높이 평가하더라는 이야기. 혈기 넘치는 삼연은 도전장을 던지며 시론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37][38] 삼연은 평소 시에 대해 진중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 시문을 하찮거나 자잘한 기예로 여기는 통념에 불만이 있었다. 둘 사이에서 서신으로 논쟁이 오갔으며, 김창협과 임영도 참전하여 삼연의 편을 들었다.김창협의 편지1편지2편지3 조성기는 도학자의 입장에서 문학을 도학의 도구로 이해한 반면에, 삼연은 문학의 전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결과적으로는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 둘 사이에서 지속되는 학문적 교류의 바탕이 되었다. 훗날 조성기 사후 '근세의 학문은 오직 졸수재가 대의를 얻었다', '지금도 꿈 속에서 왕래한다.', 본인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처음 궁격(窮格)하는 방법은 졸수재로부터 많이 얻었다'고도 하였다. 또한 '만약에 공의 문에 미치지 않았다면 일생을 그르칠 뻔 하였다.'고 극찬한다.[39] 김창협도 이후 조성기와 훈훈한 관계를 이어갔다.링크
대표시 중 하나. 평양 부벽루 연광정에 올라 지은 것이다. 다음 링크에서 다른 시들도 확인할 수 있다. 링크
설악산에 숨어 사는 나그네가
관서에서 다시 멋대로 노닌다네.
몸을 따르는 것은 맑은 달빛이요
밤을 택한 것은 높은 누각이기 때문.
칼춤을 추자 물고기가 조용한데
술잔이 돌자 은하수가 흐른다.
닭 우는 새벽 돌아보고 일어나
고운 배에 흥을 머물러 둔다네.[40]
금강산 구룡연을 하나하나 읊은 오언절구.
초연은 거울처럼 밝게 열려 / 물과 돌 맑고 둥그네 / 언덕이 가팔라 큰 나무 없는데 / 어디서 온 물결이 기슭을 치는가
이연은 바가지를 걸어놓은 듯 / 쏟아지는 물결 떠들썩하게 삼켰다 뱉았다 / 누가 알랴. 조그맣게 입을 딱 벌리고서 / 먼 골짜기까지 뽕나무 뿌리를 칠 줄
삼연은 콸콸 물결 쏟아져 / 푸른 빛 깊은 물 속까지 꿰뚫었네 / 신기하여 가까이 할 수 없으니 / 말 없는 모습 멀리 벼랑에 섰네
사연은 형세가 완만하여 / 소리와 빛이 조금 사람을 누그러뜨리네 / 쭈빗쭈빗 아래 여울을 골라 / 반쯤 건너다 자꾸 고개 돌린다
오연은 급하에 물결이 휘돌아 / 남쪽 언덕 곁으로 가마솥을 이루었네 / 치달리는 물결 앞뒤를 뒤바꾸고 / 나아가고 막히고 빙빙 돌며 춤추네
육연은 아름답기 구슬 같아 / 맑게 잠긴 돌무늬 곱다 / 머리끝 삐죽이며 깊은 곳 들여다보니 / 높은 구름이 바로 그 푸른 빛에 떠있네
칠연은 폭이 둥글고 작아 / 고요하게 맑은 윗물 잇고 있네 / 세 바퀴 달린 하차가 / 물고기집으로 돌아든다
팔연은 얕아서 씻을만 해 / 잠긴 용도 쉽사리 몸을 드러낸다 / 날이 고요하니 찰싹이는 물결 즐기니 / 진실로 잠을 만난 사람이어라
구연은 산 밖으로 떨어져 / 천길 여울을 끌어당기는 듯 / 끝없는 물소리 밤낮으로 두들기는데 / 신물은 그 속에서 절로 편안해
훗날 정조가 김창흡을 언급한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학문, 유학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복고 군주 정조 입장에서 삼연의 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삼연(三淵) 의 시를 누가 아끼지 않겠는가마는, 다만 그토록 화려하고 번성한 문족(門族)에서 이처럼 산야(山野)의 싸늘하고 파리한 어휘가 나오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또 농암(農巖)의 문장을 그 누가 추중(推重)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자신은 늘 명나라 사람들의 어투를 피하려 힘쓴다고 했으나 가끔 그런 병통을 면하지 못한 곳이 나오곤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문장도 시운(時運)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19년의 한 기사, 링크
"근세에 시를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고(故)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을 꼽는데, 나는 그의 시가 치세(治世)의 음(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순전히 침울해하고 고뇌하는 뜻을 담은 시여서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빈천한 처지의 사람과 같은 작품을 짓되 본디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한 점이 있었으니, 후생 소년들은 절대로 본받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
본인도 빼어난 문인이었던 제자 이천보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바 있다.
오늘날 시를 짓는 사람들이 삼연을 본받지 않으면 남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삼연의 학식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삼연의 기이한 점만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삼연의 나쁜 병통을 얻고 만다. 오늘날 시가 쇠퇴하게 된 데 대해 삼연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4. 자유스러웠던 학문 경향[편집]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였지만 불, 선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30대에는 장자를 탐독하기도 했다. 화엄경, 주역도 가까이 하였고, 승려 무용 수연과 교유하며 주고 받은 글도 많다. 저서 삼연집에 불교 관련 시가 323수나 실려있고, 53수는 승려와 관련된 것이다. 기행문에도 사찰탐방한 기록도 많다. 죽기 직전에는 유불도 삼교를 꿰뚫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이는 자신을 지나칠 자가 없으리라 자신하였다. 1713년 금강산을 유람할 때 재총상인이라는 승려와 침식을 함께 하고 주변의 산수를 유람하며 진지한 교유를 나누기도 했다. 불교의 화엄사상과 선종의 간화선에 관심을 가졌으며, 성리학의 심성론과의 유사함, 차이에 대해 고찰했다. 유학자인 만큼 성리학에 중심을 두면서도 불가나 도가의 직관적인 내면을 성찰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불교가 원만함은 알지만 모가 남을 알지 못하는데 비해, 유교는 원만함에서 사물의 법칙인 모남을 안다고 비교하여, 불교를 배척하지 않으나 유교를 위로 평가한 바도 있다.
유학에서도 조성기의 영향으로 성리학에만 치중하지 않고, 소옹, 육구연의 상수학, 상산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양명학도 들여다보았다. 어찌 보면 삼연은 다방변의 학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지는 지적인 편력을 즐겼다. 출사하여 유학의 이상을 실천하거나, 학문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보다는 다방면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시문을 통해 특히 조선 후기 경화사족의 문화의식, 학문경향을 선도했다. [42]
5. 산수 유람[편집]
젊을 때는 철원 삼부연 폭포 곁에 집을 짓고 살았다. 부친이 서울로 부르면 왔다가도 다시 산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부친의 질책에는 '소자는 천석고황의 질병이 있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심하여,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는 것 같기에 곧바로 떠나가곤 하였습니다' 로 답한 적이 있다. 평생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며 살았고(특히 설악산과 금강산), 64세에는 함경도로 여행을 떠나 길에서 보고 느낀 점을 392수의 연작시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쏟아낸다.[43]
형 김창협의 문인인 신정하(申靖夏)가 이운(李澐)에게 들은 일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김창협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며 필수여행지만 찾아다니는 스타일이라 하였다. 반면 김창흡은 굳이 계획하지 않고 흥취에 따라 유람을 즐겼다고 한다.[44]
훗날 정약용은 삼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다산은 본시 은사와 산림처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임금이나 수령이 예를 갖추어 찾아도 만나주지 않아 몸값을 높이는 부류의 산림처사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게다가 다산은 노론에 밀려난 남인인데도 삼연에 대해서는 깨끗한 선비(淸士)로 높이는 모습이다.
거룩할 사 김삼연 선생께서는
청사(淸士)의 열전에도 아니 부끄러워
그 어찌 알았으랴 경상(卿相) 가문에
그와 같은 선골(仙骨)이 나타날 줄은
벼슬 녹 내던지고 휘파람 불며
여기저기 명산을 두루 다녔네
어쩌다 뜻 맞으면 그냥 머물러
미련 없이 마음껏 활개를 펴고
거년(去年)엔 곡운[45]
에 깃들었다가금년엔 벽계에 자리 잡았네
붓대를 휘갈기면 끝없는 문장
안개며 노을빛이 종이 수놓아
영광 치욕 모두 다 놀라지 않고
순탄함과 역경에 변함 없었네
세상을 이와 같이 살 수 있다면
인생이 날아가는 번개와 같을텐데[46]
6. 파이터적 면모[편집]
실록의 졸기에도 협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이터적인 면모가 있었다. 1698년, 46세 때 오시복, 이서우, 권유, 이봉징 등 남인의 등용에 관련하여 최석정과 갈등이 있었다. 오시복은 김창흡 형제의 부친 김수항이 사사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실록 링크 이봉징은 송시열과 김수항의 죄가 김안로와 정인홍보다 더하다며 사사하라는 논의를 시작하였고, 이서우과 권율이 이어 사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바 있다. 최석정은 병자호란 당시 김창흡의 증조부인 김상헌과 대척점에 서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훗날 화해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친분을 유지하였고 김창흡 형제까지도 가문 간의 교유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석정은 현실적인 인물로 탕평에 의거하여 오시복을 포함한 남인의 등용을 숙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에 앞서 김창협 형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에 김창협은 겸손한 말로 거절하였으나[47] , 김창흡은 '최석정의 조부인 최명길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꾸짖어 욕했는데 거의 저자 아이들의 말투와 같았다'고 하는데 이는 숙종실록에 실린 내용 그대로이다. 김창흡은 여기에서 '세상에서 고사(高士)로 지목하나, 그의 적절하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고 비판 받았다. 최석정도 '묻지 않을 것을 물었다'고 평가 받았다.실록 링크1실록 링크2 오묘한 것은 1696년에 최석정이 김창흡을 서연관에 추천한 적도 있었다. 김창흡이 최석정에게 보낸 절교 편지가 실록에 실려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실록 링크
옛날 나의 증조부(=김상헌)는 새 황제(皇帝)에게 잘 아첨하지 않는다 하여 귀하의 조부 지천(遲川) 상공(相公)(=최명길)에게 큰 미움을 받았고, 억지 웃음 속의 노여움이 국서(國書)를 찢던 날 가득히 담겨 있었고, 밀치고 누르던 손이 복상(卜相)을 삭제하던 날 차츰 드러났습니다. 유석(柳碩)과 이도장(李道長)의 무리가 그 비위를 맞추어 고슴도치처럼 몰려들어 물여우(蜮)의 독기를 뿜어내며 기필코 나의 증조부를 해치려 하였으나, 다행히도 하늘의 정함이 견고하고 인묘(仁廟)께서 지극히 총명하시어 증조부께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천공(遲川公)이 패합(捭闔)에 능숙하여 이를 죽이고 살리는 데 잘 이용하였음에도 그 계책이 또한 다행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유독 그 자손에게 준 계책이 흉악한 무리의 기세를 배양해 왔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여파(餘波)가 한없이 넓고 크게 퍼졌습니다. 저 유석·이동장의 무리의 잔당들이 더욱 번성하고 극성스러워져 우익(羽翼) 이외에 또다른 우익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한(漢)나라의 얼굴에 오랑캐의 마음을 가지고 겉으로는 외면하면서도 은밀하게 비호(疪護)한 자[48]
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방어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힘이 있었습니다.나의 선인(先人)(=김수항)께서는 홀로 충직(忠直)한 길을 지키면서 그 가운데 서서 눈앞에 이해(利害)가 가득하다 하여 몸에 배이도록 익혀온 선대의 유훈을 조금도 바꾼 적이 없었으니, 어찌 갑자기 닥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선인이 당한 화는 그 유래한 바가 멀고 얽어 만든 자가 많습니다. 경신년으로부터 기사년까지 진실로 은밀히 도운 자가 있어 그들의 일이 성취되었음을 기뻐하여 소곤소곤 술잔을 들어 경하하였고, 기사년으로부터 갑술년(甲戌年)까지 역시 크게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그 일이 뒤엎어졌음을 민망히 여겨 급히 머리를 풀고 구원(救援)했던 것이니, 앞서 이른바 겉으로는 외면하면서 은밀하게 비호한 자들이 여기에 과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하의 형적(形迹) 역시 십중팔구는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속으로는 이미 교칠(膠漆)같이 지냈으니, 겉으로 비록 부월(斧鉞)로써 그들을 치려 하여도 진실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이미 그들과 모의를 같이 하였고, 그 이익을 나누었으니, 그들과 어깨를 견주며 동행하지 아니하여도 정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모두 씻고 털어서 끌어들이면 죄가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다시 그들의 공로를 무언 중에 상찬(賞贊)할 것이니, 합하의 심술(心術)이 여기서 그 전모가 다 드러났습니다. 합하는 지금 또 선대의 교훈을 계승하여 밝히고 사문(師門)을 세우는 것으로써[49]
능사로 삼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사화(士禍)를 근심하고 아파하며 나라의 명맥(命脈)을 아끼겠습니까? 인후(仁厚)로써 군자를 대접하고 법제로써 간흉한 무리를 징계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모든 것이 그 반대가 되었으니, 이택당(李澤堂; 택당 이식)의 이른바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베푼다는 말이 어찌 이러한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합하의 행위는 오히려 매우 명쾌하지 못한 바가 있으니, 그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것이 모두 드러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그 행위를 추적하면 반간(半間)도 한계를 짓지 않은 것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이 과연 소인(小人)이라면 나는 억울하게 되어 저들의 죄를 다스려야 하고, 내가 만약 어질지 않고 바르지 않다면 저들은 나를 법으로 묶어 내가 패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요컨대 이 세상에서 둘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이와 같은 조치를 하고자 하면, 차라리 과거의 옥안(獄案)을 모두 번복하여 국시(國是)를 시원하게 정하고, 성상의 교지(敎旨) 중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도 빨리 반한(反汗)을 청할 것이며, 스스로 과거의 논의가 잘못되고 합당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분명히 자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여 소인을 소인이 아니라 하고 해독을 입은 사람이 어진 사람도 아니고 바른 사람도 아니었다고 뒤집어 엎은 연후에 차례로 거행한다면, 스스로 일이 되어 나갈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급급하게 한단 말입니까?갑술년 이후부터 대신을 높이 반드는 도리를 하늘처럼 높이하여 황상(黃裳)에도 침을 뱉을 수 있고 역린(逆鱗)도 친압(親狎)할 수 있게 되니, 말 한 마디가 정승과 관계될 겨우 차꼬를 채우지 않으면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습니다. 대신의 소중함이 이와 같아 대신을 범한 자는 곧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인의 화벽(化碧)의 한(恨)이 지하에 영원히 맺혀 있는데, 저 흉악한 무리의 붉은 슬갑(朱芾)은 여전히 휘황하게 진신(搢紳) 사이에서 빛나고 있으니, 오늘날 대신된 자가 어찌 차마 이를 보고 있단 말입니까? 똑같은 대신인데 어떤 사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은 썩은 풀보다도 가벼우니, 아! 어찌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까? 혹 오늘날의 대신이 지난날의 대신보다 본시 소중함이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멀어진 사람은 홀대하기 쉽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업신여기기 어려운 탓입니까? 아니면 오늘날의 도리는 지난날의 도리가 아니며, 들어오는 자는 주인이 되고, 나가는 자는 노복이 되어서 그러합니까?
대개 일찍이 자전(慈殿)을 관속(管束)한 적이 있었으므로 선인이 그들의 칼날 같은 기세를 저촉하면서 토벌할 것을 청하였고, 나약한 임금이라고 대행 대왕(大行大王=현종을 가리킴)을 무함(誣陷)하였으므로 선인이 명을 받들어 그들의 죄를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오늘날 묘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역적을 비호해 육성하며 제 몸을 아끼고 군왕은 뒷전으로 돌리는 것과는 진실로 다른 것이 있으니, 별다른 사의(事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고 그 가볍게 여김이 이와 같으니, 또한 세도(世道)를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여론이 이미 이와 같다면, 선인이 어질지도 않으며 바르지도 않다는 것과 저 흉악한 무리들이 소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지고는 본시 시비할 것이 없으나, 감히 묻건대, 선인이 합하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무슨 일이었으며, 저 흉악한 무리들이 합하에게 덕을 입은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저 흉악한 무리의 공적과 능력은 달리 보이지 않고, 특히 선인(先人)을 해친 것에서만 드러났는데, 합하로부터 칭찬받고 기용되었다면, 선인을 해친 사람은 정(鄭)나라의 원수가 아니요 바로 자서(子西)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니, 어찌 한 간(一間)의 차이뿐이겠습니까? 이처럼 이미 드러난 면모(面貌)에 의거하여 과거의 행적을 더듬고, 다시 기타의 맥락(脈絡) 관계를 참작 고찰하여 숨겨 둔 장물을 뒤추적하여 보면, 앞서 이른바 술잔을 들어 서로 경하하고 머리를 푼 채 달려가 구원한 자가 결단코 다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러리라고 의심했던 자가 지금은 십분(十分) 결정적이어서, 전해 오던 이런저런 말들을 확실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도 역시 간특함이 드러나는 데서 마음이 약해지고 바른 것과 견주는 데서 담이 작아지는 자가 있어서, 언행이 겉과 속이 일치하지 못하고, 마음을 운용(運用)함에 있어 분열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크게 검은 속 한 변두리에 미약한 흰 점을 남겨 두고, 길게 굽은 끝머리에 조금 곧은 것을 붙여 두었습니다. 마음은 검으면서도 옥(玉)이 검다고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돌려 아양을 떨며 말하기를, ‘나도 흰 것을 좋아 한다.’하고, 본심은 굽어 있으면서 현(絃)이 굽었다고 질책하는 것이 두려워서 허리를 펴고 앞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도 곧은 것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는 등 이러한 방법으로 꾸미고는 스스로 이르기를, ‘유리한 지점(地點)을 교묘하게 점거하였다.’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가장하지만, 유식(有識)한 사람이 곁에서 볼 때 순전히 검고 완전히 굽은 것보다 과연 크게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하(=최석정)는 평소에 표리(表裏)가 다른 태도와 안색을 잘 지어서 사람을 부리곤 하였는데, 평범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말이 선인에게로 미치면 온화한 태도로 예모(禮貌)를 갖추어, '문생(門生)', '좌주(座主)'로 일컬었고, 불녕(不佞)에 대해서도 본래 젊은 벗으로 대하면서 친밀하게 기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세가 다시는 이와 같이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감히 먼저 짧은 서간으로 주목(朱穆)의 고의(古義)에 붙일 뿐이며, 감히 합하가 회답을 번거롭게 보내시어 체면을 손상케 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50]
박세당이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를 부탁받아 글을 지었는데 송시열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노론계에서는 크게 반발하여[51] 이를 기회 삼아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김창흡은 본인의 제자이자, 박세당의 제자이기도 한 이덕수에게 서신을 보내 박세당을 비난하였다.[52]
1705년 회니시비 당시 외삼촌인 나양좌에게 보내려 한(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편지에는 형 김창협처럼 노론의 입장에서 송시열을 논척하고 윤선거를 극찬하는 주장을 논박하면서 부친이 우암을 존모하였던 점을 강조하였다고 한다.[53]
7. 가족 관계[편집]
증조부는 김상헌, 조부는 김광찬, 부친은 김수항이다. 형은 김창집, 김창협이며, 동생으로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이 있다. 후손으로 순조 시기 우의정에 오른 김달순과 방송인 김구라가 있다.